주체107(2018)년 7월 18일 로동신문
전화의 나날에 남녘땅을 진감한 공화국의 예술폭풍 1950년 여름의 격동적인 나날들을 더듬으며
우리 공화국의 력사에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인 1950년 여름 남녘땅을 진감한 공연열풍에 대한 이야기가 새겨져있다. 1950년 6월 28일 리승만괴뢰역도의 학정밑에 신음하던 서울시민들은 침략자들에 대한 즉시적인 반공격을 개시한 인민군대에 의하여 진정한 해방의 날을 맞이하게 되였다.이와 더불어 서울에서는 세계 그 어느 전쟁사에도 없는 력사적인 화폭들이 펼쳐지게 되였다. 마치도 1945년 8월에 바로 이러한 때 서울시민들은 공연의 첫막이 오르던 그날 무대에 나선 소개자의 인사말은 온 관람석을 격동시키였다. 《서울시민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였습니까.우리들은 지난 5년간 민족의 태양이신 민족의 태양 순간 장내에는 폭풍같은 환호성이 터져올랐으며 오래도록 박수소리가 울려퍼지였다.공연은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당시까지만 해도 공화국남반부에서 제일 크다는 어느 한 교향악단의 성원은 50명정도였고 다른 예술단체들은 훨씬 더 적었다.그런 예술단의 공연만 보아온 서울시민들은 100여명의 군복입은 예술인들이 출연하는 공연을 보고 찬탄과 부러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출연자들과 관람자들이 한형제처럼 어울려 시간가는줄 모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때 남녘의 한 연주가는 협주단의 애젊은 트럼베트연주가의 손을 부여잡으며 쏘련의 어느 학교에서 누구한테 배웠는가고 물었다. 그때 협주단의 연주가는 《쏘련이라니요? 저는 인민군협주단에서 예술을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장내에 화기에 넘친 웃음판을 펼치기도 하였다. 1950년 여름은 진정 해방된 서울시민들에게 새라새로운 기쁨을 안겨준 잊을수 없는 낮과 밤이였다.서울이 해방되여 얼마후 시내에는 큰 규모의 서울시해방경축방문단이 도착하였다는 소문이 나래가 돋친듯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이 방문단에는 해방전부터 북과 남의 인민들속에 잘 알려져있는 예술인들과 남녘땅에 고향을 둔 예술인들이 있는것으로 하여 인민들의 각별한 관심을 모았다.하기에 서울시해방경축방문단의 공연과정에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류다른 화폭들이 펼쳐지였다.그중에는 남쪽에서 오래동안 연극활동을 하다가 해방후 이들은 여러편의 극작품들을 무대에 올리였으며 예술영화 《내 고향》과 기록영화들을 상영하였다. 희망을 잃고 살던 서울시민들은 이를 통하여 동포애의 뜨거운 정을 받아안았으며 앞날에 대한 신심을 가다듬게 되였다. 해방된 서울시민들을 위하시는 서울시민들은 외국을 방문했던 예술단이 해방지역에 나와 인민들을 찾아다니며 공연하는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국가를 대표하는 예술인들을 그것도 포연이 채 가셔지지 않은 서울에서 직접 만나고 그들의 공연을 보게 된것은 시민들로서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행운이고 기쁨이였다.그들은 나라가 생겨 처음으로 자체의 민족예술단을 꾸려가지고 대외에 나가 조선의 예술을 크게 떨치였다는 소식도 감격스러운데 그런 예술단이 서울에 왔으니 이것이야말로 민족의 태양 서울에서 진행한 우리 예술인들의 공연활동은 인민군군인들에게 커다란 힘을 주었다.해방된 남녘땅인민들은 자기들의 고장에도 공화국북반부의 예술인들이 올수 있다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남녘의 그 어디서나 인민들은 불멸의 혁명송가를 합창하였으며 남녘인민들에게 공화국북반부인민들과 꼭같은 참된 삶을 안겨주시는 하기에 공연활동이 진행되는 과정에 남녘의 창작가, 예술인들속에서는 인민군대입대를 탄원하는 성원들이 계속 늘어나게 되였다. 하여 1950년 여름 서울에서는 남녘의 애국적인 예술인들이 인민군대에 입대하는 감격스러운 화폭이 펼쳐지였다.그들은 그후 전쟁승리를 위하여 불비쏟아지는 전선에서 예술활동을 진행하였으며 그 나날에 정신육체적으로 성장하고 단련되게 되였다. 그들가운데서는 높은 국가수훈자도 배출되였고 인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창작가, 예술인들도 나왔다. 1950년 여름은 우리 공화국의 력사에서 순간과도 같다.허나 그 나날은 본사기자 차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