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일 성
온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조국통일을 자주적으로 실현하자 제3차 범민족대회에 참가한 해외동포들과 한 담화 1992년 8월 19일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제3차 범민족대회에 참가한 해외동포 여러분들을 만나니 매우 반갑습니다. 나는 제3차 범민족대회가 성과적으로 진행된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며 열렬히 축하합니다. 이번 범민족대회에 비록 남측대표들이 참가하지 못하였지만 대회는 조국통일운동을 보다 높은 단계에로 확대발전시키는데서 중요한 리정표를 마련한 력사적인 대회였습니다. 여러분들이 1990년대에 기어이 조국을 통일하고 통일의 광장에 나와 조국통일은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더는 미룰수 없는 민족지상의 과업입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조국을 통일하여 온 겨레의 절절한 념원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나라가 통일되면 우리 인민은 남부럽지 않게 잘살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비록 령토는 크지 않지만 세 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있고 지하자원이 풍부하며 인구도 7 000만명이나 됩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 나라는 통일만 되면 경제를 빨리 발전시켜 인차 세계선진국대렬에 들어설수 있습니다. 조국통일은 반드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에 기초하여 실현되여야 합니다. 내가 이미 1970년대초에 조국통일3대원칙을 내놓았는데 이 원칙에 의거하여야 나라의 통일을 실현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하는데서 무엇보다도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고히 견지하여야 합니다. 외세에 의존하여서는 나라의 통일을 실현할수 없습니다. 지금 일부 나라들은 말로는 우리 나라의 통일을 지지한다고 하지만 실지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가 통일되는것을 원하지 않고있습니다. 이 나라들은 우리 나라가 분렬되여있어야 자기네가 마음대로 할수 있기때문에 은근히 통일보다 분렬을 바라고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조국통일을 실현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경험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혁명과 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자주적으로, 자기식으로 풀어나가는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난 기간 미제와의 싸움도 우리 식으로 하였고 사회주의건설도 우리 식으로 하였습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 쏘련에서 나온 사람들은 쏘련식전법을 주장하였고 중국에서 나온 사람들은 중국식전법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적들과의 싸움을 쏘련식도 아니고 중국식도 아닌 조선식으로 하여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시기에 많은 땅을 적들에게 내여주고 후퇴하였다가 다시 공격한 쏘련식전법은 령토가 크지 않은 우리 나라의 실정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의 조건에서 후퇴를 잘못하다가는 적들에게 나라를 다 빼앗길수 있었습니다. 중국식전법도 왔다갔다하면서 싸우는 운동전의 방법인데 그것 역시 령토가 크지 않은 우리 나라의 실정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 주체적인 전법으로 적들과 싸울것을 결심하고 사대주의자들과 교조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대하였으며 《한치의 땅도 적에게 내여주지 말라!》라는 구호를 내놓았습니다. 나는 그때 인민군대지휘관들에게 식사를 쏘련사람들은 포크로 하고 중국사람들은 저가락으로 하지만 조선사람들은 숟가락으로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적들과의 싸움도 우리 식으로 해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 나라의 지형조건에 맞게 산악전을 많이 할데 대하여 강조하였습니다. 인민군대지휘관들은 우리가 내놓은 전법이 아주 정당하다고 하면서 전적으로 찬성하였습니다. 조국해방전쟁시기에 교조주의자들이 쏘련에서 평사포도 여러문 사왔지만 그것을 제대로 써먹지 못하였습니다. 산이 많은 우리 나라의 지형조건에서는 평사포보다 곡사포가 더 필요하였습니다. 곡사포를 가져야 산너머에 있는 적들을 소멸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시기에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철저히 반대하고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 주체적인 전법으로 싸웠기때문에 승리를 이룩할수 있었습니다. 전후에도 우리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우리자체의 힘으로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게 사회주의를 건설하였습니다. 한때 현대수정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쎄브에 들라고 압력을 가하였지만 우리는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겠다고 하면서 쎄브에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쎄브에 들지 않고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을 발휘하여 사회주의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자체의 힘으로 해결한것은 천만번 정당하였습니다. 최근에 이전 쏘련과 동구라파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무너졌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사회주의가 끄떡하지 않고 승승장구하고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우리 식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였기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도 이전 동구라파사회주의나라들처럼 다른 나라에 의존하였더라면 벌써 망하고말았을것입니다. 얼마전에 나는 평양을 방문한 남조선사람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주체사상의 요구대로 혁명과 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우리 식으로 풀어나간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우리가 주체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혁명과 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게 자체의 힘으로 풀어나간것이 정당하였다는것을 인정하고있습니다. 그전에 일본주재 미국대사로 있던 사람이 우리 나라에 대한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우리 나라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해온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글에서 조선의 우리는 외세의존을 철저히 반대하고 민족자주의 립장에 튼튼히 서서 조국통일을 자체의 힘으로 실현하여야 합니다. 나라의 통일을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기본담보는 온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는데 있습니다. 단결은 모든 승리의 결정적요인입니다. 북과 남, 해외의 모든 조선동포들이 민족대단결의 기치아래 굳게 뭉쳐 투쟁한다면 조국통일의 도상에 가로놓인 현 난국을 이겨내고 1990년대에 나라의 통일을 실현할수 있을것입니다. 나는 혁명과 건설을 령도하여온 전행정에서 언제나 민족의 단합을 이룩하는데 선차적인 힘을 넣어왔습니다. 화전에서 《ㅌ. ㄷ》를 조직하고 혁명활동을 시작한 그때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근 70년동안 나는 민족통일전선을 실현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였으며 민족의 단합된 힘에 의거하여 혁명과 건설을 성과적으로 추진하여왔습니다. 일제를 쳐부시고 조국을 광복하기 위한 항일혁명투쟁시기에는 반일민족통일전선로선을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습니다. 나는 항일유격대를 창건한 다음 인차 량세봉의 독립군부대와 통일전선을 실현하기 위하여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남만으로 진출하였습니다. 남만으로 떠나기에 앞서 어머님에게 량세봉이 독립군사령을 한다고 하는데 내가 부대를 이끌고 남만에 가서 그와 통일전선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님은 그렇게 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시였습니다. 사실 그때 우리 민족이 단결하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서는 발톱까지 무장한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승리할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자들은 이러저러한 원인으로 하여 단합을 이룩하지 못하고 분렬되여있었습니다. 나는 먼저 량세봉과 통일전선을 하고 그에 기초하여 모든 반일세력과 통일전선을 실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나는 항일유격대오를 거느리고 통화에 가서 량세봉을 만났는데 그는 매우 반가와하면서 우리를 성대하게 환영해주었습니다. 량세봉은 우리 아버님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는 우리 아버님의 장례식에도 참가하였댔습니다. 내가 그에게 통일전선문제를 제기하자 처음에는 흥미있어하였습니다. 그런데 량세봉은 자기 부대에 잠입해있던 일제의 밀정인 참모놈의 리간책동에 넘어가 우리와 손을 잡는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참모놈은 량세봉에게 지금 항일유격대가 독립군들을 끌어당기려 하고있는데 잘못하다가는 부대를 다 떼울수 있다고 하면서 우리와의 통일전선에 쐐기를 박았습니다. 나는 그 참모놈이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그가 틀림없는 일제의 밀정이라는것을 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량세봉은 참모놈의 정체를 모르고있었기때문에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때 나는 량세봉이 오늘은 비록 우리와 손잡는것을 거절하지만 앞으로 언제인가는 우리와 반드시 손을 잡을것이라는것을 믿고 그곳을 떠나 류하, 몽강을 거쳐 동만으로 갔습니다. 반일민족통일전선로선을 실현하는데서 결정적인 계기로 된것은 조국광복회창립이였습니다. 나는 1936년 5월에 동강에서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체인 조국광복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조국광복회의 강령과 규약, 창립선언은 내가 직접 작성하였습니다.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은 나와 몇명의 애국지사들의 이름으로 발표하였는데 나는 김동명이라는 가명을 썼습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내가 나이도 어리고 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있지 않았기때문에 가명을 쓰는것이 더 좋았습니다. 조국광복회가 창립되고 그 강령과 선언이 나가자 각지에 흩어져있던 많은 독립군부대들과 반일운동자들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량세봉이 데리고있던 독립군도 조국광복회가 창립된 다음에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량세봉이 죽은 다음 독립군사령을 김활석이 하였는데 그는 장개석의 국민당을 숭배하면서 그와 련계를 가지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일제는 그가 국민당과 련계를 가지려 한다는것을 알고 저들의 밀정을 장개석의 특사로 가장시켜 독립군부대에 들여보냈습니다. 김활석은 장개석이 자기를 만나주려고 한다는 밀정의 말을 곧이듣고 밀정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때 그는 도중에 어떤 집에 들어가 자고 일어나보니 일제의 경찰서였다고 합니다. 일제놈들은 그에게 술과 마취제를 먹여 잠자게 하고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체포하였습니다. 그래서 김활석은 일제놈들한테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후 최윤구가 독립군사령을 하였는데 그가 남아있던 독립군을 데리고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나는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천도교인들과 통일전선을 하는데도 큰 힘을 넣었습니다. 그때 항일유격대가 활동하던 지대에 천도교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나는 천도교인들을 반일의 기치밑에 묶어세우기 위하여 천도교 하층과의 사업을 적극 벌리면서 상층을 교양하고 포섭하는 사업도 동시에 밀고나갔습니다. 당시 천도교 함경남도 도정은 박인진이였는데 그가 북청, 풍산, 갑산, 삼수를 비롯한 도안의 여러 지방 천도교인들을 관할하고있었습니다. 우리는 박인진과의 사업을 잘하여 그를 조국광복회 조직성원으로 받아들이였으며 그의 영향밑에 있던 많은 천도교인들을 반일력량으로 묶어세웠습니다. 함경남도뿐아니라 평안북도의 벽동, 창성, 의주지방에도 천도교인들이 많았는데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손잡고 반일투쟁에 떨쳐나서도록 하였습니다. 사실 일제의 식민지통치시기에 천도교인들가운데서 최린의 파를 내놓고는 거의 모든 천도교인들이 우리와 손을 잡았습니다. 최린은 일본의 승인을 받아 자치를 하는 방법으로 조선의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일본의 승인밑에 자치를 한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았습니다. 박인진을 비롯한 량심적인 천도교인들은 최린의 《독립설》이 허황한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반대하였으며 우리의 무장투쟁을 적극 지지하였습니다. 박인진의 부인이 아직 살아있는데 올해 그의 나이가 93살인가 됩니다. 내가 전번에 항일혁명렬사유가족들을 만나주었는데 그때 박인진의 부인도 참가하였습니다. 그는 나이에 비하여 정정해보였습니다. 항일무장투쟁시기 우리가 각계각층 인민들과의 통일전선사업을 잘하였기때문에 광범한 군중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을수 있었습니다. 인민들은 적들의 탄압과 감시속에서도 우리 유격대에 식량과 피복을 비롯한 많은 물자를 보내주었습니다. 당시의 형편에서 유격대를 돕는다는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였습니다. 일제는 두만강연안일대를 비롯하여 항일유격대가 많이 활동하는 지대에 집단부락을 만들어놓고 인민들이 항일유격대를 원호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습니다. 일제놈들은 농민들이 한해농사를 지으면 수확량을 보고하게 하고는 칼을 차고 밭으로 다니면서 확인까지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농민들은 일제의 눈을 속여가면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항일유격대에 식량을 보내주었습니다. 농민들은 가을에 감자밭에서 감자를 캔것처럼 감자넝쿨을 걷어내고 그 밭을 항일유격대에 알려주어 감자를 캐가게 하였으며 강냉이도 따서 이삭채로 산속에 만들어놓은 창자에 보관해두고는 그것을 항일유격대가 가져가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는 농민들이 캐가라고 한 밭에서 감자를 다 캐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냥 두었다가 다음해 봄에 언감자를 캐다 먹군 하였습니다. 우리가 민족통일전선의 기치밑에 모든 반일애국력량을 튼튼히 묶어세우고 광범한 대중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으며 일제와 싸웠기때문에 조국광복을 실현할수 있었습니다. 나는 해방후에도 민족적단합을 이룩하는데 계속 큰 힘을 넣었습니다. 나는 해방후 개선연설에서 우리 조국이 나아가야 할 앞길을 밝히면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전체 인민이 하나로 굳게 단결하여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할것을 호소하였으며 각계각층 인민들의 단합된 힘에 의거하여 민주주의 새 조국건설을 힘있게 다그쳐나갔습니다. 이와 함께 나라와 민족의 분렬을 막고 조국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남조선의 각계층 인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해방후에 남조선에서 려운형,
허헌을 비롯하여 많은 인사들이 우리를 찾아왔댔습니다. 려운형은 조국통일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다가 적들에게 암살당하였습니다. 해방직후
남조선에서 나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온 사람도 그였습니다. 그가 평양에 여러번 왔댔는데 한번은 나에게 자기가 이제 남조선에 나가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는 1948년 4월에 평양에서 열렸는데 이 회의는 해방후 처음으로 북과 남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구국대책을 토의한 전민족적인 회합이였습니다. 우리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하여 남북련석회의에 남조선에서 많은 대표들이 참가하였습니다. 이 회의에 남조선에서 리승만의 직계정당을 내놓고는 거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대표들이 참가하였는데 김구와 김규식도 참가하였습니다. 당신들이 이번에 통일전선탑이 있는 쑥섬혁명사적지에 가보았으면 알겠지만 나는 남북련석회의가 끝난 다음 김구를 비롯하여 남조선에서 온 인사들을 데리고 쑥섬에 가서 앞으로의 활동방향에 대하여 토론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남조선에 나가서 민족의 단합을 이룩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할데 대한 문제와 리승만의 단독선거를 저지파탄시킬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련석회의에서 토의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다시금 강조하였습니다. 리승만은 온 민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제의 부추김밑에 끝내 단독선거를 강제로 실시하였습니다. 리승만이 비록 외세를 등에 업고 《대통령》자리에 올라앉았으나 인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1956년에 있은 《대통령선거》때 리승만과 함께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도 《대통령》립후보로 출마하였는데 조봉암은 리승만이 얻은 투표수보다 약간 적은 수의 찬성투표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조봉암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리승만이 사기와 협잡의 방법으로 선거표를 무데기로 걷어들이다보니 약간한 차이로 우세하게 되였습니다. 그때 《대통령선거》가 공정하게 진행되였더라면 아마 조봉암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였을것입니다. 남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조봉암을 지지한것을 보면 진보당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던것 같습니다. 조봉암은 원래 박헌영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후에 그와 틀려 리승만의 괴뢰정부에 들어가 농림부 장관까지 하였습니다. 조봉암이 진보적인 활동을 벌리자 리승만은 그가 북과 련계를 가지고있다는 터무니없는 구실을 만들어가지고 체포하여 사형하였습니다. 리승만은 북을 동경하거나 북과 련계가 있다고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체포하여 처형하였습니다. 우리가 1948년까지는 조국통일을 위한 민족통일전선사업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후에는 이 사업에서 별로 전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민족의 대단결을 실현하기 위하여 할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나는 민족대단결을 위하여 글도 많이 써내고 연설도 많이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해외에서 민족의 단합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 민족의 완전한 단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나라의 분렬이 지속되고있는것은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의 분렬주의적책동, 파쑈적폭압책동과 관련되여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주, 민주, 조국통일을 주장하지만 남조선괴뢰들은 예속과 파쑈, 분렬의 길로 나가고있습니다. 북과 남사이의 대립과 투쟁은 결국 애국자와 매국자, 민주력량과 파쑈세력, 통일력량과 분렬주의세력사이의 대립과 투쟁입니다. 남조선당국자들은 남조선을 미국의 지배하에 완전히 내맡기고있습니다. 미국과 남조선당국자들이 남조선을 《독립국가》라고 떠들고있지만 아무런 국권과 자주권도 없이 미국의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는 남조선을 어떻게 독립국가라고 말할수 있겠습니까. 남조선인민들도 남조선은 미국의 완전한 식민지이며 《대통령》은 꼭두각시라고 말하고있습니다. 남조선이 미국의 지배밑에 있는 한 앞으로 다른 사람이 《대통령》자리에 올라앉는다 해도 그 역시 미국의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노릇을 하지 않을수 없을것입니다. 남조선당국자들이 아무런 주견도 없이 미국의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는것을 보면 참으로 가련하기 그지없습니다. 남조선당국자들은 사회의 민주화를 반대하고있으며 파쑈적인 폭압으로 《정권》을 유지하려 하고있습니다. 남조선에는 아직도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파쑈적인 악법들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남조선당국자들은 애국적인민들과 청년학생들을 《국가보안법》에 걸어 탄압하고있습니다. 남조선당국자들은 나라의 통일을 반대하고 미국의 《두개 조선》조작책동에 적극 추종하고있습니다. 지금 남조선당국자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우리 나라를 영원히 둘로 갈라놓으려는것이 명백합니다. 남조선당국자들은 나라가 분렬되여있어야 미국의 지지를 받아 민주운동을 파쑈적으로 탄압하고 권력의 자리를 유지할수 있다고 생각하고있습니다. 남조선당국자들은 북과 남, 해외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 통일대화를 하는것도 한사코 방해하고있습니다. 이번 범민족대회에 남측대표들이 참가하지 못한것도 남조선당국자들의 파쑈적탄압책동과 관련되여있습니다. 남조선당국자들은 수만명의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이번 범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북으로 오려는 남측대표들을 총칼로 탄압하였습니다. 지금 남조선당국자들은 우리가 북남련석회의나 정치협상회의 같은것을 하자고 제기하여도 아무런 긍정적인 대답도 하지 않고있습니다. 최근에 남조선당국자가 우리와의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회담자체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를 만나겠으면 새로운 통일방안을 가지고 오라, 우리는 이미 련방제통일방안을 내놓았는데 그보다 더 좋은 방안이 있으면 내놓으라, 만일 새로운 통일방안을 마련한것이 없으면 우리의 련방제통일방안을 찬성하여도 된다, 북과 남이 최고위급회담을 한다면 그 어떤 통일방안을 가지고 론의해야지 그저 마주앉아 차나 마시고 국수나 한그릇씩 먹고 헤여져서는 의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남조선당국자는 아무런 통일방안도 내놓지 못하고있으며 우리가 내놓은 련방제통일방안을 찬성하지도 않고있습니다. 남조선당국자가 다른 나라들에 자주 돌아다니면서 《정상회담》을 한다고 하는데 아마 나라와 민족을 위한 회담을 하는것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회담이나 할것입니다. 남조선당국자들이 우리의 련방제통일방안을 찬성하지 않고있는것은 미국사람들이 승인하지 않기때문인것 같습니다. 미국은 우리 나라가 통일되는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미국은 어떻게 하나 남조선괴뢰들을 부추겨 우리 나라를 둘로 갈라놓고 우리의 사회주의제도를 허물어버리려 하고있습니다. 적들이 우리를 《흡수통일》하려고 하다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것을 알고 이제는 고립, 질식시키는 방법에 매달리고있습니다. 남조선당국자들이 들고나온 《북방정책》이라는것도 《두개 조선》을 조작하고 우리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자는것이며 미국이 우리에게 있지도 않는 《핵문제》를 가지고 요란스럽게 떠들어대고있는것도 결국은 우리 공화국을 압살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얼마전에 미국은 핵사찰문제를 가지고 우리를 걸고들다가 우리가 남조선에 있는 미국의 핵기지도 사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받은것만큼 공정성의 원칙에서 이제는 남조선에 있는 미국의 핵기지를 사찰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미국은 요즘 또 남조선당국자들과 함께 《동수사찰》문제를 들고나오고있습니다. 이것은 언어도단입니다. 미국이 《두개 조선》을 조작하고 우리의 사회주의제도를 없애려고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망상입니다. 우리 민족은 오랜 력사와 문화를 가진 단일민족이며 그 누구도 우리 민족을 영원히 둘로 갈라놓지 못할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회주의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이전 쏘련이나 동구라파나라들의 사회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의 사회주의는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입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이 우리를 압살하려고 아무리 책동하여도 우리의 사회주의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근 50년동안 제국주의의 압력과 봉쇄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미제가 경제제재요 뭐요 하면서 아무리 위협공갈해도 우리 인민은 놀라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이전 쏘련과 동구라파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되였다고 하여 우리가 살아나가지 못할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먹을것도 있고 입을것도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제도가 있습니다. 우리 인민은 남보다 특별히 호화롭게 살지는 못하지만 먹고 입고 쓰고살 걱정, 병치료받을 걱정, 아들딸들을 공부시킬 걱정을 모르고 행복하게 살고있습니다. 지금 우리 당은 흰쌀밥에 고기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서 살려는 우리 인민의 세기적숙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하고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인민들에게 고기를 넉넉히 먹이지 못하고있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고기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우리가 당의 농업제일주의방침을 철저히 관철하여 알곡생산을 늘이면 고기문제를 해결할수 있으며 경공업혁명을 다그치면 상품문제도 원만히 해결할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민들은 지금보다 더 잘살게 되고 우리 식 사회주의의 우월성은 더욱 높이 발양되게 될것입니다. 지금 세계의 많은 나라 사람들이 조선식사회주의가 제일 좋다고 하면서 우리 나라를 찾아오고있습니다. 지난 4월에도 나의 생일 80돐을 맞으며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수많은 대표단과 대표들, 진보적인사들이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 나라의 현실을 직접 보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면 조선식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공산당, 로동당들을 비롯한 여러 나라 당들이 평양에서 사회주의위업을 옹호고수하고 전진시킬데 대한 선언을 채택하고 거기에 서명하였습니다. 평양선언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세계 혁명적당들과 진보적인민들의 공동의 투쟁강령으로서 그 생활력과 정당성이 날을 따라 더욱 뚜렷이 실증되고있습니다. 평양선언을 채택하여 발표한지 몇달밖에 안되였지만 선언을 지지찬동하여 서명한 당은 벌써 131개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사회주의가 인민들의 마음속에 의연히 살아있다는것을 말하여주는것입니다. 사회주의는 일시적으로 곡절을 겪고있지만 반드시 재생되여 전진하게 될것입니다. 북과 남, 해외의 모든 조선동포들이 굳게 단결하기만 하면 안팎의 분렬주의자들의 방해책동을 짓부시고 조국의 통일을 이룩할수 있습니다. 지금 남조선에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조선에서 나라와 민족의 분렬을 추구하는 세력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몇해전에 남조선의 민주인사 문익환목사가 평양을 방문한 일이 있는데 그때 나는 그에게 남조선에 자주, 민주, 조국통일을 바라는 사람이 더 많은가 아니면 예속과 파쑈, 분렬을 추구하는 사람이 더 많은가고 물었더니 그는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분렬을 바라는 사람들은 얼마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남조선에서 예속과 파쑈, 분렬을 추구하는 세력은 소수 집권층과 일부 군부계층 그리고 일부 매판자본가들뿐입니다. 남조선에서는 이 극소수 분렬주의세력이 권력을 쥐고 총칼로 자주, 민주,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진보적인 세력들을 탄압하고있습니다. 남조선에서 자주, 민주,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세력과 예속, 파쑈, 분렬을 추구하는 세력사이의 모순은 날을 따라 더욱 격화되고있으며 이 두 세력사이에 치렬한 투쟁이 벌어지고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누가 조국통일을 원하고 누가 민족분렬을 추구하는가 하는것을 명백히 갈라놓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낟알을 채로 쳐서 골라내듯이 남조선에서 통일력량과 분렬세력을 갈라놓고 통일력량을 더욱 확대해나가야 합니다. 온 민족의 단합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북과 남, 해외동포들사이에 대화를 적극 발전시켜야 하며 전민족적인 회의 같은것을 자주 조직하여야 합니다. 앞으로 전민족적인 회의를 북남련석회의형식으로 해도 좋고 각계각층 련합회의나 정치협상회의형식으로 해도 좋습니다. 남북련석회의를 한지도 이제는 40년이 지난것만큼 련석회의를 다시 조직하면 민족적단합을 이룩하는데서 중요한 계기로 될것입니다. 앞으로 범민족대회도 계속 조직하여야 합니다. 범민족대회가 온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기 위한 대회로 되자면 대회에 북과 해외대표들뿐아니라 남측대표들도 참가하여야 합니다. 물론 북과 해외대표들만 참가한 범민족대회도 민족적단합을 이룩하는데서 일정한 역할을 하지만 그러나 남측대표들이 참가하지 않으면 범민족대회가 온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는데 크게 이바지할수 없습니다. 이번 범민족대회에서 남측대표들이 보내온 문건을 첨부하여 공동결의문을 채택하였는데 문건상으로 합의한 공동결의문이나 발표해서는 별로 의의가 없습니다. 범민족대회에 남측대표들이 참가하지 않고 그들이 보내온 문건을 첨부하여 공동결의문을 채택하면 범민족대회가 대외적인 시위로는 될수 있어도 남조선인민들에게 주는 영향은 크지 못할것입니다. 범민족대회에 남측대표들이 참가하지 않으면 결국 그 의의와 영향력이 그만큼 약화되게 됩니다. 북과 해외대표들뿐아니라 남측대표들까지 참가하는 범민족대회를 하여야 그 대회가 명실공히 범민족대회로 될것입니다. 그런것만큼 범민족대회는 반드시 북과 남, 해외의 대표들이 다 참가하는 원칙에서 조직하여야 합니다. 남측대표들까지 참가하는 범민족대회를 북에서 하기 곤난하면 일본 같은 다른 나라에서 할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범민족대회에 남측대표들을 처음부터 많이 참가시키지 않아도 일없습니다. 범민족대회에 남측대표들을 처음에는 한 20명이나 50명정도 참가시키고 점차 그 수를 늘이는것이 좋습니다. 내 생각에는 범민족대회를 다른 나라에서 열고 남측대표들을 적게 참가시키다가 대회장소를 평양이나 서울로 옮기고 남측대표들의 참가수를 늘이는것이 제일 좋을것 같습니다. 북과 남, 해외의 모든 조선동포들은 소속과 당파를 가리지 말고 사상과 정견, 신앙의 차이를 초월하여 하나로 굳게 뭉쳐야 합니다. 나는 해외동포 여러분들이 민족대단결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 조국통일의 성스러운 위업을 실현하는데 적극 이바지하리라고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민족대단결을 이룩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할것을 결의하였는데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조국에 자주 오는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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