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8월 4일 로동신문

 

일본이 저지른 극악한 랍치범죄

직업알선의 명목밑에 감행한 죄악

 

일제는 조선녀성들을 유괴하여 성노예로 끌어가는 비렬한 방법에도 적극 매달렸다.

일본군성노예로 끌려갔던 김종심녀성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나는 집이 가난하였던탓으로 이곳저곳으로 팔리워 다니면서 지주집 종살이를 하다가 해주에 이르렀다.1941년이 다 가던 어느날 해주거리에 낯선 사나이들이 나타나서 인부모집을 한다고 하였다.그들은 좋은 일자리에 넣어준다고 하면서 처녀애들만 꼬였다.종살이로 지칠대로 지쳤던 나는 그만 놈들의 속임수에 넘어갔다.이렇게 속히워 나는 남방의 최전선에까지 끌려다니면서 성노예생활을 강요당하게 되였다.》

리춘화녀성도 《1940년 7월 어느날 나까하라라고 하는 일본놈이 내가 머슴살이를 하던 지주집에 나타났다.그놈은 지주놈과 꿍꿍이를 하더니 나에게 돈벌이가 좋은 곳으로 보내준다고 하면서 사리원역에 꾀여갔다.역에 가서야 나는 그놈에게 속히웠다는것을 알게 되였다.한마을에 살던 김영자라는 전라도태생의 녀자가 놈들의 매질에 피투성이가 되여 렬차에 실리는것이였다.그는 남편이 일나간 사이에 강제로 끌려왔던것이다.이런 녀자들이 여러명이나 되였다.》고 증언하였다.

그들의 증언은 일제가 의지가지할데 없거나 살림이 어려운 녀성들을 더없이 좋은 성노예사냥대상으로 정하고 《취직보장》, 《돈벌이》 등 갖은 감언리설을 늘어놓으며 유괴한 다음 강제로 끌어갔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성노예피해자들이 랍치되게 된 경위를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일본군성노예피해자였던 장수월녀성은 《내가 17살 나던 해인 1941년 9월 어느날 일본인감독이 찾아와 한달 벌면 석달을 먹을수 있는 좋은 일자리가 있는데 자기와 함께 가자고 하였다.집식구들이 겪고있는 곤난한 생활에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것인가를 늘 생각해오던 나는 서슴없이 그 사람을 따라나섰다.이미 평양역에는 나와 같은 처지의 어린 처녀들이 7명이나 와있었다.그런데 기차를 타고보니 앞뒤에 일본경찰의 감시가 붙어있었으며 심지어 변소에 갈 때에도 그들이 따라다녔다.속히웠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 도망칠 생각을 해보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고 말하며 그때의 상황을 방불히 설명하였다.

장수월녀성뿐이 아니다.리현숙녀성도 벌이가 좋은 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는 말에 속아 중국 상해에 있는 일본군《위안소》로 끌려갔다고 증언하였으며 다른 한 녀성은 일본놈의 꾀임에 넘어간 두 동무가 돈벌이하러 공장에 들어가자는 말을 듣고 그들과 함께 동행한것이 결국은 무서운 치욕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게 되였다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였다.적지 않은 성노예피해생존자들이 자기들은 일본놈들의 꾀임에 속아 성노예로 끌려갔다는것을 만천하에 고발하였다.

김영실녀성의 증언은 더욱 격분을 자아내는것이였다.

가난한 농사군의 맏딸로 태여나 어린 시절에 빚값에 팔려 아이보개로, 술집심부름군으로 살아가던 그는 고모를 찾아 회령에 가게 되였다.그가 18살 되는 어느해 가을 신사복차림을 한자가 나타나 그를 보더니 좋은 일자리가 있는데 함께 가자고 꼬드겼다.그자의 말에 속아서 우리 나라 북부 두만강지역의 외진 곳에 있는 단층집에 끌려가니 이미 여러명의 조선처녀들이 와있었다.후에야 김영실녀성은 그곳이 일본군《위안소》라는것을 알게 되였다.보다 놀랍고 끔찍한것은 그를 데리고온 양복쟁이가 군복을 바꿔입고 나타나서는 짐승처럼 달려들어 그의 정조를 유린한것이였다.《점잖은 사람》의 탈을 벗어버리고 승냥이의 본색을 드러낸것이였다.

사실자료들은 일제가 조선녀성들을 상대로 감행한 랍치범죄의 교활성을 적라라하게 폭로하고있다.

본사기자 안철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