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8월 5일 로동신문

 

일본이 저지른 극악한 랍치범죄

강권을 발동하여 감행한 반인륜적죄악

 

조선녀성들을 직업알선 등의 각종 명목으로 꾀여내여 일본군성노예로 충당하던 일제는 수요가 급증하게 되자 가장 파렴치한 랍치범죄를 공공연히 감행하였다.애기어머니들은 물론 12~13살 되는 미성년들도 일제의 횡포한 마수에 걸려 성노예살이를 강요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본군성노예로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생존자들은 일제가 자기들을 어떻게 날강도적으로 끌어갔는가를 낱낱이 고발하였다.

한 녀성은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두번째 아이가 배속에 있을 때였다.남편은 징병에 끌려간 직후여서 집에 없었다.그날 나와 시어머니는 강냉이밭에 있었다.한낮이 지났을 때 여러명의 일본인이 밭으로 왔다.…

시어머니가 놋그릇을 다 바칠테니 하다못해 애기가 태여날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달라고 일본인들에게 빌었다.일본순사는 그런 거짓말은 누구도 믿지 않는다면서 임신했다는 소리는 거짓말이라고 코웃음을 쳤다.

밭에 있던 할머니와 시어머니가 몇차례 나를 앗아냈다.그러자 놈들은 내 머리칼을 마구 쥐고 강냉이밭으로 질질 끌고갔다.두살짜리 딸애가 울면서 내뒤를 쫓아오다가 넘어졌다.…》

량청자라는 가명으로 증언석에 나섰던 한 일본군성노예생존자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16살 나던 해에 어머니가 마을처녀들을 사냥하러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와서 너도 위험하니 산골에 있는 삼촌어머니집에 가서 숨어있으라고 했다.그때 관헌이 달려들어 딸을 내놓으라고 어머니를 구두발로 차고 위협했지만 어머니는 완강히 뻗쳤다.

닷새후 나는 삼촌어머니집에 가 숨으려고 점심밥을 먹고 집을 나섰다.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얼굴을 가리우고 산길을 혼자서 걸어갔다.1시간쯤 걸었을 때 갑자기 일본군이 나타났다.주먹에 얼굴을 얻어맞아 코피가 터져 얼떨떨해진 나를 자동차에 올려실었다.자동차에는 나처럼 붙잡혀온 처녀가 40명가량 있었다.

모두 18살도 안되는 나이여서 서로 손을 부여잡고 〈우린 이젠 죽었구나.〉 하면서 울어댔다.다른 자동차에도 20명가량의 처녀들이 실려있었다.…》

수난을 당한 녀성들이 어찌 이들뿐이겠는가.

한 녀성은 아버지의 병구완을 하던중 갑자기 달려든 일본순사들에 의해 끌려갔고 다른 한 녀성은 밥을 먹다가 일본헌병과 순사에게 잡혀갔다.

심미자라는 녀성은 일본지도에 벗꽃을 수놓으라는 일본교원의 말을 듣지 않고 나팔꽃을 수놓았다는 리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일본순사에게 몸을 더럽히고 전기고문 등 모진 고문을 당한 다음 성노예로 끌려갔다.

세계는 일제가 감행한것과 같은 야만적인 랍치행위를 그 어디에서도 본적이 없다.조선녀성들에 대한 일제의 강제련행, 랍치만행은 중세암흑기의 노예사냥보다 더한것이였다.

두 딸자식을 자기 눈앞에서 성노예로 빼앗아가려는 일본군의 만행을 체험한 조순희녀성의 증언은 또 얼마나 사람들을 몸서리치게 하고있는가.

1943년 2월 14일 아침 일본군병사 4명이 군화를 신은채로 조순희녀성의 집안에 뛰여들었다.그는 딸들을 강제련행해가려는 놈들에게 딸들대신 자기를 데려가달라고 애원하였다.그러나 놈들은 처녀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두 딸을 끌어가려 하였다.

조순희녀성은 다시한번 놈들에게 제발 열흘후에 결혼하게 되여있는 큰딸만이라도 봐달라고 사정하였다.

그러자 놈들은 갑자기 큰딸에게 짐승처럼 달려들어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하였다.

조순희녀성은 번개같이 부엌으로 달려나가 식칼을 집어들고 들어왔다.바로 그때 돼지처럼 살이 피둥피둥 찐 가무잡잡한 놈이 일본도를 빼들고 작은딸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죽이지 말아라! 집이고 돈이고 밭이고 다 줄테니 딸을 죽이지 말아달라!》

조순희녀성은 이렇게 웨치며 놈의 앞을 막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피가 랑자하게 흐르는 가운데 딸애는 죽어갔다.…

일제가 아니였다면 조순희녀성의 큰딸이 미치지도 않았을것이고 작은딸이 죽지도 않았을것이다.

조순희녀성은 이렇게 절규하였다.

《이 세상에는 적지 않은 악당들이 있다.그러나 일본인들은 악당들보다 더 지독하다.악당도 인간이다.허나 일본인들은 인간이 아니다.야수같은 눈을 한 일본병사의 낯판대기, 놈들이 번갈아 딸자식을 릉욕하는 광경, 그것을 눈앞에서 뻔히 보면서도 딸자식을 구원할수 없는 비극, 의식속에 집요하게 뿌리내린 그 치욕의 과거를 아무리 지워버리려 해도 지워버릴수 없어 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한두번만 하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살아온것은 일본에 천벌이 내리는것을 보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이 분노의 웨침을 새겨들어야 한다.

우리 인민은 일제가 조선민족에게 끼친 피비린 죄악을 절대로 잊지 않을것이다.

본사기자 안철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