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 《나의 조국》과 함께 영생하는 값높은 삶
김일성상계관인이며 조국통일상수상자인 작가 김상오선생이 받아안은 고귀한 은정
우리 공화국의 70년은 해방조국의 빈터에서 세계적인 강국으로 솟구쳐오른 거창한 비약과 변혁으로 빛나며 인민의 운명을 지켜주고 꽃피워주신 절세의 위인들의 열화같은 사랑의 력사로 만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창공높이 휘날리는 람홍색공화국기를 바라볼수록 위대한 조국에 대한 생각으로 더욱 가슴뿌듯해지는 오늘 우리 인민 누구에게나 뜨겁게 새겨지는 한편의 서정시가 있다. 《나의 조국》! 조용히 불러만 봐도 북받치는 긍지와 행복감에 눈굽젖어들게 하는 사랑하는 조국을 노래한 서정시가 태여난 때로부터 근 40년이 된다.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뿌리는 김일성민족, 김정일조선의 위상과 더불어 시는 널리 애송되고있으며 국보적인 명시를 창작한 작가에 대한 사람들의 추억도 뜨거워지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주체문학이 낳은 명작들을 더듬으시는 여러 기회에 서정시 《나의 조국》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시는 〈나의 조국〉과 같이 지어야 합니다.시 〈나의 조국〉은 소박하고 진실한 생활적인 언어로 조국에 대한 우리 인민의 시적감정을 깊이있게 노래하였습니다.》 한편의 서정시와 더불어 당과 인민의 추억속에 살아있는 김상오선생, 자기의 온넋을 바쳐 노래한 조국의 품속에서 영생하는 한 작가의 이야기는 조국이란 무엇이며 우리 세대가 목숨보다 귀중한 사회주의조국을 어떻게 지키고 빛내여야 하는가를 다시금 새겨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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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오선생은 자기의 수기 《청춘의 심장을 안겨준 사랑》에 이런 글줄을 남기였다. 《하나의 서정시는 그것이 비록 부피는 작아도 한 시인의 일생의 총화로써만 나올수 있다는것을 나는 서정시 〈나의 조국〉을 통하여 체험하게 되였다.》 무릇 시는 체험과 열정의 산물이라고 하였다. 격정의 대하로 굽이치기도 하고 감사의 눈물로 젖어들기도 한 김상오선생의 사연많은 인생행로의 총화인 서정시 《나의 조국》, 그것은 그대로 식민지노예로부터 가장 긍지높고 존엄높은 주체조선의 인민으로 된 우리 인민모두의 극적인 체험의 응결체이기도 하였다. 해방된 강산에 새 생활이 약동하던 주체35(1946)년 1월 11일이였다. 김상오선생은 천만뜻밖의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해주시를 현지지도하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 당시 황해도당위원회기관지 《자유황해》의 주필사업을 맡아보고있던 그를 몸소 부르신것이였다.김상오선생은 세찬 흥분으로 하여 어떻게 위대한 수령님앞에까지 달려와 서게 되였는지 몰랐다. 수수한 나무의자에 앉으시여 신문을 보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 주필동무가 왔구만.주필동무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라고 하시며 몸소 자리에서 일어서시여 그를 반갑게 맞아주시였다. 삼도왜적을 쥐락펴락하시던 항일의 전설적영웅을 이처럼 몸가까이 뵙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김상오선생은 북받치는 감격에 한동안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해빛같은 미소, 영채로이 빛나는 안광, 우렁우렁한 음성, 한없이 소탈하고 인자하신 성품… 온 민족이 숭상하여마지 않는 절세의 애국자, 민족의 령수를 우러르며 김상오선생은 장군님을 이렇게 뵙게 되니 꿈만 같다고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말씀올리였다. 그러는 그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럼 앉아서 이야기나 하자고 하시면서 자신의 곁으로 이끄시였다.그러시고는 손에 들고계시던 신문을 내보이시며 이 사설을 주필동무가 썼는가고 물으시였다. 김상오선생은 깜짝 놀랐다.그 신문은 《자유황해》였는데 거기에 실린 사설은 그가 해방직후 나라의 정치정세와 당의 로선에 대하여 쓴 글을 세번에 걸쳐 련재한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환한 웃음을 지으시고 《사설을 아주 잘 분석하여 썼습니다.… 상은 내가 못 보고 중, 하만 읽어보았는데 정치적으로 옳게 분석판단하고 방향도 옳게 설정하여 잘 썼습니다.》라고 과분한 평가를 주시였다.그이의 안광에는 새 조국건설에서 한몫 단단히 할수 있는 또 한사람의 재능있는 문필가를 찾아내신 기쁨이 물결치고있었다. 그날 우리 수령님께서는 오랜 시간 김상오선생에게 조성된 정세를 알기 쉽게 해설해주시고 해주지구의 복잡한 정세에 대처하여 신문발행사업을 개선하기 위한 방향과 방도들도 일일이 가르쳐주시였다.그러시고는 기자, 편집원들이 학습을 많이 하도록 자신께서 보시던 도서들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시며 각별한 정도 부어주시였다. 다음날이였다.전날의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김상오선생은 또다시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이른아침 위대한 수령님께서 자신의 승용차를 보내시여 그를 데려오도록 하신것이였다. 한달음에 당도한 김상오선생을 반갑게 맞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필동무가 수고해주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아침일찍 불렀다고 하시면서 중요한 문건을 시급히 만들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 《제 비록 능력은 없지만 장군님께서 주시는 과업이라면 무엇이든지 힘껏 해보겠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씩씩하게 대답올리는 김상오선생에게 주필동무가 쓴 글을 보았는데 능히 할수 있다고 하시면서 문건의 내용과 서술체계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아, 얼마나 영명하신 우리의 장군이신가!) 김상오선생은 달아오른 심장을 안고 짧은 시간동안에 문건초안을 완성하였다. 글을 읽어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단히 빨리 썼다고, 잘되였다고, 수고했다고 높이 치하해주시면서 친히 가필도 해주시였다. 그날 저녁 도에서 마련한 연회에 참석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신문사동무들이 오늘 수고가 많았다고, 귀중한 동무들이라고 하시면서 김상오선생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죽어도 잊지 못할 그 시각 김상오선생의 심장은 절세의 위인을 한생토록 따르고 받들리라는 불같은 맹세로 세차게 고동쳤다. 장구한 혁명의 길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금싸래기처럼 찾아 키워주고 내세워주신 사람들이 그 얼마인가. 홍안의 김상오선생도 우리 수령님의 그 손길에 이끌려 몇달후에는 중앙고급지도간부학교(지금의 인민경제대학)의 제1기생으로 추천되였고 졸업후에는 정부기관지 《민주조선》의 부주필로 사업하게 되였다.김상오선생의 남다른 창작적재능과 전도를 두고 늘 마음써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소망을 헤아리시여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작가대렬에도 세워주시였다. 우리 수령님들께서는 한번 믿음을 준 전사는 설사 저 하늘끝에 가있다 해도 잊지 못하시며 끝까지 운명을 책임지고 꽃피워주신 삶의 태양이시였다. 김상오선생에게 베풀어진 절세의 위인들의 대해같은 믿음과 은정은 성스러운 우리 혁명사의 한 갈피를 뜨겁게 적시고있다. 주체66(1977)년 2월 어느날이였다.김상오선생은 당중앙위원회에서 급히 찾는다는 기별을 받고 평양으로 향하게 되였다. 그가 억울한 루명을 쓰고 외진 산골에 내려가 농사일에 파묻힌지도 어느덧 10여년, 이제는 친척친우들의 문안편지도 뜸해지고 가족들조차 모든것을 단념하였던 때에 가슴치는 소식에 접하였으니 김상오선생의 심정이 과연 어떠하였으랴. 당중앙위원회의 어느 한 방에 들어선 김상오선생에게 일군이 한 말은 참으로 충격적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동무를 거듭 찾으시였습니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무가 반당종파분자들의 모해에 걸려 그사이 정치적생명까지 잃고 시련을 겪은것을 아시고 못내 가슴아파하시였습니다.》 감격이 극하면 말문이 막히는 법이다.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여서 그는 미처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였다.《입당년월일 1945년…》이라고 새겨진 자기의 당원증을 받아들고서야 어깨를 세차게 떨며 오열을 터뜨렸다. 정녕 어찌 알았으랴.위대한 수령님들께서 그를 잊지 못해하시며 그의 운명을 두고 그리도 마음쓰고계신줄을. 한번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일제시기 김상오선생과 함께 투쟁한 반일애국렬사의 가족을 만나주신적이 있었다.그 자리에서 해방직후 해주에 나가시였을 때를 회고하시던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김상오선생에 대하여 알아볼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 해주시를 현지지도하시면서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유황해》 신문주필을 하던 동무가 우리 당의 립장을 옳게 인식하고 좋은 글도 썼으며 자신의 사업을 방조하여주었다고 하시면서 열정에 넘쳐있던 재능있는 문필가를 감회깊이 추억하시였다. 김상오선생은 또 한분의 천출위인이신 위대한 장군님의 각별한 관심과 보살피심을 받아안는 남다른 영광도 지닌 행운아였다. 언제인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불멸의 업적을 되새겨보시는 기회에 김상오선생이 가사를 쓴 노래 《황금나무 능금나무 산에 심었소》를 감상하게 되시였다. 장내에는 위대한 수령님과 당의 손길아래 사회주의락원으로 꽃펴나는 조국의 랑만적인 정서가 한껏 흘러넘치였다. 노래 1절이 끝났을 때였다.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흥분하신 어조로 노래가 얼마나 좋소, 이 노래는 수령님께서 북청을 현지지도하신 이후에 나온 노래입니다, 짧은 노래 한절에 북청현지지도생활력이 다 반영되여있습니다라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또 언제인가는 친히 이 노래를 부르시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고 절규하던 이 땅에 황금나무, 능금나무 설레이는 인민의 무릉도원을 펼쳐주신 수령님의 은덕을 진심으로 노래한 명곡이라는 높은 평가를 주신 우리 장군님이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아무리 들어도 싫지 않은 명곡이라는 과분한 치하를 주신 노래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도 우리 당정책을 노래하기 위해 심혼을 쏟은 김상오선생의 창작적열정의 산물이였다. 사연깊은 명곡들과 더불어 작가를 마음속에 새겨두고계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뜻대로 김상오선생을 빨리 찾도록 하시는 한편 그가 농촌으로 내려가게 된 경위를 구체적으로 료해하도록 하시였다.그러시고는 그를 정당원으로 복당시킬뿐아니라 당생활년한도 본래 입당한 날부터 그대로 이어주도록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선생이 평양에 올라왔을 때에는 그를 소원대로 작가대렬에 다시 세워주고 중요한 창작기관의 부사장으로 일하도록 하시였다. (내 운명의 하늘이신 어버이수령님,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김상오선생은 눈물을 쏟으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고 또 불렀다. 그것은 참된 삶의 품이란 어떤것인가를 운명의 체험으로 간직한 문필가의 심장의 웨침이였다. 하기에 그는 60나이가 지났어도 그렇듯 열렬한 격정을 터치며 위대한 조국을 격조높이 노래한것이였다. 후날 김상오선생은 자기의 수기에 이렇게 썼다. 《서정시 〈나의 조국〉이 지상에 나타났을 때 필자의 나이를 아는 사람들중에는 놀라와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러한 놀랄것도 감탄할것도 없다.그 시는 늙은 육체, 늙은 손이 쓴것이 아니라 젊고 뜨거운 심장이 쓴것이기때문이다.》 김상오선생이 조국에 대한 시를 쓸 결심을 한것은 정치적생명을 되찾고 새 직무에서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즈음 위대한 수령님들의 은정속에 경치좋은 대동강기슭의 새 집까지 받아안고 창작지도사업과 문필활동에 전심하게 되면서 선생은 지나온 나날들이 자꾸만 눈에 밟혀와 때없이 눈굽을 적시군 하였다. 그는 원래 어려서부터 문학은 물론 미술과 음악에도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있었다.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불우한 생활처지로 하여 《펜과 종이면 되는》 문학의 길을 택하였지만 그것은 식민지노예의 설음만을 더해주는것이였다. 정녕 무슨 일인들 겪지 않았으랴. 일제의 식민지교육을 반대하여 학우들과 함께 동맹휴학에 떨쳐나섰던 일이며 반일경향의 신문원고집필을 맡아나섰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곤욕을 치르던 일, 식민지청년의 애수를 쌀쌀한 삭풍에 담아 첫 시로 옮기던 일이며 일본으로, 중국 동북지방으로 정처없이 떠다니면서 비내리는 타향의 부두에서 두고온 고향산천을 그리며 눈물짓던 날들… 그 나날 나라잃은 설음이란 어떤것인가를 뼈아프게 체험하였기에 김상오선생은 해방된 새 조선을 누구보다 열렬히 사랑하고 격찬하였다. 해방직후 어느 한 기회에 김상오선생은 불후의 고전적명작 《사향가》를 난생처음 듣게 되였다.부드럽고 유순한 선률속에 아름다운 고향과 그리운 부모형제의 모습이 생생히 어려오는 노래에 접하는 순간 우리 나라에도 이런 훌륭한 노래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세차게 설레이는것이였다. 바로 그 명곡을 위대한 수령님께서 항일의 나날에 몸소 지어부르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을 때 그는 절세의 위인의 거룩한 애국의 세계앞에 삼가 머리를 숙이지 않을수 없었다. 그렇듯 진실하고 열렬한 조국애를 안으시였기에 우리 수령님께서 항일의 혈전만리, 눈보라만리를 헤치시며 기어이 조국을 찾아주시고 인민의 새 나라를 세워주신것 아니던가. 조국은 그이의 가슴속에 있었다. 조국은 그이께서 이 땅에 안고오신것이였다. 새 조국건설의 나날과 불비쏟아지던 전화의 종군길에서, 위대한 천리마시대를 노래하고 조국의 통일을 부르며 가슴벅차게 느꼈던 희열과 긍지가 인생의 극적변화를 가져온 꿈같은 현실과 하나로 합쳐지며 작가의 심장은 불을 안은듯 끓어번졌다. 그때의 심정에 대하여 언제인가 김상오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늘이 졌던 저의 마음속에 이처럼 크나큰 삶의 보람과 행복이 차넘치게 되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수령님께서 찾아주시고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이끌어가시는 내 조국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쩌릿해지면서 저절로 눈물이 솟구쳐올랐습니다.》 김상오선생의 창작적사색속에서는 새로운 시상이 나날이 무르익어갔다.가는 곳마다 들끓는 생활과 끊임없이 탄생하는 환희의 노래, 온갖 시름잊은 얼굴들이 로동의 기쁨안고 돌아오는 락원의 거리, 무수한 배움의 창문에 비쳐드는 해살과 보육원들이 지켜선 애기들의 고요한 숨결, 그 모든 아름답고 성스러운것이 조국의 모습이라면 그 조국은 바로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품인것이다! 마침내 작가의 심장은 조국에 대한 심원한 철리를 담은 불덩이같은 격정의 토로를 터치였다. … 그렇다, 조국은 수령님 찾아주신 우리의 삶 수령님 안겨주신 우리의 긍지 영원한 영원한 그이의 품 그 품이여라! 조국이여 나의 조국이여 서정시 《나의 조국》이 창작되였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신분은 위대한 장군님이시였다. 주체68(1979)년 3월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김상오선생의 시를 몸소 보아주시고 친필로 《잘 썼습니다.》라는 높은 평가를 주시였다.다음날에도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서정시 《나의 조국》을 잘 썼다고 하시면서 이 시를 다 읽어보는게 좋겠다고, 시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하시였다. 천재적인 예지로 창작가도 미처 알지 못한 작품의 가치를 찾아주시며 주체문학의 화원을 풍만하게 가꾸어주신분이 우리 장군님이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시에서는 조국을 노래하는데서 정치적표현을 많이 쓰면서 사상을 지내 로출시키던 지난 시기의 결함을 극복하고 시형상속에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수령님에 대한 뜨거운 흠모의 정이 구체적인 생활감정을 통하여 정서적으로 흘러넘치고있다고 하시면서 서정시 《나의 조국》은 인상에 오래 남도록 진실하고 깊이있게 잘 쓴 작품입니다, 이 시는 한번 읽고난 다음에도 다시 읽고싶은 좋은 시입니다라고 거듭 높이 평가하시였다. 그후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국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읊은 시가 많지만 서정시 《나의 조국》처럼 조국애를 우리 시대의 주도적인 감정에 기초하여 훌륭히 노래한 작품은 흔치 않다고 하시면서 작가와 작품을 영광의 절정에 올려세워주시였다. 서정시 《나의 조국》은 조국은 위대한 수령님의 품이라는 철학적알맹이를 형상의 꽃으로 피웠기에 시대의 명작으로, 인민의 문학재보로 빛을 뿌릴수 있었다. 하지만 김상오선생은 가렬한 전화의 나날에 벌써 위대한 장군님께서 불후의 고전적명작 《조국의 품》을 창작하시였다는것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후날 이 사실을 알게 되였을 때 김상오선생은 커다란 흥분에 넘쳐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모두들 나를 보고 조국을 노래한 최상의 작품을 써냈다고 하지만 조국은 수령의 품이라는 종자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20여년전에 내놓으신것입니다.우리 수령님, 지도자동지이시야말로 가장 열렬한 조국애의 체현자들이시고 우리 문필가들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 김상오선생이 《당에 드리는 노래》, 《참된 삶이 탄생하는 집》, 《황금산타령》을 비롯한 서정시, 시초, 가사들과 《푸른 하늘》, 《통일이 언제 됩니까?》와 같은 수많은 단편 및 장편소설, 문학평론들로 주체문학의 보물고를 풍부히 하는데 훌륭히 기여할수 있은것은 그가 조국에 대한 끝없는 긍지와 지칠줄 모르는 사랑을 지녔기때문이였다. 김상오선생은 그 불같은 사랑과 열정으로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손에서 붓을 놓지 않은 참된 문필가였다. 림종을 앞두고 그는 펜과 종이를 찾았다.온몸의 힘을 모아 그가 적어나간것은 《위대한 수령님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라는 열다섯글자였다. 평시에 말이 적으면서도 가슴속엔 언제나 정열의 불길이 활활 타번지던 로작가, 위대한 조국에 한줄기 빛이라도 더해주기 위해 그리도 세차게 높뛰던 그의 심장의 고동은 이런 충정의 글발로 굳어졌다. 당과 수령을 위해 붓을 추켜든 조선의 문필가들의 신념과 의리는 이처럼 뜨겁고 굳건한것이다. 김상오선생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주체82(1993)년 1월 어느날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해방후 해주에서 김상오선생을 만났던 일로부터 종파분자들의 모해로 농촌에 내려가 농사짓던 일 그리고 그가 다시 평양에 올라와 중요부문에서 일하도록 한데 대하여 감회깊이 회고하시였다.그러시면서 서정시 《나의 조국》이 우리 인민들속에서 널리 애송되고있는데 대하여 말씀하시며 그의 안해와 자식들에 대한 은정깊은 교시를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재사였다고 하시며 서정시 《나의 조국》을 일러주시였으며 조국통일주제의 문학작품들을 많이 창작한 김상오선생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시여 사망한지 몇해가 지난 그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하도록 하여주시였다. 살아서는 영광의 빛발을 안겨주고 죽어서는 영생의 삶을 주는 품이 위대한 수령님들의 품, 주체의 사회주의조국의 품이다. 태양이 영원하기에 조국의 품도 영원하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사랑과 믿음을 이으시여 김상오선생의 삶과 그가 남긴 공적을 더욱 빛내주고계신다. 지난해 7월 5일 애국렬사릉에서는 김일성상계관인이며 조국통일상수상자인 김상오선생의 생일 100돐에 즈음하여 뜻깊은 행사가 진행되였다.유가족들은 물론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모두가 세상을 떠난지 20여년이 흐른 때에도 조국을 위해 바쳐진 한 문필가의 생을 잊지 않고 내세워주는 어머니당에 대한 고마움으로 눈시울을 후덥게 적시였다. 김상오선생이 세기의 하늘높이 나래쳐오르는 세찬 퍼덕임, 찬란한 우리의 미래라고 격찬한 사랑하는 우리 조국은 오늘 서정시가 창작되던 그때에는 상상도 못하였던 아득한 높이에 올라 눈부신 빛을 뿌리고있다.인민의 모든 꿈 이루어질 세기의 상상봉을 향하여 더 기세차게 나래를 펴고있다. 그 찬란한 빛발아래 우리 세대가 살고 후손만대가 복락을 누리게 될것이니 끝없는 긍지와 행복을 주고 아름다운 미래를 펼쳐가는 이 땅의 하늘가에 서정시 《나의 조국》은 영원히 울려퍼질것이다. 조국은 곧 수령의 품이라는 고귀한 진리를 새겨주며!
본사기자 백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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