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8월 26일 로동신문
[정세론해설] 력사의 교훈으로부터 출발하여
얼마전 로씨야가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속에서 2018년 월드컵경기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름으로써 자국이 안정되여있다는것을 과시하였다.이번 월드컵경기대회를 계기로 로씨야에 대한 험담을 자주 들어오던 사람들의 인식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로씨야도 평화애호적립장을 견지하고있다.그러나 평화에 대한 환상을 가지는것을 경계하고있다. 로씨야국가회의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서방이 나토의 무력증강책동을 로씨야의 《위협》에 대한 억제로 묘사하고있는데 대해 규탄하면서 《우리는 한때 히틀러와도 불가침조약에 조인하였으나 그는 배신적으로 우리 나라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였다.》고 주장한바 있다. 1939년 8월 23일 쏘련이 파쑈도이췰란드와 10년을 기한으로 하는 불가침조약을 체결한것은 당시의 형편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였다고 볼수 있다. 당시 지구상에서 유일무이한 사회주의국가였던 쏘련은 제국주의렬강들의 포위환속에 놓여있었으며 서쪽과 동쪽방향에서 동시에 위협을 받았다.서쪽에서 전쟁준비에 광분하던 파쑈도이췰란드가 침략의 불구름을 일으키고 오스트리아를 순간에 집어삼켰다.영국, 프랑스는 파쑈도이췰란드의 침략예봉을 쏘련에로 돌리도록 하기 위하여 뮨헨협정에서 히틀러의 요구대로 체스꼬슬로벤스꼬의 어느 한 지방을 파쑈도이췰란드에 넘겨준다는데 대해 동의하였다.6개월도 안되여 파쑈도이췰란드는 뮨헨협정마저 란폭하게 짓밟고 체스꼬슬로벤스꼬를 강점하였다. 쏘련의 동쪽에서는 파쑈일본이 원동지역을 호시탐탐 노리고있었다.일본은 1931년 9.18사변후 쏘련이 제기해온 불가침조약체결제의를 거부하고 침략전쟁준비를 맹렬히 다그쳤다.하싼호사건과 할힌골사건이 발생한 후 일본의 있을수 있는 침공에 대한 쏘련의 우려는 더욱더 커졌다. 동서협격을 피하고 제국주의렬강들의 고립압살책동을 파탄시키며 시시각각 박두해오는 최강적들의 침략에 대처할 시간적여유를 얻기 위하여 쏘련은 외교활동을 벌려 파쑈도이췰란드와의 불가침조약체결을 성사시켰다.쏘도불가침조약체결은 미국과 유럽나라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당시 서방언론들은 《숙적들이 우호관계를 맺었다.》고 보도하였다.쏘련은 파쑈도이췰란드와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후 어느 정도 안심하였으며 여러해동안은 평화를 유지할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타산은 빗나갔다. 어느 한 나라 언론은 이렇게 보도하였다. 《1941년 6월 22일 도이췰란드는 도쏘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쏘련을 침공하였다.기습을 받은 쏘련은 첫 시기 심대한 타격을 받았는데 첫 1개월동안에 4 500대의 전투기를 잃었다.》 파쑈도이췰란드의 배신적인 행위를 통해 아무리 불가침조약으로 차단물을 만들어놓았다고 해도 지배주의세력이 존재하는 한 평화는 바람앞의 등불과 같다는것을 알수 있다. 력사의 흐름은 비반복적이라는 말이 있다.그러나 세계전쟁사는 전쟁이 일어났던 지역에서 보다 참혹한 전쟁이 또다시 일어날수 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유럽은 인류를 위협한 세계대전의 불길이 두번씩이나 타래쳐올랐던 지역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른 후 유럽나라들이 류행을 따르듯 불가침조약들을 저저마다 체결하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방지하는데서 그 모든것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였다.뽈스까, 단마르크는 파쑈도이췰란드와 불가침조약을 쏘련보다 먼저 맺었다.그러나 모두 침략의 희생물이 되고말았다. 20세기 중후반기 나토와 대항하였던 와르샤와조약기구는 랭전종식과 함께 해체되였으나 와르샤와조약기구에 속해있던 나라들 대부분이 나토의 품에 안겨들었다.나토는 기구를 계속 확대강화하면서 서쪽방향에서 로씨야에 대한 포위환을 좁혀가고있다.일본렬도를 거점으로 동쪽에서 벌어지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도 로씨야의 경계심을 자아내고있다.올해 2월 중순에 도이췰란드에서 진행된 뮨헨안전회의에서 의장인 월프강 이슁게르는 《최근 한해동안 세계는 낭떠러지에 바싹 접근하였다.》고 말하였다.그는 국제안전에 대한 도전들의 하나로 긴장이 격화되고있는 나토와 로씨야사이의 관계를 꼽았다. 로씨야대통령 뿌찐은 지난해 5월 9일 력사의 교훈으로부터 출발하여 지금 로씨야는 군사력을 강화하여 나토를 제지시키는것으로 평화를 담보하려 하고있다. 본사기자 리경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