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9월 16일 로동신문

 

[정세론해설]

일본은 성노예범죄의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수 없다(2)

3.국가권력을 총발동하여 감행한 죄악

 

일본은 군성노예제를 내오는데 군권을 비롯한 각종 국가권력을 총동원하였다.

2000년 국제녀성전범법정에서도 많은 방증자료, 피해자증언자료 등을 통해 일본이 군성노예제수립에 군권, 관권을 발동하였다는것이 적라라하게 폭로되였다.

우메즈 요시지로 일본륙군성 부장관(당시)이 북지나방면군 및 중지나방면군의 참모장들에게 발송한 1938년 3월 4일부의 《군위안소 종업원 등 모집에 관한 건》(통첩문)이 대표적실례이다.

이 통첩문은 일본군성노예제도를 세우도록 한 직접적지시자, 그 운영관할자가 누구인가 하는것을 명백히 보여주고있다.

일본륙군대신 스기야마 하지메(1880-1945)의 위임에 따라 륙군성 병무과장 이마무라와 륙군성 부장관 우메즈 요시지로(1882-1949)가 결재인장까지 찍은 이 문건에는 《위안부》모집사업이 무질서하게 진행되여 일본군의 《위신》을 저락시키고 군사작전에 지장을 주며 주둔지역《치안》에 불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고있다고 지적되였고 다음과 같은 명령들을 하달한다고 명기되여있었다.

《① 〈위안부〉모집을 철저히 파견군의 통제하에 진행할것.

② 민간인전문매춘업자들을 인입하려는 경우 그들을 엄선할것.

③ 〈위안부〉모집시에는 현지 헌병대와 경찰들과 련계를 가지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진행할것.…》

이에 따라 1938년 4월 6일 남경주재 총령사관에서 일본륙군성 병참사령관, 총령사, 령사관의 해군무관이 참석하여 륙군성, 외무성, 해군성 3성공동회의를 열었다.회의에서 그들은 《위안소》의 관리원칙과 앞으로 《위안소》를 늘일데 대한 문제를 토의하고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합의하였다.

《① 륙군전속〈위안소〉는 군이 직접 관할 또는 경영하는 조건에서 령사관이 관여하지 않는다.

② 사민으로 리용하는 〈위안소〉의 경영자에 대한 관할통제는 령사관이 하며 거기에 출입하는 군인, 군속들에 대한 통제는 헌병대가 한다.

③ 헌병대는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위안소〉에 대한 림검을 할수 있다.

④ 파견군은 점차 민간인매춘업소들을 군〈위안소〉로 전환시킨다.

⑤ 파견군은 민간인들에게 군대를 위한 〈위안소〉를 설치하도록 허가를 주는 경우에도 경영업자의 본적, 주소, 이름, 나이에 대하여 령사관에 통보하여야 한다.》

일본륙군성은 1940년 9월 《위안》시설에 주목하는것이 필요하다, 《성적위안》이 병사들에게 주는 영향은 매우 크다, 특히 《성적위안》이 군인들의 《사기진흥》, 《군기유지》, 《범죄》 및 《성병방지》 등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는 통보를 부대들에 하달하였다.이밖에도 성노예제를 군부가 직접 틀어쥐고 영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조치까지 취하였다.그것이 바로 1942년 3월 26일부 《과장회보》에 발표된 륙군성 은상과장의 제안이다.

그 제안에는 주민들이 헌납하는 《국방헌금》으로 하사관이하를 위한 영구적《위안》시설을 설치할데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

군부는 이 제안을 검토한데 기초하여 이미 민간업자들이 설치운영하던 《위안소》들을 정비하고 군부가 직접 관리운영하는 《위안소》들을 내오기로 하였다.

1942년 9월 륙군성 《과장회보》에서 《장교이하의 〈위안소〉시설을 다음과 같이 만들었다.》고 하면서 그 결과보고를 하였다.

그에 의하면 《위안소》는 화북에 100개, 화중에 140개, 화남에 40개, 남방지역에 100개, 남해에 10개, 화태(남싸할린)에 10개로서 모두 400개가 설치되였다.

태평양전쟁개시 직후인 1942년 3월에는 일본왕 히로히또의 《칙령 300호》를 개악하여 《위안소》관계업무를 후생업무에 포함시키도록 하였으며 그해 4월부터 륙군성은 인사국의 은상과를 성노예들의 강제련행, 수송, 《위안소》의 관리운영을 담당하는 부서로 지정하였다.결과 일본군에는 군상층으로부터 산하부대들에 이르기까지 군《위안소》관리운영체계가 세워지고 통일적인 지휘관리하에 군성노예범죄행위가 대대적으로 감행되게 되였다.

일본군부는 조선을 성노예공급원천지로 삼았다.

조선녀성들을 랍치, 유괴, 강제련행하는 범죄행위를 현지에서 직접 지휘하고 집행한것은 조선총독부와 조선주둔군사령부였다.

일본군부의 지령이 하달되면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각 도경찰부에 지시하고 각 도경찰부는 각 군에 지령을 떨구었으며 각 군은 각 면에 지령을 하달하였다.지령을 받은 면에서는 면장이 직접 또는 구장이나 촌장을 발동하여 녀성들을 끌어냈다.

이것을 증명하는 자료는 많다.

성노예피해자들은 증언에서 면장이나 구장들이 불량배들을 앞세우고 와서 자기들을 강압적으로 끌어갔거나 헌병, 경찰관들이 강권으로 붙잡아갔다고 말하였다.

조선녀성들에 대한 랍치, 유괴, 강제련행을 앞장에서 집행한 일본인들의 증언과 회고담들도 적지 않게 있다.

1938년 11월 4일부 내무성 경보국자료에는 중국남부를 점령한 제21군에 《위안소》를 내오기 위해 제21군의 참모와 륙군성의 모집과장이 함께 찾아와 400명의 《위안부》를 모집해달라는 요구사항들을 제기한것과 그것을 응낙한 내용이 있다.

1945년초의 일에 대하여 한 병사가 회상하여 쓴 《대륙종전비화》에는 《이 〈위안소〉가 중지(중부중국)에 위치한 계림보다 더 앞에 있는 52려단사령부의 통신대가까이에 설치되여있어 놀랐다.》고 씌여져있다.

일본군이 1944년 6월 18일 장사를 점령하고 설치한 《위안소》에 대하여 쓴 《전장도중기》(호소가와 다다오 저), 전 일본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실에서 발견된 1932년 9월부터 1933년 2월까지 일본군 제14려단사령부가 작성한 《위생순보》 34편과 함께 《예창기, 작부건강진단요령》(《위안부》건강진단법)이라는 공문서 그리고 일본인들의 증언과 함께 물증자료로 제시된 《위안소》출입증 등 증거들은 수없이 많다.

미국립문서보관소에는 1944년 중미련합군이 일본군통치하의 중국남부 먄마접경지역을 탈환할 당시 7명의 성노예들의 모습을 담은 18초짜리 흑백동영상이 오랜 기간 보관되여있었다.2017년 7월에 그것이 세상에 공개되였다.

그리고 일본국립공문서관에서는 1999년도에 19건에 182점의 공문서들이 또다시 발견되여 내각관방에 보내여졌다.

19건의 공문서들에는 법무성이 작성한 전후의 극동국제군사재판과 B급, C급전범자재판에 관한 자료들이 기록되여있다.그중의 하나인 《바따비아재판 〈제25호사건〉》자료에는 전 일본해군의 인도네시아주둔 특별경찰대 대장이 전후 법무성관계자에게 《산에 있는 부대를 위해 200명정도의 부녀들을 〈위안부〉로 발리섬에 데려왔다.》고 증언한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에 대하여 여러 학자, 전문가들은 《군의 관여와 강제련행을 보여주는 자료》, 《군이 강제로 위안부를 련행하였다는것을 명백히 보여준다.》고 일치하게 인정하였다.

1937년 당시 일본군 상해파견군 참모장 이이누마 마모루의 진중일기와 일본군성노예들을 병원직원으로 은페하기 위해 작성한 군속자료, 제2차 세계대전시기 악명을 떨친 일제의 《731부대》에서 일본군성노예들을 실험대상으로 리용하였다는 증언사실자료(《요미우리신붕》 2007년 4월 9일부 인터네트기사), 일본군이 군성노예를 강제동원하였다는것을 립증하는 증거자료(2007년 4월 네데를란드의 법정문서에서 발견)가 들어있는 문서 등도 있다.

2007년 3월에 공개된 아오찌 와시오에 대한 자료도 있다.그것은 1946년 10월 네데를란드 림시군법회의에서 한 증언과 판결문에 반영된것이였다.

피고 아오찌는 점령지의 일본군정당국의 지시를 받고 《위안소》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2007년 4월 11일 일본 교도통신은 이 문서는 일본군이 《위안소》설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것을 자료적으로 보여주는것이기때문에 성노예강제련행사실을 뒤받침해주는 증거자료로서 가치가 크다고 보도하였다.

2007년 4월 12일에 남조선에서 공개된 성노예강제동원과 관련된 네데를란드정부기록보관소의 비밀문서 역시 일본의 군부, 정부의 직접적관여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의 극동국제군사재판의 자료에도 7건의 해당 자료가 있다.

이밖에도 군부를 비롯하여 일본의 국가권력이 일본군성노예제도를 창안, 수립하였다는 자료는 실로 방대하다고 하리만큼 많다.

일본연구소 상급연구원 조희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