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10월 2일 로동신문

 

모두다 사회주의애국공로자들처럼 살며 투쟁하자!

당의 농촌기계화구상을 앞장에서 받들어가는 전초병

금성뜨락또르공장 기술과 공정원 백영민동무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기계공업부문에서는 금성뜨락또르공장과 승리자동차련합기업소를 비롯한 기계공장들을 현대화하고 세계적수준의 기계제품들을 우리 식으로 개발생산하여야 합니다.》

지난해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금성뜨락또르공장구내에 즐비하게 서있는 수백대의 새형의 80hp뜨락또르들을 환한 미소속에 바라보시면서 만리마시대에 태여난 조선의 뜨락또르, 최악의 조건에서도 최고의 목표를 내세우고 최상의 성과를 이룩하고야마는 영웅적 김일성-김정일로동계급의 백절불굴의 혁명정신이 낳은 고귀한 창조물이라는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그날 우리 로동계급에 대한 절세위인의 뜨거운 믿음이 어려있는 말씀을 전달받으며 커다란 격정과 흥분에 휩싸여있는 사람들속에는 금성뜨락또르공장 기술과 공정원 백영민동무도 있었다.

그는 지난 수십년간 당이 맡겨준 초소에서 지혜와 열정을 다 바쳐 성실하게 일해왔으며 새형의 뜨락또르개발과 생산에서 큰 몫을 맡아 수행함으로써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 커다란 기쁨과 만족을 드리는데 적극 이바지하였다.

불타는 충정과 높은 실력으로 나라의 뜨락또르공업발전에 헌신의 자욱을 새겨온 백영민동무, 그의 삶은 당의 품속에서 자라난 우리의 과학자, 기술자들이 경제강국건설을 위한 오늘의 투쟁에서 어떤 지향을 안고 삶의 순간순간을 빛내여가야 하는가에 대한 훌륭한 대답으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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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수십년전 크지 않은 키에 체소한 몸집의 청년이 금성뜨락또르공장 기술과로 들어섰다. 김책공업종합대학을 갓 졸업하고 공장에 배치되여온 백영민동무였다.

그때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들이 기술과 성원들이였다.

《김책공업종합대학 졸업생이니 뜨락또르부속품가공에서 제기되는 기술공정지도는 문제없겠구만.》

《이제야 한숨이 나가는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치차가공에 필요한 공구설계와 제작을 맡기는게 어떻습니까.》

그날 자기를 둘러싸고 주고받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백영민동무는 김책공업종합대학 졸업생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에 가슴이 절로 부풀어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치차가공이며 공구제작이라는 말들이 왜서인지 자기의 자존심을 건드리는것만 같아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대학졸업생인 나에게 설마 치차같은 뜨락또르부속품가공이야 맡기지 않겠지.)

그런데 그 위구심이 현실로 될줄이야…

공장기술과에 배치받은지 며칠 지나지 않아 공장기술일군이 그에게 뜨락또르생산에 들어가는 각종 치차를 가공하기 위한 공구설계와 제작을 맡아보도록 했던것이다. 백영민동무는 마음이 무거웠다.

치차라는것은 웬만한 기계장치에 쓰이지 않는데가 없는 너무도 평범한것이 아닌가. 약국의 감초라고 오죽하면 공업을 뜻하는 마크나 상징물에 흔히 치차가 새겨져있겠는가.

그러나 백영민동무는 오래지 않아 자기의 생각과 현실간에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가를 깨닫게 되였다.

어느날 그가 뜨락또르변속장치에 들어가는 어느 한 치차를 가공하기 위한 공구설계와 제작과제를 맡았을 때였다. 타산해보니 설계와 제작과정이 크게 어려울것 같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나의 실력이 어떤가를 남김없이 보여주리라.)

이렇게 마음다진 백영민동무는 별로 큰 품을 들이지 않고 단 며칠새에 설계를 전부 끝냈다. 그런데 설계도면을 검토한 기술과 일군의 말은 너무도 뜻밖이였다.

《이 공구로는 뜨락또르변속장치에 들어가는 치차를 깎을수 없소. 공구설계를 다시 하시오.》

그 말을 듣는 순간 백영민동무의 얼굴은 모닥불을 뒤집어쓴것 같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며칠후 백영민동무가 설계제작한 공구로 깎은 제품에는 불합격이라는 도장이 찍혀졌다. 실지 치차가공을 위한 지구, 장비설계와 제작은 말처럼 쉽지 않았던것이다.

줌안에도 겨우 차는 자그마한 치차라 할지라도 그것을 가공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지구와 공구가 필요하고 그에 앞서 지구, 공구설계와 제작이 따라서야 하며 공정원은 기대공의 손에서 제품이 떨어질 때까지 제작 전과정에 대한 기술공정지도를 책임져야 했다. 기계공학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 풍부한 상상력과 창조력이 없으면 해낼수 없는 일이였다.

저녁식사도 잊은채 합숙의 빈방에 홀로 있는 그에게 오랜 기술자가 찾아왔다.

《영민이, 젊은 친구가 죽지부러진 새처럼 그렇게 멍청히 앉아있어서야 되겠나. 용기를 내라구.》

그날 밤 로기술자는 백영민동무와 한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날이 새도록 그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나라 뜨락또르공업발전에 어려있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로고와 헌신에 대하여, 나라의 과학기술발전에 이바지해야 할 우리 지식인들의 참된 자세와 립장에 대하여…

《우리가 하는 일을 단순히 기술실무적인 일로만 여겨서는 안되네. 우린 기술자이기 전에 당에서 그토록 관심하는 농촌기계화실현의 척후병이라는것을 잊지 말자구.》

백영민동무는 분발해나섰다. 자기가 하는 일이 비록 남들의 눈에 선뜻 띄는 요란한 일은 아니여도 뜨락또르제작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사업의 하나임을 자각하고 자기의 실무수준을 높이기 위해 피타는 사색과 노력을 기울였으며 설계도면의 점 하나, 선 하나마다에 기술자의 깨끗한 량심이 엿보일수 있도록 애써 일했다.

그리하여 공장에 배치받은지 몇해후 백영민동무는 28hp뜨락또르부분품가공을 위한 기술공정지도에서 막힘이 없는 유능한 기술자로 성장하게 되였고 우리 나라 뜨락또르공업에서 처음으로 되는 유압조향장치와 앞구동장치의 시제품제작에 참가하여 본체부분품과 치차부분품가공을 위한 공구제작과 기술공정지도를 책임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새형의 뜨락또르개발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이바지할수 있었다.

두해전 정월초였다. 금성뜨락또르공장의 어느 한 사무실에서 긴급협의회가 열렸다. 공장앞에 새형의 80hp뜨락또르시제품을 만들어내야 할 무거운 과업이 나섰던것이다. 시간이라야 단 몇달…

《이번 뜨락또르시제품개발은 개발창조형의 사업인것만큼 애로와 난관도 클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당에서 준 과업을 한치의 드팀도 없이 무조건 수행해온 결사관철,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이 있습니다. 우리모두 새형의 80hp뜨락또르시제품을 제기일내에 훌륭히 만들어냄으로써 당의 믿음과 기대에 보답합시다.》

공장당위원회 책임일군의 불같은 호소에 참가자들모두의 심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곧 구체적인 전투계획이 발표되였다.

백영민동무는 새형의 뜨락또르시제품개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치차가공을 위한 공구설계와 제작과업을 맡게 되였다. 어느날 공장설계사업소에서 보내온 뜨락또르부분품설계도면을 마주한 그는 저도모르게 마음이 긴장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얼핏 보기에도 새형의 뜨락또르부분품들은 28hp뜨락또르부분품가공에 쓰이는 지구장비로는 깎을수 없는것들이였다. 치차 하나만 놓고보더라도 오래동안 뜨락또르부분품을 다루어온 백영민동무도 처음 보는것으로서 이미 있던 공구로는 가공이 불가능했다. 공구설계부터 완전히 새롭게 해야 했다.

그는 며칠밤을 새워가며 설계를 완성했다. 그러나 보다 어려운 과제는 앞에 있었다. 설계대로 공구를 제작하자고 보니 방도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것이다. 피타는 사색과 고심끝에 공구를 만들어 제품을 가공해보면 매번 실패로 끝나군 했다.

그런 속에 새형의 뜨락또르시제품을 완성해야 할 날자는 하루하루 다가오고있었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속에서 치차가공만은 그에 필요한 공구를 다른 곳에서 사와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였다.

어느날 현장에서 식사시간마저 잊은채 공구시험에 여념이 없던 그에게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같은 기술과에서 일하는 공정원이였다.

《백동무,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되겠네. 공구를 다른 나라에서 들여오기로 토론되고있다누만.》

백영민동무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남의것으로 만든 뜨락또르가 어떻게 진정한 우리의것으로 될수 있으며 또 그런 뜨락또르를 어떻게 개발창조형이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며칠후 새형의 뜨락또르개발과 관련한 협의회때였다. 또다시 설비타령을 늘어놓는 사람들앞에서 백영민동무는 마디마디에 힘을 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기술자들이 있어가지고 남의 설비로 뜨락또르를 만든다는건 말도 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 힘으로 해내겠습니다.》

모두가 놀라운 눈길로 백영민동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실 백영민동무에게 그 어떤 타산이나 담보가 있는것은 아니였다. 있다면 조선의 기술자로서 남들에게 결코 뒤질수 없다는 강한 자존심, 맨손으로 첫 뜨락또르를 만들어내던 전세대 로동계급의 투쟁정신과 일본새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굳센 배짱이였다.

그는 밤잠을 잊다싶이 살았다. 길을 걸으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지어 잠자리에 들어서도 어떻게 하면 설계의 요구대로 뜨락또르부분품을 가공할수 있겠는가에 대해 사색을 멈추지 않았다.

이른아침 집을 나서면 새벽녘이 되여서야 들어서는 남편을 보다 못해 안해인 리남숙녀성이 밤참을 들고 현장을 찾기가 일쑤였으며 혼곤히 잠든 속에서도 늘 《치차홈… 치절반…》 하는 아버지의 잠꼬대에 어린 딸 연정이가 아버지곁에서는 못 자겠다고 때없이 투정질하군 했다.

이런 헌신과 열정은 드디여 치차가공을 우리의 힘으로 훌륭히 완성하는 기적을 낳게 하였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 당대회에 드리는 충정의 로력적선물로 제작한 기계설비전시장을 돌아보시며 금성뜨락또르공장에서 만든 새형의 뜨락또르가 미남자처럼 잘 생겼다고, 정말 멋있다고, 사회주의수호전의 철마이라고 하시면서 모든 기술적성능들이 세계적수준에 당당히 올라선 능력이 큰 새형의 뜨락또르를 100% 우리의 힘과 기술로 만든것은 대단한 성과이라고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시였다는 소식에 접했을 때 백영민동무는 이 세상 모든 행복을 다 독차지한것만 같아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그후 공장은 새형의 뜨락또르를 본격적으로 생산할데 대한 새로운 과업을 받아안게 되였다. 과업은 아름차고 방대하였다. 수량만 해도 수백대를 헤아리고 생산기일은 불과 몇달밖에 되지 않았다.

뜨락또르부분품가공에서 제기되는 지구장비를 원만히 보장하는것이 당에서 준 영예로운 과업을 빛나게 수행하기 위한 방도의 하나임을 잘 알고있는 백영민동무는 새로운 각오를 안고 전투에 진입했다.

그는 공구제작을 위한 연마공정을 우리 식으로 개조할 기발한 착상을 내놓고 그 실현을 위해 사색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으로 만드는것이다보니 설계로부터 제작에 이르기까지 어디에 가서 물어볼데도 없었고 도움이 될만 한 참고서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백영민동무는 주저하지 않았다. 이미 새형의 뜨락또르시제품개발전투를 통하여 하자고 결심만 하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것을 드팀없는 신조로, 좌우명으로 새겨안은 그였다. 국가과학원 연구사들의 방조밑에 연마석수정장치를 CNC화하기 위한 전투로 날이 저물고 새날이 밝아오는 속에 백영민동무는 끝내 치차를 우리 식으로 가공할수 있는 공구와 설비를 완성하고야말았다.

뜨락또르변속함에 들어가는 어느 한 치차가공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치차는 매우 까다로운 구조를 가지고있었는데 뜨락또르부분품설계와 가공에 조예가 깊은 한다하는 기술자, 기능공들도 그런 치차가 있다는것을 말로만 들어왔지 실지 본 사람은 별로 없었고 만들어본 사람은 더우기나 없었다.

백영민동무는 이때에도 합리적인 치차가공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참담한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는 압착방법에 의한 치차가공공정을 확립함으로써 뜨락또르생산을 중단없이 내밀수 있는 돌파구를 열어놓았다.

지난해 9월 금성뜨락또르공장의 로동계급은 수백대에 달하는 새형의 뜨락또르에 대한 총조립을 전부 끝낸데 이어 부하시운전과 주행시험도 원만히 보장하는 자랑찬 성과를 이룩하고 공장에 찾아오신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 또다시 커다란 기쁨과 만족을 드릴수 있었다.

이렇듯 새형의 80hp뜨락또르부속품 총 3 377종에 1만 228개가운데서 3 333종에 1만 126개를 자체로 생산함으로써 국산화비중을 98. 7%수준에서 보장한 금성뜨락또르공장의 귀중한 성과속에는 누가 보건말건, 알아주건말건 당에서 맡겨준 과업을 결사관철하기 위해 지혜와 열정을 아낌없이 바쳐온 백영민동무의 뜨거운 애국충정의 마음도 소중히 깃들어있다.

자기들의 구슬땀배인 수백대의 새형의 뜨락또르를 떠나보내던 날 사람들은 백영민동무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며 뜨락또르생산에서 큰 몫을 맡아수행한 그를 열렬히 축하해주었다.

그가 받은 꽃다발, 그것은 비록 수수하고 크지 않은것이였지만 지난 수십년동안 그 어떤 명예와 보수도 바람이 없이 오로지 당의 농촌기계화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 자기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쳐온 백영민동무에 대한 집단과 동지들의 값높은 평가이고 믿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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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나본 백영민동무는 어디서나 볼수 있는 평범한 기술자였다.

언제나 말없이 맡은 일에만 전념하는 그이기에 한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도 백영민동무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못하다. 그러나 오늘 백영민동무는 당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속에 우리 시대의 참된 기술자로 행복과 영광의 절정에 올라서게 되였다.

사회주의애국공로자의 영예를 지닌 백영민동무,

비록 겉모습은 소박하고 수수해도 자그마한 사심이나 공명도 없이 깨끗한 량심과 의리로 우리 당을 받들어가는 이런 미더운 지식인들의 대오가 있어 경제강국건설의 휘황한 래일이 앞당겨지는것이다.

글 및 사진 본사기자
리남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