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10월 16일 조선신보

 

《종전선언, 평화협정체결, 조미관계정상화》 문제를 
중심으로 다룬 《2018 세계(뉴욕)평화학술회의》 1/정기열

 

들어가는 말

 

워싱턴 소재 《21세기 연구원》(Institute for 21st Century International Relations: 21cir)은 21세기 초 오늘 지구촌 국제문제 핵심 쟁점 중 하나인 북(조)미 간 종전선언, 평화협정, 관계정상화 문제를 다룬 《2018 Global Peace Forum on Korea》(GPFK, 세계평화학술회의: 이하, 학술회의)를 9월 29일-30일 양일 뉴욕 소재 콜롬비아대학(이태리아카데미)에서 개최했다. 대회에는 코리아문제에 정통한 학자, 전문가 30여명이 6자회담 참가국들인 남북해외 우리민족과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을 중심으로 참가했다. 29일 낮 학술포럼(Forum)과 저녁 축하만찬(Banquet Dinner), 30일 오전 열린대화마당(People to People Dialogue and Exchange) 등 2018 GPFK 전체프로그램에 참가한 인원 수는 약 160명으로 집계됐다.

 

학술회의 구상, 발기, 
  제안, 추진, 조직 주체

 

2017년 1월 조지아주정부에 비영리교육단체로 등록된 《21세기 연구원》은 약 1년 여 준비를 거쳐 2018년 봄 연방정부로부터 세금면제(Tax-exempt) 혜택 받는 《501(c)(3) 연구단체》로 공식 인가됐다. 직후 연구원은 9.29학술회의를 공식 조직하기 시작했다. 학술회의 첫 구상은 2017년 말이다. 구체적 대회 준비는 그러나 워싱턴 한복판에 연구원을 내온 지난 3월 이후다. 대회 구상 처음 시작 뒤 약 4-5개월 자체 준비 거쳐 남북해외 우리민족과 6자회담 참가국 중심 국제사회 친구들에게 학술회의를 처음 공식 제기한 것은 지난 4월이다. 여기저기 주요 국가대상들에 문건이 처음 나갔던 때는 그러니까 정확히 9.29학술회의 개최 6개월 전이다.

4월부터 9월 대회까지 6개월 조직, 동원, 재정 등등의 모든 짐은 대회를 발기, 제안, 추진한 연구원이 짊어졌다. 대강 6-7월 전후 워싱턴, 뉴욕 중심으로 뜻을 함께 하는 친구들이 모였다. 평생 인연이 있는 친구들이다. 그들 모두 오늘 종교를 배경으로 한 여러 조직의 최고 혹은 중요 직책에 있다. 그들을 중심으로 대회조직위원회가 7월 말 꾸려졌다. 남은 기간 대회 준비 마지막 과정 그들 모두가 전면에 섰다. 그들 대부분은 기독교 배경을 가진 뉴욕, 워싱턴 지역의 진보적 반전평화인권단체들 책임자이다. 무엇보다 그들 모두 코리아문제 특히 조(북)미관계개선 관련 미국정부, 의회, 유엔을 상대로 오래 일한 단체(faith-based organization)들이다. 미전국교회협의회, 미연합감리교 세계선교국, 미친우봉사회(AFSC),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CC) 유엔사무국이 그들이다.

학술회의 준비 막바지에는 조지아주 아틀란타에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세운 명성 높은 카터센터(Carter Center)도 합류했다. 한국정부 재정지원으로 운영되며 기본 서울, 워싱턴 정부입장을 대변하는 반관반민단체 코리아소사이티(Korea Society)도 합류했다. 일종의 《주류》에 속하는 사회정치종교단체들이 앞장선 것이다. 지어는 ‘유엔조직의 꽃(실세)’이라는 유엔정치국(UNDPA) 사무국도 합류했다. 카터 대통령과 유엔정치국 로즈메리 에이 디까를로 유엔부사무총장이 제일 먼저 축사를 보냈다. 제네바 소재 세계교회협의회(WCC) 조직의 외무장관 격인 국제국장은 직접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답을 보냈다. 와서 기조연설도 했다. 벨기에 소재 유럽의회 반핵평화단체(PNND)의 국제국장은 마지막 순간 본인이 직접 정식으로 참가신청서까지 보냈다.

 

학술회의에서 이뤄진 남북의 뜨거운 
   만남, 포옹, 6.15남녘대표단 참가

 

대회 준비 막바지에 남과 북에서 또 다른 낭보들이 날아들었다. 먼저 남녘에선 국회에서 남다른 활동으로 이름 높은 더불어 민주당 수석대변인 홍익표 의원(정치학박사)과 같은 당 소속 변호사 출신 이재정 의원(법학박사)의 참가가 확정됐다. 학술회의에서 오랜 인연의 홍 의원은 기조발제를, 이 의원은 패널리스트(발제)로 각각 큰 역할을 했다. 유엔총회 행사 참가 차 뉴욕을 방문한 정부 산하 기관 《코리아국제협력단》(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KOICA) 이사장 이미경 전 민주당 의원도 참가를 희망, 지구촌 주요인사들과 함께 축사를 했다. 원광대를 대표해 모두 3분의 젊은 교수들이 참가했다. 최근 《인기 높은》 이병한 교수도 합류했다. 서울대, 숭실대에서도 교수들이 참가해 발제를 맡았다. 대회 경비를 돕는 취지에서 서울에서 오신 분들은 모두  자비로 참가했다. 기조발제, 패널리스트도 마찬가지였다. 발제자들에게 사례금은 커녕 거꾸로 그분들의 대회후원금까지 받았다. 정녕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2018세계평화학술회의》의 꽃은 북녘을 대표해서 참가한 김일성종합대학 태형철 총장(교수/박사)의 ‘론문’이다. 70년 북(조)미대결 역사상 처음 발생한 사건이다. 태 총장은 《내각 고등교육상》을 겸임하고 있다. 《철천지 원수 적국》 미국에서 열린 국제학술행사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명의 논문이 발표된 것 자체가 오늘의 정세변화를 웅변하는 역설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태 총장 영어 논문을 대독한 조선뉴욕대표부 외교관의 유창한 영어실력과 그가 저녁 만찬행사 때 무대에서 울려 나온 미국 브라스밴드 5중주의 흥겨운 북녘노래가락소리에 이끌려 흥에 겨워 앞으로 나와 부른 노래(《나는 그대의 영원한 아들》)에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대회 뒤 가사에 대해 물은 것은 기본 타민족들이다. 가사 번역 부탁까지 받았을 정도다.

참고로 조선학술대표단은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단장으로 초청된 태 총장 논문만 참가했다. 4월부터 초청 관련 품을 들이고 공을 들인 우리에게 국무성은 끝내 조선대표단 초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대표단은 오지 못했지만 그러나 대회에는 뉴욕 주재 유엔대표부 조선외교관들이 참가했다. 미국정부는 협조하지 않았지만 조직위가 목적한 본래의 학술회의 목표 곧 북(조선) 포함 6자회담 참가국 학자들이 모두 참가한 대회가 이뤄진 것이다. 참고로 뉴욕주재 조선외교관들의 학술회의 참가는 ‘국가 공식 결정’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유엔대표부 자체 결정이 아니다. 행사의 또 다른 화제는 저녁 만찬 행사다. 뉴욕주재 유엔대표부 상임대표로 갓 부임한 김성 대사가 참가한 것이다. 조선외교관들의 국제학술회의 참가가 갖는 몇가지 의의는 II 부에서 다룬다.

대회를 구상했던 처음부터 6자가 참가하는 국제학술회의에 세상 그 어느 곳 아무리 이름 높은 학자들이 참가하더라도 그러나 북녘에서 온 학자들 참가없이 대회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1년 가까이 대회를 발기하고 준비한 연구원은 물론 지난 6개월 동고동락한 조직위 미국친구들도 함께 고심했다. 마지막까지 모두 노심초사했다. 과연 누가 어떻게 참가할 것인가 궁금해했다. 좋은 결과를 학수고대했다. 꿈에도 소원했다. 그리고 김일성종합대학 논문이 도착했다. 그 논문 덕에 최대는 아니지만 그러나 대회가 목적한 최선의 목표는 이룰 수 있었다. 무엇보다 뜻밖의 경사가 있었다. 유엔총회에 종전선언, 평화협정을 촉구하기 위해 뉴욕을 찾은 6.15서울대표단이 바쁜 일정을 쪼개 29일 당일 낮 학술회의에 참가하면서 남북의 뜨거운 만남이 성사됐다. 참가자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남북은 뜨겁게 포옹했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연합뉴스는 감격스런 바로 그 장면을 동영상에 올렸다.

 

뉴욕학술회의 주요 참가 단체, 
   인사들의 배경: 《주류》?

 

《코리아문제》 즉 《70년 조미대결사》 관련 세상이 어느 정도 급변하고 있는지를 온 몸으로 체득한 대회였다고 평가해 과하지 않다. 격세지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해외에서 40년 가까이 우리문제 갖고 활동한 뒤 갖는 경험이기에 더 큰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인류사 초유의 전대미문 사건》이라 정의해야 옳은 70년 조미대결, 25년 조미핵대결이 종장을 향해 달리고 있는 오늘의 정세변화와 무관치 않다. 정세변화를 감안 학술회의 모양과 주체를 과거와 달리 조직했다. 예를 들면 2018년 학술회의 주체는 2000년 5월 북경에서 결성된 《남북해외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가 만 1년의 준비를 거쳐 2001년 6월 역사상 처음으로 뉴욕에서 개최한 《코리아국제전범재판》(Korea International War Crimes)의 조직 주체와 다르다.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다.

《1950-53년 전쟁 시기 미군에 의한 민간인(양민) 대량학살》 문제 곧 《전쟁범죄》 문제를 다루기 위해 조직된 전민특위가 활동했던 당시와 오늘 정세는 주지하듯 크게 다르다. 3차 남북정상회담과 2차 조미정상회담이 논의되는 오늘 더 가까이 피부로 느끼는 변화다. 20여년 전 당시와 근 20년 지난 오늘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정세, 대담무쌍하게 급변하는 조미관계, 남북관계를 축으로 지구촌 특히 동북아/유라시아대륙의 《주요 강대국간 관계》(Geopolitical power relations) 변화가 근본에서부터 빠르게 재편성되고 있는 정세변화와 무관치 않다. 20년 전 전범재판을 조직했던 당시는 뉴욕 소재 반전평화단체인 《국제행동센터》(IAC) 같은 조직들을 주로 앞세웠다. 당시엔 일종의 《비주류》가 앞장선 셈이다. 20년 뒤 뉴욕학술회의는 그러나 《주류》에 속하는 그것도 주로 종교단체들이 앞장 섰다. 급격한 오늘의 정세변화를 고려한 결정이다.

지난 7월 말 대회 장소를 본래 처음 구상, 계획한 워싱턴(아래 소개하는 이유 때문에)에서 급히 뉴욕으로 옮기게 되면서 대회조직위원회는 뉴욕에 꾸려졌다. 그러나 장소 변경도 조직위원회 구성도 대회 마지막까지 모두 아래 짧게 소개하는 이유로 조용히 이뤄졌다. 무슨 첩보영화에서처럼 모든 것을 조용하게(혹은 비밀스럽게) 준비했다. 대회조직위를 간단하게 꾸린 이유다. 전체 10여명이 참가한 조직위에서 기본 역량을 마지막 함께 쏟은 것은 뉴욕에 소재한 MCC 유엔사무국(UN Office)과 미연합감리교 세계선교국 인권인종정의국이다. 대회 준비 마지막 2달은 그들이 주역이었다. 우리와 함께 그들이 혼신을 다해 대회 준비에 앞장 섰다. 한 예로 카터 대통령을 시작으로 유엔정치국 부사무총장, 세계교회협의회 국제국장 등은 기본 모두 그들 인맥을 통해 조직됐다.

 

뉴욕학술회의를 자체 역량 부족 때문에 
   언론에 널리 소개하지 못했다

 

학술회의 조직위원회는 대회를 세상에 널리 소개 못했다. 무엇보다 조직위원회 자체 역량 부족했다. 역량 부족이 기본 원인이다. 또 다른 중요 이유는 서울언론매체와의 《독점취재계약》이라는 말 뜻 자체에 대한 무지와 오해다. 대회 경비 문제를 해결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준 언론그룹 《머니투데이》(Money Today)와 맺은 계약을 잘못 이해했다. 대회 직전에야 우리가 오해한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 널리 대회를 소개하지 못한 것은 무지와 오해가 부른 결과다. 전적으로 대회를 조직한 연구원과 조직위원회 판단 잘못이다. 대회 당일 소문 듣고 대회장을 찾은 《연합뉴스》 특파원과 유엔 소속 《기독교세기》(The Christian Century)라는 이름의 종교신문 기자 그리고 뉴욕 소재 일본TV매체 두 언론이 제 발로 스스로 찾아와주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학술회의가 거둔 큰 성과에도 불구하고 가장 아쉬웠던 것이 바로 언론보도문제다. 대회를 사전에 소개하지 못한 것은 그러나 언론독점계약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대회 개최 관련한 정보유출 문제 곧 《보안문제》가 더 큰 이유였다. 대회 당일까지 조직위원회는 장소가 또 다시 취소될 수 있다는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참가자 모두에게 지어는 유엔정치국에게조차 대회 전날에야 장소를 알려줬을 정도다. 대회를 공개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한 4월부터 모두 3개의 대회 장소가 이유없이 취소됐기 때문이다. 모두 일방적 취소다. 합법적 행사조차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장소가 계속 취소되고 있다는 판단이 조직위로 하여금 끝까지 대회 관련 정보공개를 주저하게 만든 이유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며 스스로를 위로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대회는 9.29-30 학술회의 전체를 취재한 머니투데이 소속 기자 10여명 덕에 남녘에는 나름 대대적으로 소개됐다. 《뉴욕평화포럼》이라는 기사 제목으로 널리 소개된 것 같다. 《연합통신》,《중앙일보》 같은 매체도 머니투데이 산하 매체를 인용, 학술회의를 소개했다. 《뉴시스》, 《뉴스1》 같은 소속 매체들이 주로 소개했다. 위에 지적한 것처럼 학술회의는 여러 큰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영어권 언론에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대회를 널리 소개하지 못한 책임은 무엇보다 학술회의를 구상, 발기한 연구원에게 있다. 위에 언급한 이유 외에 선전, 홍보 관련 또 다른 근본 원인은 연구원 자체 역량 부족이다. 여러 이유로 좀 더 많은 분들을 대회에 모시지 못했다. 처음부터 보다 많은 분들이 주인으로 참가할 수 있도록 조직하지 못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맺는 말: 연구원, 뉴욕학술회의 
   그리고 재일동포 이야기

 

대회에 소요된 재정 관련 질문을 많이 받았다. 모두 좋은 취지에서 물었다. 재정 관련 이야기 몇 꼭지를 소개하는 이유다. 앞에 소개한 것처럼 대회에 소요된 적지 않은 재정은 독점취재를 한 머니투데이가 도왔다. 빚지지 않고 대회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된 결정적 이유다. 그러나 연구원 설립부터 학술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까지 지난 1-2년 빼놓을 수 없는 분들의 숨은 공로가 있다. 재일동포들이다. 참고로 필자는 재일동포 통일운동조직인 《평화통일협회(평통협)》 초청 첫 강연을 시작한 2008년 뒤 10년 내내 재일동포사회 전국 방방곡곡을 4-50차례 방문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 과정 2011년부터는 《재일동포 민족교육운동의 꽃》이라는 조선대학교 초빙교수로 일하게 되면서 동포들과 더 깊은 인연을 쌓았다. 오늘도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지난 몇 년 스스로를 《반(半)재일동포》라 부르는 이유다.

지난 8년 1년의 약 1/3을 재일동포들 속에서 살고 있다. 그 과정 재일동포들의 희로애락이 자신의 희로애락이 됐다. 그분들의 한(恨), 아픔, 기쁨, 슬픔, 꿈, 희망이 모두 자신의 것이 됐다. 그분들과 꿈과 희망을 나눈 지가 벌써 10년이 된 것이다. 재일동포들이 일본 땅이 아닌 미국에 내온 연구원 설립과 학술회의의 주인공이 되신 이유일 것이다. 한마디로 그분들 없이 연구원도, 학술회의도 불가능했다. 대회자원봉사자로 와서 많은 수고를 하신 파리 거주 한 재불동포는 대회 참가 뒤 《무에서 유를 창조한 대회》라는 분에 넘치는 평가를 주고 가셨다. 그분 말에서 《무》를 《재일동포》로 바꾸면 그분 말씀에 동의할 수 있다. 재일동포들의 끝없는 믿음, 사랑없이 연구원 설립과 뉴욕학술회의 둘 다 불가능했다. 많은 참가자로부터 ‘대회가 큰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모든 공은 모두 재일동포들에게 돌려져야 옳다.  (II부에 계속)

(김일성종합대학 초빙교수, 조선대학 객원교수, The 21st Century(21세기) 발행인)

출처:조선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