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10월 9일 로동신문

 

모두다 사회주의애국공로자들처럼 살며 투쟁하자!

송흥땅이 자랑하는 다수확분조장

함흥시 동흥산구역 송흥협동농장 농산제2작업반
3분조장 송봉순동무에 대한 이야기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농사일을 잘하여 알곡증산으로 당을 받들고 조국에 헌신하는 사람이 당의 충직한 농업전사이고 내 나라의 참된 애국농민입니다.》

동해안의 공업도시 함흥시를 감돌아흐르는 성천강기슭에 송흥협동농장이 자리잡고있다. 지난 시기 얼마 알려지지 않았던 이 농장에 우리의 주인공이 있다.

함흥시 동흥산구역 송흥협동농장 농산제2작업반 3분조장 송봉순동무.

그는 우리 당의 농업정책을 심장으로 받들고 결사관철함으로써 동해안지대농사에서 해마다 높은 알곡소출을 내는 자랑찬 성과를 이룩하였다.

송흥땅이 자랑하는 다수확분조장, 그의 헌신적삶은 이 땅의 공민이라면, 나라의 쌀독을 책임진 농민이라면 어떤 인생관과 열정을 가지고 조국을 받들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있다.

 

모래땅이 아니라 바위산이라고 해도

 

지금도 황금이삭 설레이는 벌판에서 우리와 처음 만났던 송봉순동무의 모습을 잊을수가 없다.

불어오는 바람에 가볍게 흐느적이는 누런 벼이삭들을 터갈라진 두손으로 정히 품어안으며 그는 말했었다.

《올해도 다수확은 문제없을것 같습니다.》

온 한해 벌을 가꾸느라 검실검실해진 얼굴에 물결치던 기쁨의 그 미소, 끝없는 행복감에 저으기 떨리는듯 했던 그 목소리…

중학교를 졸업한 그날부터 수십년세월을 땅을 가꾸며 살아오는 그에게 있어서 풍년든 농장벌을 바라보는것보다 더 큰 기쁨, 더 큰 행복은 없을듯싶었다.

송봉순동무는 모래땅에 이렇듯 훌륭한 농사작황을 펼쳐놓을수 있은 비결을 묻는 우리에게 흔연히 대답하였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동해안지대농사때문에 얼마나 마음쓰시였습니까. 우리는 그저 이 땅에 우리 수령님들의 념원을 현실로 꽃피우기 위하여 노력했을뿐입니다.》

농산제2작업반의 2분조에서 농장원으로 일하던 송봉순동무가 3분조에서 분조장사업을 시작한것은 지금으로부터 15년전이였다.

모내기전투를 하루 앞두고 당의 크나큰 신임에 의하여 분조장으로 임명된 그날 송봉순동무의 마음은 돌덩이를 안은듯 무거웠다. 분조장사업이 생소해서만이 아니였다.

사실 그때 3분조의 농사형편은 시원치 못하였다.

(내가 과연 분조농사를 추켜세울수 있을가?)

밤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그는 끝내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에게 속생각을 터놓고야말았다. 고향땅에 제대배낭을 풀어놓은 그날부터 수십년세월을 농장원으로 성실히 일해오고있는 아버지는 피를 나누어준 부모이기 전에 송봉순동무에게 농사일을 배워준 스승이기도 하였다. 남달리 꿈도 많고 포부도 컸던 송봉순동무가 1980년대 중엽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주저없이 농촌으로 달려나올수 있은것도 남달리 고향땅을 사랑했던 아버지를 떠나 생각할수 없었다.

아버지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있더니 불쑥 이런 말을 꺼내는것이였다.

《봉순아, 난 지금도 비내리는 궂은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동봉벌의 포전길을 걸으시던 우리 장군님의 모습을 잊을수가 없구나.》

주체89(2000)년 8월 머나먼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함주군 동봉협동농장을 찾으시여 농장이 나아갈 방향과 방도를 환히 밝혀주시였다.

그날 아버지는 동해안지대농사의 본보기를 마련하시려 동봉리의 포전길을 걷고 또 걸으시던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눈물겨운 헌신과 로고에 대하여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한평생 걸으신 포전길을 오늘은 우리 장군님께서 끊임없이 이어가신다고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구나. 위대한 장군님께서 더는 동해안지대의 농사때문에 마음쓰시지 않도록 우리 맡은 농사일을 더 잘하자꾸나.》

그날 밤 송봉순동무의 집에서는 오래도록 불빛이 꺼질줄 몰랐다.

(이 몸이 그대로 한줌 거름이 되여서라도 이 땅우에 해마다 풍년든 가을만을 안아오리라.)

고향땅에 위대한 수령님들의 념원을 꽃피우기 위해 설사 모래땅이 아니라 바위산이라고 해도 씨를 뿌리고 다수확을 이룩하려는것이 그때 송봉순동무의 가슴속에 간직된 굳은 신념이였다.

모내기를 제철에 끝내야 한다는것을 깊이 자각한 그는 낮과 밤이 따로 없이 뛰고 또 뛰였다. 농장원들은 그가 언제 일터로 나오고 언제 포전을 뜨는지 알지 못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뛰여다니는 그의 모습을 보며 3분조의 농장원들은 이제야 우리 분조가 진짜주인을 만났다고들 했다.

이런 노력끝에 분조가 모내기전투를 제 날자에 끝내게 되였지만 송봉순동무의 마음은 개운치 않았다. 모판자리에 아직도 많은 량의 벼모들이 남아있었던것이다. 모판에 모들을 과학적타산에 기초하여 붓지 못하고 주먹치기식으로 부은데 원인이 있었다. 모판자리에 모내기를 하여야겠는데 남은 벼모들을 그대로 갈아엎자니 송봉순동무는 자기의 살점을 떼여내는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찌기 동해안지대에서 농사를 과학기술적으로 짓지 못하는것을 가슴아파하시면서 비행기에 선진영농방법이 수록된 과학영화필림까지 실어보내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우리는 아직까지 주먹구구식으로 농사를 짓고있으니…)

주체농법을 풍년농사의 백과사전으로 새겨안고 동해안의 지대적특성에 맞게 농사를 착실하게 지을 결심이 송봉순동무의 마음속에 바위처럼 들어앉았다.

그날부터 그는 밤마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동해안의 농장들을 현지지도하시면서 주신 교시들을 수첩에다 또박또박 적어넣고 늘 몸에 품고다니며 펼쳐보군 하였다. 힘들 때에도 펼쳐보았고 어려운 문제가 제기될 때에도 그 수첩을 펼쳐보며 방도를 찾았다. 그러니 막히는것이 없었다.

그는 포전들의 지력을 높이기 위한 사업을 근기있게 내밀었다. 해마다 포전들에는 정보당 수십t의 질좋은 거름들이 덮이군 하였는데 해가 바뀔수록 그것은 하나의 두툼한 《지층》을 이루었다.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교시를 하나도 흘리지 않고 실천해가는 그의 일솜씨로 하여 분조의 포전들은 한해가 다르게 달라졌다.

랭해가 심한 동해지구에서 두벌농사, 세벌농사를 실속있게 할수 있는 방도도 그는 위대한 수령님과 어버이장군님의 교시와 주체농법에서 찾았다.

모든것을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이것은 그의 드팀없는 기준이였다.

어머니가 잘난 자식, 못난 자식을 탓하지 않듯이 송봉순동무는 농장의 모든 땅들을 자기 살붙이처럼 아끼고 사랑하였다.

송봉순동무가 분조장사업을 갓 시작하였을 때였다. 작업반에는 버림받다싶이 하는 1정보 되나마나한 땅이 있었다. 모래땅이다보니 가물철에는 갈라터지였고 장마철에는 옆에 있는 도랑에서 넘쳐난 물때문에 온통 물천지가 되군 하였다.

송봉순동무는 자기네 분조가 그 땅을 맡아 관리할것을 결심하였다. 분조원들이 공연히 고생을 사서 한다고 말하였지만 그는 긴말을 하지 않았다.

《모래땅이면 어떻고 수렁논이면 뭐라나요. 귀한 땅인데 어떻게 해서든 옥토로 만들어야지요.》

이렇게 말하며 남먼저 거름지게를 지고 나서는 그를 온 분조원들이 따라나섰다. 고생끝에 락이라고 그해 가을 그 땅에서는 팔뚝같은 강냉이이삭들이 달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때 송봉순동무가 하던 말을 분조원들은 오늘도 잊지 못한다.

《머나먼 현지지도길을 이어가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 이 강냉이이삭들을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위대한 장군님께서 우리 함흥땅을 지나시다가 풍년든 벌판을 바라보시며 어느 분조 포전이요 하고 물으시면 우리 분조 포전입니다 하고 떳떳이 말씀드리고싶은것이 나의 소원이예요.》

그는 늘 이런 간절한 소원을 가슴속깊이 안고 살았다.

랭해가 심하고 모래땅으로 되여있던 분조의 포전들, 거기에서 해마다 높은 알곡소출을 낼수 있은데는 고향땅에 당의 뜻을 꽃피우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쳐온 송봉순동무의 이런 노력이 뜨겁게 깃들어있었다.

 

정다운 부름-우리 분조장

 

송봉순동무에 대해 알기 위해 우리는 그의 분조원들은 물론 작업반의 다른 농장원들도 만나보았다. 사람들이 각각인것만큼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서로 달랐지만 이야기의 마감마다 하는 부탁은 하나같았다.

《우리 분조장동무를 널리 소개해주십시오.》

모든 성과와 성공에는 그것을 받쳐준 뿌리가 있고 헌신과 희생이 있기마련이다.

우리 분조장!

정다운 그 부름에 분조와 분조원들을 위해 사심없는 진정과 열정을 다 바쳐온 송봉순동무의 모습이 그대로 비껴있었다.

분조원들은 당의 농업정책을 함께 받들어가는 진정한 혁명동지이고 분조장은 분조원모두의 어머니가 되여야 한다. 이것이 송봉순동무의 분조장년한 10여년에 관통되여있는 인생관이였다.

한때 작업반의 다른 분조에는 부모들이 병으로 사망하고 동생과 함께 살고있는 한 처녀가 있었다. 송봉순동무는 이런 그를 자기가 돌봐줄것을 결심하고 분조에 데려왔다.

그는 분조원들과 달라붙어 집수리도 해주고 제손으로 마련한 부엌세간들도 안겨주면서 그가 안착된 마음으로 농사일을 해나가도록 이끌어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송봉순동무는 처녀가 이웃군의 끌끌한 총각과 일생을 같이하기로 약속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송봉순동무는 분조원들앞에서 말했다.

《분조는 한가정이예요. 온 마을이 들썩하게 그들의 결혼식을 잘해줍시다.》

온 농장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하던 날 송봉순동무가 한 말은 사람들의 가슴을 얼마나 울려주었던가.

우리 분조가 당중앙뜨락과 하나로 잇닿아있다고 생각하자. 우리 언제나 당중앙과 숨결을 같이하며 우리 분조를 당이 바라는 한식솔, 단합되고 전투력있는 집단으로 꾸려가자. …

송봉순동무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이런 신념이 고동치고있었다.

분조를 당중앙뜨락과 이어놓고 분조원들을 참된 애국자들로 키우기 위해 그는 밤길도 많이 걸었고 남모르는 속도 수없이 썩이였다.

오늘 작업반의 분조장으로 사업하고있는 리동무도 송봉순동무의 이런 노력에 의해 모범농장원, 농촌초급일군으로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조원들은 사흘 출근하고 사흘 결근하는 그를 《사흘아바이》라고 불렀다. 분조원들의 눈밖에 난 자기 모습이 민망스러워 한때 그는 자기를 다른 분조로 옮겨달라고 제기한적이 있었다.

분조원들은 말썽군인 그를 이번 기회에 분조명단에서 아예 제명해버리자고 하였다. 그때 송봉순동무는 분조원들에게 이렇게 절절히 말했다고 한다.

그도 우리 분조의 한성원인데 보내긴 어디로 보낸단 말인가. 잘못은 그를 더 잘 이끌어주지 못한 나에게 있다.

송봉순동무는 리동무가 맡은 농사일을 잘하도록 이끌어주었고 그의 집도 자주 찾아가 가족들의 생활을 따뜻이 돌봐주었다.

송봉순동무는 이렇게 수많은 농장원들을 교양하여 협동벌의 당당한 주인들로 내세웠고 분조를 한마음한뜻으로 뭉쳐진 단합되고 건전한 실농군집단으로 만들었다.

올해 농산제2작업반의 여러명의 농장원들이 함흥농업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준기사의 자격을 지니였다. 그들중의 대부분이 3분조의 농장원들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바로 여기에도 분조원들을 고향땅의 진정한 주인으로 키우려는 송봉순동무의 노력이 깃들어있다.

몇해전 신문에서 어느 단위의 수십명의 종업원들이 한날한시에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에 망라되였다는 소식을 알게 된 그는 자책되는바가 컸다.

그는 리당위원회와 토론하고 함흥농업대학을 찾아가 과학기술의 시대인 오늘 분조원들을 분조의 참된 주인들로 키워 내세우고싶은 자기의 심중을 터놓았다. 그의 진정에 감동이 된 대학에서는 작업반에 현지학습반을 조직해주었다.

그리하여 3분조의 농장원들만이 아닌 작업반의 다른 분조원들까지 대학생이 되는 경사가 났다.

그날 분조원들의 가슴에 꽃송이들을 달아주며 송봉순동무는 말하였다.

《내가 학부형구실을 잘하겠으니 많이 배우세요.》

로력이 긴장한 분조에서 한번에 여러명씩이나 대학공부를 시킨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송봉순동무는 후회를 몰랐다.

나날이 커가는 자식을 보는 어머니처럼 현지학습반에서 울려나오는 분조원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저도모르게 마음이 흥그러워졌다.

분조원모두를 과학농사의 주인으로 만들어 우리 당 농업정책의 적극적인 옹호자, 관철자로 만들자는것이 송봉순동무의 마음이였다.

언제인가 분조의 한 농장원이 평양에서 진행되는 어느 한 대회에 참가하게 되였을 때 송봉순동무는 그를 찾아가 치마저고리를 안겨주었다.

《동무야 우리 분조의 자랑인데 옷차림도 제일 멋있어야지요.》

후날에야 그 옷이 송봉순동무가 품들여 마련한 치마저고리였다는것을 안 농장원은 어머니같은 분조장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분조를 한식솔로, 분조장인 자기를 분조의 어머니로 생각하는 송봉순동무에게는 《나》라는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굶어도 좋고 입지 못해도 좋다, 그러나 우리 분조원들만 남부럽지 않게 내세우면 그만이라는것이 그의 진정이였다.

이런 그를 어찌 분조원들이 우리 분조장이라고 부르며 따르지 않을수 있으랴.

품들여 가꾼 농작물에서 알찬 열매가 무르익듯이 분조원들을 사랑과 진정으로 품어주고 이끌어주는 송봉순동무와 같은 견실하고 대바른 농촌초급일군들이 있기에 사회주의농촌진지가 더욱 굳건히 다져지는것이다.

 

*  *

 

우리 나라의 방방곡곡에는 애국농민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중에는 서해곡창지대의 다수확농민, 다수확분조장도 있고 동해안지대의 다수확작업반장, 다수확관리위원장도 있다. 사는 곳도, 가꾸어가는 포전도 서로 다르지만 그들의 가슴속에는 꼭같이 쌀로써 조국을 받들고 당을 옹위하려는 하나의 신념이 자리잡고있다.

송봉순동무가 지난 10여년간 이룩한 알곡생산수자도 귀중하다.

그러나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조건과 환경이 어떠하든 자기 초소를 사회주의수호전의 최전방초소로 여기고 기어이 당정책을 관철하려는 각오를 가지고 일할 때 값높은 삶을 누릴수 있다는것을 실천으로 보여준 그 고결한 충정에야 어이 비길수 있으랴.

하기에 우리 당은 공화국창건 70돐이 되는 뜻깊은 올해에 그를 사회주의애국공로자로 값높이 내세워준것이 아닌가.

글 및 사진 본사기자 정영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