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10월 14일 로동신문

 

모두다 사회주의애국공로자들처럼 살며 투쟁하자!

당의 보건정책을 충직하게 받들어가는 참된 당원

황해북도인민병원 안과 책임의사
김명월동무에 대한 이야기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보건일군은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고 돌보는것만큼 누구보다도 당에 충실하고 인민을 사랑하며 책임성과 기술실무적자질이 높아야 합니다.》

황해북도인민병원 안과 책임의사 김명월동무는 단발머리처녀시절부터 수십년세월 안과의사로 일해오면서 수많은 환자들에게 광명을 안겨준 오랜 의료일군이다.

인간에 대한 지극한 정성을 지니고 인민들에게 우리 나라 사회주의보건제도의 혜택이 더 잘 미치도록 하기 위하여 한생을 깡그리 바쳐가고있는 그의 헌신적인 삶은 당의 보건정책을 받들어가는 의료일군이라면,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의 당원이라면 어떤 책임감과 열정을 지녀야 하는가를 깊이 새겨주고있다.

 

의료일군, 그 부름속에

 

우리의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황해북도인민병원 안과의 어느 한 치료실에서부터 시작된다.

한 녀성의 눈을 검진하고난 김명월동무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한숨이 새여나왔다. 한창나이의 젊은 녀성이 백내장으로 앞을 전혀 보지 못하였던것이다.

《선생님, 고칠수 있겠지요?!》

애절한 기대를 안고 자기의 손을 더듬어잡는 그에게 어찌 다른 말을 할수 있으랴.

김명월동무는 애써 웃으며 그의 두손을 꼭 잡아주었다.

《일없어요. 인차 아들의 얼굴을 볼수 있을거예요.》

첫 수술이 진행된 후 다시는 앞을 보지 못할것 같았던 환자의 눈에 광명이 흘러들었다. 비록 시력이 정상수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자식의 얼굴을 어렴풋이나마 알아보고 기쁨에 눈물짓는 모습을 바라보느라니 김명월동무의 마음도 어느 정도 개운하였다.

그날 같은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고있는 남편인 현성린동무와 함께 나란히 퇴근길에 올랐던 김명월동무는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의 말속에는 앞 못 보던 환자의 눈을 띄워준데 대한 자부심이 어느 정도 깔려있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는 현성린동무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것이 아닌가.

이윽고 남편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난 당신이 완치시키지 못한 환자를 두고 기뻐할줄은 몰랐소.》

《…》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웠으나 김명월동무는 도저히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남편의 말대로 의사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것 같은 자책감이 자꾸만 갈마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김명월동무는 보건일군가정에서 나서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자주 김명월동무에게 우리 나라 사회주의보건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군 하였다. 그때 들은 이야기중에는 지금도 김명월동무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것이 있다.

주체49(1960)년 8월, 전국천리마작업반운동선구자대회에 참석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토론에 참가한 한 청년작업반장이 앞을 보지 못하는 사실을 두고 몹시 가슴아파하시면서 이 좋은 세상을 두고도 보지 못하는 맹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는가, 우리 나라에는 맹인들이 없어야 하며 따라서 맹인동맹도 없어야 한다고, 자신께서는 맹인동맹에서 무얼 제기해오면 가슴이 아프다고 절절히 교시하신것이였다.

이 이야기는 김명월동무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다. 하여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안과의사가 되였다. …

김명월동무는 조용히 일어나 위대한 수령님의 초상화를 우러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환자의 눈을 채 띄워주지 못했다는것을 아시면 얼마나 가슴아파하시였으랴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여지는듯 했다.

그날 김명월동무는 자신을 호되게 질책하며 새로운 결심을 다지였다.

그는 당시까지만 하여도 중앙병원에서만 하는것으로 되여있던 인공수정체이식수술방법을 대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 수술방법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언제까지나 백내장을 깨끗이 치료해낼수 없었다.

최고의 미세수술인 안과수술은 높은 의학지식에 기초한 섬세한 수술수기를 요구했다. 그는 자기의 치료경험을 보다 풍부히 하기 위해 중앙병원의 이름있는 안과의사들을 찾아가 그들의 적극적인 지도와 방조밑에 수술수기를 익혀나갔다.

낮에는 환자치료에 열중하고 밤에는 밤대로 짐승의 눈을 리용한 수백차의 모의수술을 거듭하느라 두눈은 충혈되고 입술은 항상 부르터있었다.

하지만 어버이수령님의 유훈을 받들어 인민의 눈을 지켜야 할 영예로운 과업을 지닌 의료일군이였기에 그에게는 쓰러질 권리도, 물러설 자리도 없었다.

이런 피타는 노력끝에 그는 마침내 인공수정체이식수술의 핵심기술을 터득하게 되였고 첫 수술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사람들이 정상시력을 되찾고 밝은 눈으로 위대한 수령님들의 초상화를 우러르며 만세를 부르고 눈물을 흘릴 때마다 김명월동무는 자기가 지켜선 초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자각하군 하였다.

(환자들은 광명을 찾는 그 순간 위대한 수령님들과 우리 당을 우러러 고마움과 감사의 눈물부터 흘린다. 그러니 내가 지켜선 초소는 수령과 인민의 혈맥을 하나로 더욱 굳건히 이어주는 가장 책임적이고 중요한 초소이며 당의 인민사랑을 그대로 전하여주는 곳이 아닌가.)

이런 마음을 안고 김명월동무는 오랜 세월 해마다 도안의 여러 시, 군들을 돌며 이동치료를 진행하여 수천명의 실명자들에게 광명을 안겨주었다.

언제인가 이동치료에 함께 참가했던 과의 젊은 의사가 자기들도 견디기 힘든 육체적부담을 무슨 힘으로 이겨내는지 놀랍기만 하다고 이야기한적이 있었다. 그때 김명월동무는 흐르는 땀방울을 씻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황해북도에는 단 한명의 실명자도 없다고 위대한 수령님들께 떳떳이 보고드리고싶은것이 나의 가장 큰 소원이예요.》

김명월동무는 바로 이런 불같은 충정과 열정을 지닌 참된 의료일군이였다. 그가 눈알압박기며 안과수술용관류흡입기 등을 자체로 창안제작하여 수술에 효과적으로 리용한것도 바로 이런 불타는 충정과 열정이 낳은 귀중한 성과였다.

그의 이런 헌신적인 모습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보건법》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보건일군은 전체 인민이 건강한 몸으로 사회주의건설에 적극 참가하게 하는 인간생명의 기사이며 영예로운 혁명가이다.》

 

참된 당원의 모습

 

김명월동무는 높은 실력과 지극한 정성을 지니고 안과의사로 일해오는 지난 30여년간 수많은 환자들에게 광명을 되찾아주었다.

환자들로부터 우리 의사선생님, 우리 어머니로 불리우는 김명월동무의 모습에서 우리는 전화의 나날 동지들을 위해 피와 살,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바친 화선간호원들의 모습을 가슴뜨겁게 안아보게 된다.

지난해 4월 어느날 병원으로는 중태에 빠진 2명의 청년이 실려왔다.

환자들은 뜻밖의 사고로 눈의 각막과 공막이 심히 파렬된데다가 눈알안에 많은 이물이 들어간것으로 하여 자칫하다가는 영영 실명될수 있었다.

그들의 상태를 보고는 누구도 선듯 나서기 저어하던 때에 김명월동무는 자진하여 이들의 담당의사가 되였다.

단순히 실력이 높아서, 경험이 풍부해서만이 아니였다. 그 시각 김명월동무는 그들에 대한 치료를 당적분공으로 받아들이였다. 그는 환자치료에 앞장서야 할 당세포위원장이였던것이다.

무려 6시간에 걸치는 1차 수술이 진행되였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지만 그들에 대한 치료에서는 아직 넘어야 할 많은 고비들이 남아있었다.

어느날 입원실에 들어선 김명월동무는 그대로 놓여있는 음식그릇들을 보며 생각이 많았다.

입맛을 잃은 이들에게는 어머니의 따뜻한 정과 사랑이 필요했다. 그는 그날부터 그들의 식사를 모두 자기가 보장할것을 결심하였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들이 입원해있는 240여일간 김명월동무는 그렇게 하루와 같이 구미에 맞는 음식들을 마련하느라 매일 밤을 새우군 하였다. 그 나날 때로는 퇴근하자마자 너무 힘겨워 그대로 주저앉고싶을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자기가 환자치료에만 전심할수 있도록 떠밀어주고 남새와 집짐승들을 정성다해 키워서는 모두 며느리가 담당한 환자들에게 안겨지도록 하던 시부모를 생각하며 힘을 가다듬군 하였다.

그의 시아버지 현길표로인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안영애영웅이 복무하던 사단군의소에서 군의로 싸운 전쟁로병이였다. 그는 김명월동무의 시아버지이기 전에 그에게 당의 참된 딸의 투쟁정신을 배워준 스승이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현길표로인이 들려주던 간호원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나 감동적이였던가.

적후천리 밀림속에서 생명이 위급한 동지에게 자기의 피를 서슴없이 수혈해주고 자기는 몇끼씩 굶으면서도 동지들의 식사만은 어김없이 보장하던 애젊은 간호원, 이른봄의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덮인 산판의 양지쪽을 돌고돌며 파릇파릇 돋아나는 산나물을 한잎두잎 뜯느라 빨갛게 얼어들던 영웅의 두손이 뜨거운 동지적사랑을 전해주며, 당원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주며 심장에 와닿는듯 했다.

김명월동무는 안영애영웅의 삶에 자기를 비추어보며 영웅처럼 참된 당원으로 살기 위해 매일, 매 순간 자신을 채찍질했다.

이렇듯 김명월동무의 눈물겨운 헌신과 불같은 정성에 의하여 환자들은 마침내 광명을 되찾았으며 자기 초소에 다시 설수 있게 되였다.

퇴원하는 날 김명월동무가 그들에게 안겨준것은 붉은 당원증주머니였다. 그들은 이제 얼마 안있어 당원의 영예를 지니게 되였던것이다.

하기에 깊은 뜻이 담겨진 당원증주머니에 조선로동당원증을 소중히 감싸안은 한 청년은 자기들의 입원치료기간은 광명을 되찾은 나날이기 전에 참된 당원이란 어떤 사람이였는가를 배운 귀중한 나날이였다고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후날 어떻게 되여 그들의 치료에 그렇게 선듯 나설수 있었는가고 묻는 과의 의사들에게 김명월동무는 흔연히 말하였다.

《나야 당세포위원장이 아닌가요.》

김명월동무를 사람들이 우리 의사선생님으로 따르는것은 비단 그의 의술이 높거나 환자에 대한 지극한 정성때문만이 아니였다.

언제인가 봉산군에 살고있는 한 녀성이 등에 고구마를 한짐 지고 병원을 찾아온적이 있었다.

그 녀성으로 말하면 김명월동무에 의해 몇해만에 다시 광명을 찾은 평범한 농장원이였다.

어떻게 하면 그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가 하고 생각을 거듭하던 그가 자기 집터밭에서 가꾼 첫물고구마를 안고 김명월동무를 찾아왔던것이였다.

그의 진정이 깃든것이였지만 김명월동무는 그것을 선듯 받을수 없었다. 환자들에게는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치면서도 그들한테는 티끌만 한 부담도 줘서는 안된다는것이 그의 신조였던것이다.

아무리 사양해도 막무가내로 고구마배낭을 안겨주는 그를 김명월동무는 병원의 조용한 휴식터로 이끌었다. 잠시후 김명월동무의 입가에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록의 한 대목이 흘러나왔다.

김형직선생님께서 중태에 빠졌던 한 불쌍한 아이의 병을 온갖 지성을 다하여 고쳐주셨을 때 그애의 큰아버지는 치료비로 돈 1원을 가져왔다고 한다. 선생님께서 사양하셨지만 막무가내인 그를 딱하게 바라보시던 강반석어머님께서는 그 돈을 받아 거리에 나가 당목 다섯자를 끊어 그 아이에게 안겨주시면서 집에 가거들랑 옷을 해입으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때 당목 한자에 35전씩이였으니 결국 환자가 내놓은 1원에 75전을 더 보태여 옷감을 끊어오신것이였다.

김명월동무의 이야기는 끝났으나 그 녀성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눈가에서는 그냥 뜨거운것이 줄줄이 흐르고있었다.

그러는 그를 다정히 바라보며 김명월동무는 이렇게 말하였다.

《동무의 눈은 내가 아니라 우리 당에서 띄워준거예요. 그러니 당이 준 밝은 눈으로 농사를 더 잘 짓는것으로 보답하세요.》

김명월동무의 진정에 감복된 그 녀성은 그후 농장에 돌아가 농사를 잘 지었다고 한다.

참으로 김명월동무는 한걸음한걸음을 오직 우리 당이 바라는 의료일군으로 살기 위해 애써온 참된 당원이다.

하기에 그는 환자들뿐아니라 과의 의사들속에서도 우리 당세포위원장으로 존경받고있다.

과성원들은 그가 과의 녀성영예군인의사인 오금주동무를 수년세월 친혈육의 심정으로 돌봐주고있는 사실을 깊은 감동속에 이야기하군 한다.

어찌 이뿐이랴.

눈병때문에 입원했던 황주중등학원 원아들과 맺은 인연을 잊지 못해 군에 이동치료를 나갈 때마다 꼭꼭 들려 그들의 건강과 생활을 따뜻이 돌봐준 이야기며 10여명의 전쟁로병들에게 광명을 되찾아주어 그들이 경애하는 원수님을 모신 영광의 대회장에 설수 있게 해준 이야기는 또 얼마나 사람들의 심금을 세차게 울려주는것인가.

김명월동무가 오랜 기간 수천명의 사람들에게 광명을 안겨준것도 귀중하다. 그러나 오직 어머니 우리 당이 바라는 참된 당원으로 살기 위해 자신을 초불처럼 깡그리 불태운 그의 삶은 우리 당원들과 의료일군들에게 어떤 량심과 열정으로 당을 받들어야 하는가를 실천적모범으로 보여주고있다.

 

*  *

 

김명월동무가 지난 30여년간 광명을 되찾아준 수천명의 사람들을 다시금 그려본다. 사람이 천냥이면 눈이 팔백냥이라는 말을 빌어 계산해볼 때 그 값은 수백만금을 헤아릴것이다.

허나 억만재부와도 바꾸지 못할 귀중한 인생의 진리를 김명월동무는 자기의 산 모범으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깊이깊이 새겨주었다.

인민을 위한 복무의 길에서 한몸이 그대로 모래알이 되여 뿌려진대도 더 바랄것이 없다는 고결한 인생관을 뼈속깊이 새긴 사람만이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아시고 인민이 사랑하는 당의 참된 전사로 값높은 삶을 누릴수 있다는것을.

글 및 사진 유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