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11월 2일 로동신문
한시도 늦출수 없고 한순간도 소홀히 두 대명사를 놓고 본 판이한 모습
우리 집, 우리 선생님, 우리 고향, 우리 작업반, 우리 조국… 아마도 이 땅에서는 모든 부름이 우리라는 두 글자와 련결되여있는것만 같다. 태여나 말을 익히고 글을 배울 때부터 우리라는 그 말은 누구에게나 생활의 한부분처럼 익숙되여있다. 우리라는 그 부름속에 기쁨도 행복도 영예도 있는 사회주의 우리 생활, 평범하면서도 벅차게 흐르는 그 생활의 갈피마다에는 얼마나 아름답고 진정넘친 모습들이 새겨지는것인가. 《 얼마전 락랑구역 충성고급중학교 교원인 김이철동무의 가정에서는 만사람의 축복속에 뜻깊은 결혼식이 있었다. 여섯 자식의 아버지인 그에게 있어서 벌써 세번째로 되는 자식의 결혼식이였다. 《아들딸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살아라.》 그의 목소리는 뜨거움에 젖어있었다. 김이철동무의 가슴속에는 과연 어떤 사연이 간직되여있는것인가.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당시)교단에 섰을 때는 온 나라가 허리띠를 조이던 고난의 행군시기였다. 학급을 담임한지 몇달이 지난 어느날 그는 뜻밖에 아버지를 잃은 한 학생의 집에 가게 되였다. 숨이 지는 순간까지 기대를 돌린 아버지를 그리며 눈물을 흘리는 세 자매, 그들에게는 이미 어머니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김이철동무는 그 애들의 모습이 그냥 눈앞에 밟혀와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마음속에 품고있던 생각을 부모앞에 터놓고야말았다. 애들을 맡아키우겠다는 아들의 절절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의 부모는 긴말없이 그 결심을 지지해주었다. 아들의 그 결심이 동정심이나 그 어떤 충동에서 굳어진것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우리 어머니의 가식없는 그 말은 그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었던가. 사실 그의 가정도 식솔이 적지 않았고 살림도 넉넉치 못했다. 더우기 세 아이의 아버지구실을 해야 할 그는 총각이였다. 세 자매를 품어안고 1년이 흘렀다. 어려운 때일수록 자기보다 나라를 먼저 위하며 무거운 짐을 선뜻 걸머지고 소문없이 먼길을 가는 김이철동무의 인간됨에 반하여 마음씨고운 한 처녀가 그의 반려자로 되였다. 어머니당의 고마움, 사회주의 우리 제도의 귀중함을 알게 된 자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조국보위초소로 탄원할 때면 김이철동무는 그들을 데리고 백두산으로 오르군 하였다. 20년전 그날에 벌써 총각아버지였던 김이철동무, 그는 온 가정과 함께 한마음으로 걸어온 그 길을 긍지높이 돌이켜보며 말했다. 《우리야 하나의 대가정이 아닙니까. 남의 불행, 남의 아픔이란 없는 우리 사회에서 제가 한 일은 평범하고 응당한것입니다.》 소문없이 좋은 일을 하고도 오히려 얼굴을 붉히는 그의 모습이 돋보일수록 언제인가 자본주의가 복귀된 동유럽의 어느 한 나라 출판물에 실렸던 글이 생각난다. 어느날 그 나라의 한 지방도시병원옆에 있는 공원에서 50대의 남자가 시체로 발견되였다. 그는 병원에 입원해있던 환자였다. 그의 병은 암이였다. 그런데 다행히 암이 조기에 발견되여 수술을 받고 퇴원하게 되였다. 환자는 기뻐하였다. 그러던 그가 왜 스스로 자기의 목을 매여 목숨을 끊었는가. 일은 이렇게 되였다. 그가 퇴원하게 된 날 자식들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남들이 보기에는 면회같았지만 그들이 안고온것은 상상밖의 《선물》이였다.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아무래도 암으로 죽을것은 뻔한데 죽기 전에 재산상속유서를 써달라고 하였다. 실로 기가 막히고 통분한 일이였다. 지금까지 자식들을 위해 모든것을 바쳐왔고 자식들에게 자기의 운명을 걸고있던 그였다. 그러한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죽음을 재촉한것이였다. 그는 더 살아야 자식들의 성화에 심장이 터질것만 같았다. 번민끝에 그는 자살을 결심했다. 혈육들사이의 관계가 이러할진대 남과 남사이의 관계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어느 한 자본주의나라에서 심한 태풍피해를 입었을 때였다. 태풍으로 여러 도시들에서 무정부상태가 조성되자 이때라고 생각한 많은 사람들이 살인과 강탈, 강간행위 등을 서슴없이 저질렀다고 한다. 그때 한 건물에는 세바퀴차에 앉은채 숨진 늙은이와 여러구의 시체가 있었지만 그곳에 피신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버려진 오물처럼 여기였다. 오죽하면 자본주의나라의 한 신문까지도 그때의 광경을 두고 《인간성이란 꼬물만큼도 찾아볼수 없는 랭혈동물들의 세계를 방불케 하였다.》고 개탄하였겠는가. 인간은 인간에 대하여 승냥이라는 강도적인 생활론리와 개인주의인생관이 만연된 자본주의사회에서 친혈육도 남이 되고 인간의 도의와 량심이 황페화되며 패륜패덕과 악행이 날을 따라 성행하는것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수 없는 필연이다. 이 세상에서 나를 제외한 그밖의 사람들은 남이며 필요없다, 나만 살면 그만이다, 나의 향락과 리기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는 야수의 생활륜리가 판을 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어떻게 나보다 우리를 위해, 자기보다 조국을 위해 피운 아름다운 꽃을 상상할수 있겠는가. 사회주의 우리 조국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때없이 하는 말 《우리》, 황금만능의 자본주의사회 어디서나 듣게 되는 말 《나》, 이 두 대명사를 놓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와 《나》에 비낀 판이한 두 모습, 이것은 온 나라가 화목한 대가정이 되여 집단주의의 위력으로 전진하는 사회주의와 극단한 개인주의에 빠져 미래도 희망도 없이 멸망에로 치닫는 자본주의의 뚜렷한 축도이라고. 본사기자 조향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