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11월 4일 로동신문

 

공화국력사에 뚜렷한 자욱을 남긴 지식인들

주체문학건설에 이바지한 작가 천세봉

 

우리 당의 위업을 사상과 신념의 붓대로 충직하게 받들어온 이름난 문필가들가운데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일찌기 정치적안목이 높고 생활체험이 풍부한 재능있는 작가라고 평가해주신 천세봉선생도 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수령의 옳은 지도를 받는 작가와 작품은 인민의 마음속에 영생하는 법입니다.》

천세봉선생은 1915년 함경남도 고원군의 빈농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렬했고 문학을 남달리 사랑해온 그였지만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야만 했던 비참한 처지는 쓰라린 고통과 설음만을 남기였다.

희망은 있어도 날아오를 창공이 없었고 꿈은 있어도 그것을 지켜줄 품이 없었기때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안아오신 조국해방의 봄빛과 더불어 비로소 천세봉선생의 희망은 활짝 꽃펴나게 되였다.

조국이 해방된 이듬해 장막희곡 《고향의 인상》을 첫 작품으로 내놓은 천세봉선생은 그후 소설창작에 전념하여 1960년대까지 단편소설 《령로》(고개길), 《땅의 서곡》, 중편소설 《싸우는 마을사람들》, 장편소설 《석개울의 새봄》, 《대하는 흐른다》를 비롯한 수많은 농촌생활주제의 소설들을 창작하였다.

사람들속에 농민작가로 알려져있던 천세봉선생이 생의 후반기에 주체적인 혁명문학건설에 이바지하는 많은 혁명소설들을 훌륭히 써낼수 있었던것은 위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믿음과 세심한 가르치심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천세봉선생의 혁명적열의와 창작적재능을 귀중히 여기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어버이수령님을 형상한 소설을 쓰는데서 한몫 단단히 하여야 한다는 크나큰 믿음도 안겨주시고 수령형상문학건설에서 나서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천재적인 문예사상리론과 비범한 령도, 뜨거운 사랑과 믿음이 있었기에 천세봉선생은 총서 《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혁명의 려명》, 《은하수》를 비롯한 여러편의 혁명소설들을 기념비적명작으로 훌륭히 써내고 혁명문학발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데 적극 이바지할수 있었다.

천세봉선생은 당의 크나큰 믿음속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원으로 사업하였고 오랜 기간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였으며 김일성훈장수훈자, 김일성상계관인으로 값높은 삶을 누리였다.

천세봉선생은 일생토록 새벽 2시부터 5시까지를 글쓰기에 제일 좋은 금같은 시간으로 여기군 했는데 글줄이 쏟아져나올 땐 앉은 자세가 점점 높아져 반쯤 일어서서 글을 썼다고 한다.

오랜 창작활동과정에 쌓인 육체적과로로 하여 그의 하반신은 거의나 마비되였으며 걸음을 걷다가도 갑자기 주저앉는 때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천세봉선생은 겹쳐드는 병마로 하여 기울어지는 펜대를 초인간적인 의지로 일으켜세우면서 위대한 수령님을 열렬히 흠모하고 끝까지 따르려는 우리 인민의 충정의 마음을 깊이있게 그린 장편소설 《축원》을 비롯한 많은 소설작품들을 창작하였으며 자서전적인 장편수기 《작가수업 40년》을 완성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위대한 스승의 손길아래 인민의 사랑을 받는 재능있는 작가로서 한생을 빛내여온 천세봉선생은 림종을 앞두고 자기의 수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70이 넘는 나의 인생행로를 통해 한 나라, 한 민족의 흥망성쇠의 비결은 령도자에 의하여 결정된다는것을 심장으로 깨달았다.…우리 인민의 운명이시고 민족만대의 어버이이시며 문학예술의 천재이신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를 위대한 령도자로 모시고 그이의 지도를 받으면서 글을 쓰는 조선의 작가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들이다.》

본사기자 김성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