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11월 25일 로동신문
민족의 자랑 조선의 국견-풍산개(1)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백두산을 조종의 산으로 일러왔으며 슬기롭고 용감하며 순결하고 강의한 민족의 넋과 기상도 다름아닌 백두산에서 태여났다고 하였다. 령리하고 이악하며 용맹하고 민첩한것으로 널리 알려진 조선의 국견 풍산개도 백두산과 잇닿아있는 북부고산지대에서 나왔다. 오랜 세월 우리 인민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단군민족의 력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조선고유의 토종개인 풍산개는
《자기의것을 아끼고 사랑하고 내세울줄 모르며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참다운 애국자로 될수 없습니다.》 풍산개에 대한 취재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먼저 찾은 곳은 사리원시였다.거기에 오래동안 국견을 연구하여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있는 유명한 과학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때문이였다. 농업연구원 축산학연구소에서 우리는 소장인 옥진영동무를 만났다.풍산개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풍산개에 대한 사진자료들부터 꺼내여 하나하나 보여주며 이렇게 말꼭지를 떼였다. 《풍산개야말로 우리 민족의 자랑입니다.백두산의 흰눈과도 같이 희디흰 몸색갈은 정말이지 단일민족의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을 상징하는것 같습니다.정기도는 두눈과 곧추 세운 두귀만 보아도 대뜸 용맹한 기상을 느낄수 있습니다.유연하고도 탄력있고 무게있으면서도 균형잡힌 풍산개의 모습을 보느라면 언제나 대바르고 용감하며 담차고 날랜 조선사람의 기질을 그대로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전문가다운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선조들이 어떻게 풍산개의 시조로 되는 조선토종개를 길들여왔고 그와 더불어 어떤 문화를 창조하였는가에 대하여서도 더 자세히 알고싶은 호기심을 누를수 없었다. 조선토종개의 기원과 그후의 변천과정에 대하여 설명하는 소장의 이야기는 우리를 태고적의 세계에로 이끌어갔다. 그는 이 땅에 원시림이 울창하던 아득히 먼 옛날의 시대적환경을 방불히 볼수 있게 하는 여러가지 다매체편집물을 콤퓨터로 보여주면서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개는 늑대로부터 진화되였다고 한다. 세계5대문화의 하나인 대동강문화가 창조된 이 땅에서 조선옛류형사람들은 끊임없는 생존활동을 벌리는 과정에 수많은 야생동물들중에서도 예민한 후각과 청각, 뛰여난 밤시력을 가진 늑대를 사냥과 자기 집단의 보호에 리용하기 위해 점차 집짐승으로 길들이기 시작하였다는것이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화면을 보니 모든것이 선명하게 안겨왔다. 콤퓨터화면에는 구석기시대후기에 원시개가 형성되고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그 개들이 집짐승으로 되여 조선토종개의 시조를 이루게 되는 전과정에 대한 자료가 구체적으로 현시되고있었다. 《고조선시기에 이르러 개들은 사람들의 생활 이모저모에 적극 리용되였습니다.상무기풍이 높았던 고구려시기 나라에서는 해마다 사냥경기를 크게 하였는데 이때마다 사냥개들이 범이나 사슴, 메돼지들을 쫓아 단단히 한몫하군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선조들은 일찍부터 우리 나라의 토종개들가운데서 사냥개로 될만 한 개들을 골라 훈련을 주는 방법으로 키워왔는데 그것들중에서도 엄혹한 북부산간지대의 자연지리적조건속에서 살아온 개가 바로 오늘날 조선의 국견으로 세상에 그 이름이 자자한 풍산개(KOREAN PHUNGSAN DOG)라고 하였다. 잠시후 콤퓨터의 화면에는 두개의 사진자료가 대비적으로 나란히 현시되였다.하나는 고분에서 나온 부장용개조각이였고 다른 하나는 오늘날의 풍산개의 모습이였다.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고조선말기 평양지역의 고분에서 발굴된 부장용개조각의 형상이 두귀가 곧추 서고 꼬리가 한쪽우로 말려올라간 오늘날의 풍산개의 모습과 비슷한것으로 미루어보아 풍산개의 시조가 그때에 벌써 형성된것으로 보아진다고 말하였다. 이윽하여 그는 풍산개가 세계의 개품종형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것을 립증해주는 객관적인 자료들도 보여주었다. 개의 품종과 계통관계를 연구하는 여러 나라의 많은 학자들이 풍산개형개품종들이 적어도 5천년동안 동북아시아의 전지역에서 진화과정을 거쳤다는것을 밝힌 자료,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풍부한 자연부원에 의거하여 경제와 문화를 급속히 발전시켜온 고구려가 동족의 나라인 백제, 신라, 가야는 물론이고 바다건너 일본에도 커다란 정치, 경제, 문화적영향을 주었다는 자료 등이 무척 우리의 흥미를 끌었다. 그 자료들중에는 어느 한 나라의 교수가 자기의 연구결과에 기초하여 과거에 조선사람들과 조선개가 일본에 많이 건너가 조선개와 일본개사이의 광범한 섞붙임이 이루어졌으므로 조선이 일본의 이름난 개품종들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 내용도 있었다. 풍산개들이 점차 사람들의 류동을 따라 우리 나라 남쪽지역에로도 이동하였다고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처럼 풍산개는 수천년전부터 우리 나라 북부지방과 중국의 동북일대에 토착하여 살고있던 전형적인 사냥개이며 우리 나라의 전반지역과 일본에서 풍산개형개품종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구석기시대유적인 석장리유적과 신석기시대후기 유적인 농포리유적에서 나온 개조각품들에 대하여 그리고 여러 사람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당기며 호랑이와 사슴 등을 사냥하는데 그앞에서 기세차게 짐승들을 몰아가고있는 사냥개의 모습이 그려져있는 4세기 말엽~5세기 초엽의 고구려사냥그림을 비롯하여 세나라시기 고구려무덤벽화들과 그 이후시기의 여러 미술작품들에 그려진 개들의 형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이것만 보아도 선조들이 창조한 문화의 령역에 개가 지울수 없는 자취를 남기였다는것을 충분히 느낄수 있다고 하였다. 고려시기 문인이였던 최자의 저서 《보한집》에 기록된 개가 뜻밖에 산불이 났을 때 술에 취하여 잠든 주인을 구원하고 숨진 이야기, 고려시기 경성지방의 어느 한 흰개가 부모를 잃은 눈먼 아이를 밥먹으러 갈 때도, 물을 마시러 우물로 갈 때도 길안내를 해주면서 돌봐주어 의견이라고 일러온 이야기, 토산지역에 사는 어느 한 농사군가정의 안해가 강물에 떠내려가는것을 구원하고 죽은 흰개에 대한 이야기 등 의로운 개에 대한 설화들과 그렇듯 충실한 개들에게 선조들이 충견문과 의견비를 세워주었다는 자료도 아주 인상적이였다. 선조들이 개와 관련하여 남긴 수많은 미술유산, 문학유산들에 대한 통속적인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풍산개를 그 어느 동물보다도 애호하고 자기들의 생활에 적극 리용해온 당시 사람들의 생활세태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되였다. 조선토종개의 기원과 그후의 변천과정에 대한 자료들을 보여주며 구수하게 이야기를 펴나가던 옥진영소장은 그런 풍산개가 홍범도의병대를 도와 후치령싸움에서 용맹을 떨쳤다고, 그러나 그 이후 일제의 략탈책동으로 말미암아 멸종의 위기에 처하게 되였다고 하면서 격한 심정을 금치 못해하였다. 《1930년대 후반기에 사초평저수지공사장에서 일어난 로동자들의 파업을 계기로 풍산개의 용맹하고 이악한 기질을 더 잘 알게 된 일제는 풍산개를 략탈해가기 위해 미쳐날뛰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되였다. 우리 나라의 풍부한 자연부원과 문화유산들을 닥치는대로 강탈해가던 일제는 세계에 이름난 우리의 토종개자원을 말살하기 위하여 참으로 악착한짓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일제가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일본군의 겨울철 추위막이용털가죽제품을 생산한다고 하면서 우수한 토종개들을 닥치는대로 략탈해갔으며 미친개병을 막는다는 구실밑에 수많은 개들을 마구 잡아죽이였다는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는 일제가 1934년 《일본개보존회》를 조직하고 일본개표준에 립각한 심사규정에 따라 우리 나라 토종개들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등록을 진행하여 우리의 풍산개자원을 깡그리 빼앗아가려고 책동한 자료, 풍산개가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면서 부산에 있던 일본상인들이 이 개를 사가는데 저저마다 열을 올렸다는 자료, 바다건너 일본으로 실려가는 풍산개의 모습이 찍힌 사진 등을 보여주었다. 민족의 운명과 함께 멸종의 위기에 처하였던 풍산개는 풍산개가 일제놈들에 의하여 많이 없어지고 잡종화된것을 누구보다 가슴아파하신 그리하여 주체45(1956)년 4월 풍산개는 국가천연기념물로 등록되였다. 주체47(1958)년 5월 량강도를 현지지도하시던 주체52(1963)년 8월에도 김형권군(이전의 풍산군)을 현지지도하시던 이때 주체65(1976)년 7월 또다시 김형권군을 찾으신 민족의 재부를 그토록 귀중히 여기시는 주인에게는 철저히 순종하지만 사냥할 때에는 적수와의 싸움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으며 생활력 또한 매우 강한것으로 하여 사냥개와 경비개로서는 최고로 손꼽힌다는 풍산개,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며 도덕의리를 귀중히 여기는 우리 민족의 기질을 닮아 홍범도의병대가 후치령싸움을 할 때에도 용맹을 떨쳤건만 나라없던 그 세월에는 민족과 함께 수난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던 풍산개의 력사를 더듬어볼수록 우리에게는 새삼스럽게 되새겨지는것이 있었다. 그것은 나라를 잃으면 민족이 자랑하는 풍산개와 같은 자연유산마저도 지켜낼수 없다는 력사의 진리였다. 본사기자 백성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