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11월 22일 로동신문
력사의 갈피에서 《뽀쬼낀》호 해병폭동
1905년 1월 9일 로씨야의 짜리반동정부는 무력을 동원하여 평화적시위에 나선 로동자들과 시민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운 이 사건은 로씨야에서 혁명의 발단으로 되였다.온 나라의 도시들에서 사람들이 《전제제도를 타도하라!》는 구호를 들고 떨쳐나섰다.이것은 짜리전제제도유지의 기둥이였던 군대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05년 6월 오데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박하고있던 흑해함대소속 전투함 《뽀쬼낀》호에서 해병들의 폭동이 일어났다.볼쉐비크지하조직의 지도밑에 가을에 단행하기로 계획되여있었지만 악질장교들이 변질된 국을 먹으라고 강요한것이 해병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던것이다.함장을 비롯한 일부 장교들이 처단되고 기타는 체포되였다. 군함에는 붉은기가 게양되고 구축함 267호가 《뽀쬼낀》호에 합류되였다. 《뽀쬼낀》호는 로동자들의 총파업이 단행되고있는 오데싸로 갔다.그러나 오데싸로동자들과의 공동투쟁은 실현되지 못하였다.오데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그곳 볼쉐비크조직이 약화되였기때문이였다. 또한 《뽀쬼낀》호에는 멘쉐비크와 에쎄르, 무정부주의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으므로 함선에 대한 통일적인 지도를 할수 없었다.더우기 함선위원회 위원장자체가 확고한 정치적신념과 혁명투쟁경험이 없고 우유부단하였으며 함선위원회가 임명한 함장마저도 배신자였다. 이로부터 《뽀쬼낀》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수 없었으며 시련을 겪게 되였다. 《뽀쬼낀》호 해병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짜리정부는 전체 흑해함대를 출동시켰다.《뽀쬼낀》호가 항복하지 않는 경우 격침시키라는 명령이 하달되였다.명령은 집행되지 않았다.많은 해병들이 《뽀쬼낀》호에 발포하는것을 거절하였다.오히려 전투함 《게오르기야 뽀베도노쎄짜》호가 《뽀쬼낀》호에 합류하였다.그것은 《뽀쬼낀》호 해병들의 사기를 높여주었다.하지만 《게오르기야 뽀베도노쎄짜》호의 해병들은 반혁명적선동에 넘어가 혁명투쟁에 참가하는것을 거절하였다.이 기회를 리용하여 지방군사정권이 이 전투함선을 점거하였는데 이것은 《뽀쬼낀》호의 일부 해병들속에서 동요가 일어나게 하였다. 석탄과 식량이 떨어지게 되자 《뽀쬼낀》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로므니아의 한 항구에 들어갔다. 당시의 력사적사실에 대하여 오데싸의 한 해설원은 이렇게 말하였다. 《외국망명중에 있던 레닌은 〈뽀쬼낀〉호 해병들의 폭동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자기의 전우를 급히 오데싸로 파견하였다.그러나 그때는 이미 〈뽀쬼낀〉호가 로므니아로 떠난 뒤였다.》 로므니아에서 석탄과 식량을 구하지 못한 《뽀쬼낀》호는 크림반도로 갔으나 거기에서도 물자를 보급받지 못하여 투쟁을 계속할 가능성을 잃게 되였다.다시 로므니아로 간 《뽀쬼낀》호는 이 나라 당국에 항복하였다. 《뽀쬼낀》호 해병폭동은 실패하였지만 짜리군대에서의 첫 대중적인 혁명적진출이라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한 전문가는 이렇게 말하였다. 《〈뽀쬼낀〉호 해병폭동을 통하여 찾게 되는 교훈은 혁명적당의 통일적인 지도가 보장되지 못하고 투쟁에 궐기해나선 사람들의 혁명적신념이 투철하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결심과 그 실현을 위한 노력도 빛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것이다.》 본사기자 손소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