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10월 26일 로동신문
모두다 사회주의애국공로자들처럼 살며 투쟁하자! 불같은 충정과 헌신으로 당의 령도 인민봉사총국 력포목장 제1분장
《진정으로 애국을 하려면 애국의 마음을 가지고 애국적인 행동을 하여야 합니다. 애국은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이고 투신입니다.》 인민봉사총국 력포목장 제1분장 분장장 렴주복동무는 수도시민들의 식생활향상을 두고 그토록 마음쓰신 오늘 우리 당은 령도업적단위 일군들이 당에서 바라는 일은 죽으나사나 최상의 수준에서 무조건 해내고야마는 완강한 실천가, 실력가형의 일군, 애국자로 불리우는 렴주복동무의 삶은
간절한 소원안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 누구나 그러하듯이 렴주복동무의 하루하루도 우리가 분장을 찾은 이튿날 새벽에도 그는 로동자시절부터 수십년을 이어온 그 일과를 드티지 않았다. 《지금도 언제나 우리가 분장을 찾았을 때 그가 처음으로 한 말도 《우리 분장의 창립일은 1954년 4월 15일입니다.》였다. 그때 일을 돌이켜보며 부문당위원장 박순익동무는 신임분장장의 첫 사업은 종업원들의 가슴마다에 그 나날에 있었던 일들가운데서 박순익동무는 한가지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언제인가 어느날 한 종업원이 터실터실해진 미장면을 두고 마음쓰며 밤늦도록 재작업을 하는 렴주복동무에게 돼지우리인데 그렇게까지 정성을 다하는가고 말한적이 있었다. 그날 작업이 끝난 후 렴주복동무는 그 종업원을 돼지호동앞으로 이끌어갔다. 《 《우리가 하는 일이 단순히 생산문화를 위한 사업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되오. 령도업적단위의 종업원들이 하는 일은 사적지관리원들이 하는 일과 같다고 볼수 있지 않을가.》 그날 그 종업원은 분장장의 말을 들으며 한해전 사적건물주변에 감나무를 옮겨심던 때의 일을 떠올렸다고 한다. 유난히도 따스한 봄날 분장에 새로 들어온 한 종업원이 한그루의 감나무를 심어도 뿌리 하나 상할세라, 잔돌 하나 섞일세라 무던히도 마음을 쓰며 정성을 고이는 렴주복동무에게 감나무는 이런 좋은 땅에서는 잘 자라니 그렇게까지 품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였다. 그때 렴주복동무는 우린 지금 감나무만 심는것이 아니라고, 영광의 일터를 빛내여가려는 우리 분장종업원들의 마음을 함께 심는것이라고 절절하게 이야기하였다. 돼지호동의 미장면 하나에도, 분장구내에 심는 한그루 과일나무에도 정성을 기울이는 렴주복동무의 마음에 떠받들리여 분장은 나날이 자기의 모습을 일신하였으며 수많은 나무들과 꽃관목들이 설레이는 공원속의 일터로 되였다. 몇해전 분장에서 도로포장공사가 진행될 때였다. 모래가 바른 고장이라 렴주복동무는 공사 첫날부터 모래채취장에서 살다싶이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볼일이 있어 분장에 달려갔다온 그는 대형삽차가 본래위치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하고있는것을 보게 되였다. 모래가 다 떨어져 자리를 옮긴것이였다. 아무 말없이 삽차바가지에 가득 담긴 모래를 한줌 손에 들고 들여다보던 그는 분장으로 떠나려고 하는 화물자동차들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모래를 다시 부리기요. 질이 나빠 안되겠소.》 그러는 그를 맹랑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삽차운전수가 도로포장을 할 모래라고 하지 않았는가고 물었을 때였다. 《그렇소. 그날부터 렴주복동무는 모래운반전투가 진행된 여러날동안을 삽차운전칸에서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분장의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양어장의 조약돌 하나에도 이런 불같은 충정과 헌신이 깃들어있다. 먼동이 터오는 이른새벽 내리는 이슬을 고스란히 맞으며 혁명사적표식비앞에 숭엄히 서있던 렴주복동무의 모습이 아직도 우리 눈에 생생하다. 우리는 렴주복동무의 고결한 모습에서, 그가 새겨온 충정의 발자국마다에서 우리 인민이 심장속에 안고 사는 글발을 다시금 깊이 새기게 된다.
충정으로 불타는 심장
단위의 모든 사업이 그 나날에 언제나 만족을 모르고 끊임없이 혁신의 길을 줄달음친 렴주복동무였다. 지금은 24개나 되는 돼지호동들이 훌륭히 꾸려지고 해마다 많은 고기를 생산하고있지만 그가 분장장일을 시작했을 때까지만 해도 분장의 축산토대는 그쯘하지 못했다. 당시 고기생산계획은 수행하고있었으나 분장의 돼지우리들과 여러동의 보조건물들이 개방식으로 산만하게 널려있었다. 고기생산을 집약화, 공업화하여야 한다고 하신 수도시민들을 위한 고기생산의 많은 몫을 차지하는 중요한 목장에서 일하는 남다른 긍지와 책임감은 그로 하여금 잠도 잊게 했고 남들이 걸을 때 늘 뛰여다니는 열정의 인간으로 만들었다. 룡강의 화강석광산으로, 벽돌공장으로, 축산을 잘하기로 소문난 목장으로… 이렇게 뛰여다니며 배운 경험으로 그는 덩지가 큰 새 돼지호동들을 련이어 일떠세웠다. 그리고는 여기서 중시한것은 과학기술의 힘이였다. 분장장인 자기부터가 대중적기술혁신운동의 앞장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끊임없는 사색과 노력으로 종축체계를 바로세우고 돼지종자를 자체로 개량하여 수천마리의 새끼돼지를 생산하였으며 돼지의 증체률을 6개월령에 100kg이상 높이기 위한 생산조직과 지휘를 짜고들어 해마다 고기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이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고기생산성이 떨어지는 겨울철먹이보장을 위해 수백t능력의 풀절임탕크와 무우저장탕크, 강냉이저장고와 100여㎡의 사료절임창고 등을 대담하게 건설해놓음으로써 먹이보장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였다. 종업원들의 말에 의하면 돼지의 과학적인 사양관리에서도 분장장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한다. 언제인가 렴주복동무가 기술학습에 강사로 참가하여 앞선 단위의 경험에 대해 토론한적이 있었는데 그날의 기술학습이 참 인상적이였다고 사양공들은 한결같이 말하였다. 기술학습의 내용은 젖먹는 시기 새끼돼지사양관리방법이였다. 그날 사양공들은 분장장과 함께 포유사에서 기술학습내용을 다시금 복습하고서야 퇴근길에 올랐다. 평시에는 무뚝뚝하지만 새끼돼지를 다룰 때에는
어린 자식에게 정을 기울이는 다심한 어머니와도 같다는것이 사양공들의 말이였다. 그 모습에서 종업원들은 렴주복동무는 국가수의방역학적요구에 맞게 분장에 수의방역시설들도 충분히 갖추어놓고 그 관리운영사업도 잘하고있다. 이렇게 축산업발전의 4대고리를 확고히 틀어쥐고 사업하니 축산토대는 나날이 그쯘해지고 분장에는 그 경험을 배우러 다른 단위에서 찾아오게 되였다. 하지만 렴주복동무는 만족을 모른다. 한평생 인민을 위해 멀고 험한 현지지도의 길을 끊임없이 이어가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고 해도 절대로 주저하지 않고 무조건 끝장을 보고야마는 완강한 기질은 분장이 해마다 눈부신 성과를 이룩하게 한 또 하나의 비결이였다. 그는 생산의 직접적담당자인 종업원들의 생활에서도 큰 전진을 가져오기 위해 헌신하고 또 헌신하였다. 당의 령도업적이 깃들어있는 일터의
종업원들은 생산에서뿐아니라 생활에서도 그 어느 단위보다 모범이여야 한다는것이 그의 생각이였다. 그는 언제나 종업원들을 아래사람으로가 아니라 분장에는 김영심이라는 종업원이 있는데 그의 세 남매는 한때 분장장의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들의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렴주복동무는 너희들의 부모는 우리 분장종업원들이였다, 그러니 너희들의 아버지는 마땅히 내가 되여야 한다고 하면서 그들을 맡아안았다. 그후 렴주복동무의 진정속에 김영심동무는 분장의 끌끌한 제대군인총각과 가정을 이루었다. 그때 렴주복동무는 그들을 위해 분장자체의 힘으로 덩실한 새 집을 지어주고 앞장서서 새살림에 필요한 가정용품들도 갖추어주었다. 렴주복동무는 지난해에 100세대의 종업원살림집들을 번듯하게 일떠세웠다고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종업원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라는것도 바로 이런 불같은 충정이 분장을 생산에서도, 생산문화, 생활문화확립과 종업원들에 대한 후방공급사업에서도 당당히 앞자리를 차지하는 힘있는 단위로 비약시킬수 있게 하였다. 그들이라고 남들보다 조건이 좋은것은 아니였다. 오직 제힘을 믿고 자체의 힘으로 자나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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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그 어디에나 글 및 사진 본사기자 리경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