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12월 9일 로동신문

 

순결한 혁명적량심으로 한생을 빛내인 당의 참된 문예전사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연출가였던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 인민예술가 박정주동지에 대한 이야기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혁명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사회와 집단, 조국과 인민의 요구와 리익을 먼저 생각하고 귀중히 여기며 당과 수령의 믿음과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살며 일하려는 혁명적량심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삶은 위대한 수령의 령도를 따라 인민대중의 자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는 혁명가들의 생이다.백두에서 개척된 우리 혁명은 바로 그런 아름답고 영웅적인 인간들의 고귀한 생과 더불어 더욱 활력에 넘쳐 승승장구하는것이다.

우리가 오늘 이야기하려고 하는 박정주동지는 지난 50여년간 영화연출가로서 당의 문예사상을 견결히 옹호고수하고 주체영화예술의 발전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바쳐온 충직한 문예전사이다.

당에 대한 충정과 티없이 맑고 깨끗한 량심을 소중히 간직하고 변함없이 지켜온 그의 한생은 혁명가의 아름답고 숭고한 정신도덕적풍모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있는가에 대한 또 하나의 대답으로 될것이다.

 

원수님께 기쁨드릴 그날까지

 

지난 10월 3일부 《로동신문》 1면에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연출가였던 박정주동지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하여 고인의 령전에 화환을 보내신 소식이 실리여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커다란 격정으로 휩싸이게 하였다.

당시 련일 성황리에 진행되고있던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의 마지막부분에 자막으로 나오는 창작가들의 이름가운데서 《3차원화상처리 로력영웅 인민예술가 박정주》라는 글발을 누구나 보았을것이다.관록있는 영화연출가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의 창조성원으로 된 사실앞에서 반가움을 느낀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박정주동지가 어떻게 자기의 생을 이 작품과 함께 빛나게 마감하였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못하다.

우리는 3차원화상창작에 참가했던 성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150여일간에 걸치는 박정주동지의 마지막창작나날에 대하여 알게 되였다.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에 첨단과학기술에 의한 형상수법들을 도입할데 대하여 주신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말씀을 받아안고 3차원화상창작가들이 모여온것은 지난 5월초였다.대다수가 젊은 사람들이였다.굴지의 창작기지들에서 모여온 그들가운데서 박정주동지는 제일 나이도 많고 년한도 오랜 창작가였다.

늙은이에게 있어서 젊은이는 해빛과 같다고 한다.우리는 그렇듯 젊고 혈기왕성한 창작가들속에서 흘러간 박정주동지의 창작생활이 랑만적이지 않았을가 하고도 생각했다.하지만 국립연극단 연출가를 비롯한 창작가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생각을 한순간에 부정해버리였다.

《박정주동지는 젊은 사람들도 미처 따라가기 어려울만큼 완강한 창조정신으로 우리 창작가들을 언제나 각성시키고 힘과 용기를 안겨주군 한 열정적인 예술가였습니다.》

우리 조국의 빛나는 70년 력사를 담고있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에 그 사상주제적무게와 예술적풍격에 어울리게 3차원화상들을 창작하여 내놓는다는것은 오랜 예술가인 박정주동지에게 있어서도 생소하고 아름찬 일이 아닐수 없었다.더우기 우리 나라에서 진행되는 예술행사에 처음으로 대형3차원화상투영방법이 도입되는것으로 하여 창조집단은 개척의 어려운 사명도 지니고있었다.그러나 당이 바라고 조국이 요구하는것이라면 언제 한번 불가능을 론하거나 머뭇거린적이 없는 그였다.

창작전투는 작품의 서장 《해솟는 백두산》의 화면형상에서부터 열띠게 벌어졌다.어떻게 하면 우리 조국의 찬란한 아침이 밝아온 조종의 산 백두산을 웅건장중하면서도 뜻깊은 형상으로 보여줄것인가를 놓고 수십차례의 창작토론회가 진행되였다.여러가지 형상안중에서 백두산의 룡권현상을 대담하게 화폭에 반영하자는 박정주동지의 착상이 모두의 지지를 받게 되였다.천지의 물이 통채로 하늘에 치솟아오르는듯 한 거대한 룡권과 그에 뒤이어 붉게 타는 아침노을이 백두산의 장엄함과 신비함을 한껏 돋구어주며 관중의 심금을 완전히 틀어잡은 화폭으로 완성되게 된데는 이렇게 당이 안겨준 백두의 혁명정신으로 언제나 심장을 불태운 박정주동지의 노력도 깃들어있다.

위대한 장군님의 슬하에서 당이 벽을 울리면 강산을 뒤흔드는 혁명방식을 배우며 성장한 로연출가의 관록은 역시 남달랐다.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 공연시작전에 국기게양의식을 의의있게 진행하도록 할데 대한 과업을 주시면 그는 남녀국기게양수들이 대형공화국기를 받쳐들고 걸어가는 경기장바닥에 《1948》, 《2018》이라는 수자들을 새긴 푸른 주단을 화면으로 펼쳐놓아 공화국의 성스러운 70년 력사가 무게있게 안겨오게 하자는 기발한 의견을 내놓았다.그리고 건설의 대번영기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기념비적건축물들을 낮은 층에서부터 솟구쳐오르는 과정으로 형상하여 신화적인 건설속도와 조국의 변천상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하였다.레루우를 달리던 렬차가 군사분계선표말앞에 멈춰서서 기적소리를 길게 울리는 조국통일장의 한 장면에서도 그는 전체 관중이 그대로 기관차에 올라 시창앞을 바라보는듯 한 화면형상으로 겨레의 아픔을 더욱 깊이 새겨주자는 의견을 내놓는 등 영화연출가다운 솜씨를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작품창조에서 박정주동지가 받은 과업은 이렇게 구체적인 장면형상안을 내놓는것이였다.하지만 70고령의 몸이였음에도 그는 단지 형상안을 내놓는것으로 자기 할바를 다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속에 흘러가는 화면들이지만 그 하나하나의 화폭을 당앞에 전적으로 책임지는 립장에 서있었기에 박정주동지는 젊은 창작가들보다 더 많은 밤을 지새우면서 창조사업에 심신을 다 바치였다.밤늦게까지 일하던 박정주동지의 모습이 아침에 깨여나서 다시 보아도 그대로였다고, 정말 어디서 그런 정력이 생겨나는지 모르겠다고 함께 일한 20대, 30대의 창작가들은 눈을 비비며 놀라와하군 하였다.

동틀무렵까지 화상처리작업을 하다가 새우잠에 든 창조성원들을 아침일찍 또다시 기상시키는 엄격한 할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후방일군역할도 자진하여 맡아하면서 그는 공화국창건 70돐의 경사로운 명절을 향해 낮과 밤을 이어 줄달음쳤다.그 명절은 경축의 환희로운 밤, 경애하는 우리 원수님을 승리의 대축전장에 높이 모시는 영광의 날이였고 온 세계앞에 위대한 조국을 대서사시적화폭으로 긍지높이 노래할 력사의 순간이였다.

하지만 창작전투가 격렬하게 진행되는 속에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년로한 육체가 때없이 위험신호등을 켜군 하였다.그저 자신이 느끼는 고통이라면 이를 악물고라도 참고 견디여냈을것이지만 저도 모르게 졸도하여 넘어지군 하는것은 눈물이 나도록 안타까운것이였다.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간적도 있지만 당장 입원할데 대한 의사들의 강력한 요구와 동지들의 권고에 그는 이렇게 대답하군 하였다.

《〈빛나는 조국〉을 완성하기 전에는 쓰러질수도 죽을수도 없소.원수님께 기쁨을 드릴 그날까지는…》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는 의사들을 뒤에 남기고 작품창조현장으로 스스로 돌아올 때, 또다시 의식을 잃었다가 깨여나군 할 때마다 그는 자기의 생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모른것이 아니였다.

그는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하지만 피하지도 에돌지도 않았다.다가오는 생의 마지막시각을 그리도 태연하게 맞받아나간 박정주동지의 가슴속에서 어떤 웨침이 울리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말하고싶다.그것은 《조선로동당 만세!》, 《조국이여, 번영하라!》는 심장의 웨침이였다고.

행복하게도 그는 그처럼 간절히 바라던 영광의 날을 맞이하였다.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나라일에 그처럼 바쁘신 속에서도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창조현장을 여러차례나 찾으시여 작품을 새 세기의 요구에 맞게 최상의 수준에서 완성하도록 걸음걸음 이끌어주시였으며 그를 비롯한 창조집단전체가 발휘한 전투적인 창조기풍을 높이 평가하여주시였다.

절세의 위인을 높이 모신 공연장소에 열광의 환호가 터져오르던 못 잊을 그밤에, 《주체조선에서만 볼수 있는 세계최고의 걸작품》, 《세상에 이런 예술작품이 있다는것 자체가 인간세계의 자랑》이라는 격찬이 행성을 진감하던 나날 그는 얼마나 기뻤으랴.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를 모시고 두번째로 공연을 진행한 9월 19일이 지난 다음날에야 그는 의사들의 요구와 동지들의 권고대로 병원에 입원하였다.로년의 몸에 지나친 과로로 하여 악화된 그의 병상태는 절대안정을 필요로 하고있었다.하지만 병원에서 보낸 근 10일간 그는 또다시 새 창작과제를 놓고 남모르는 전투를 벌리였다.의료일군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매일같이 콤퓨터로 자료들을 보고 연구하였다.동지들이 그러다 정말 큰일치겠다고 콤퓨터를 억지로 가져가면 하루이틀후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탈취》해오면서 밤을 밝히였다.

밤새워 일하는것은 박정주동지의 오랜 창작생활과정에 습관으로 굳어진것이다.그와 함께 일하여온 조선예술영화촬영소의 일군들과 창작가, 예술인들속에서는 박정주동지가 《밤정주》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다.50여년간의 창작생활기간에 그는 무수한 밤을 새워가면서 자료연구를 하고 연출대본을 썼으며 영화를 찍군 하였다.

열망은 오직 하나였다.당에서 준 과업이기에, 당에서 기다리는 작품이기에 그는 잠도 휴식도 모두 잊고 산것이였다.

원수님께 기쁨드릴 그날까지!

우리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의 창조과정에 박정주동지가 한 이 말을 다시 외워본다.그의 심장의 박동소리와도 같았던, 그 생이 지닌 또 하나의 이름과도 같았던 이 말을.

그는 한생을 이렇게 살아왔다.우리 당이 일군들의 혁명화문제를 두고 심려하면 예술영화 《자신에게 물어보라》와 같은 명작을 만들어 크나큰 기쁨을 드리였고 위대한 장군님께서 노래 《내 나라 제일로 좋아》를 가지고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을 만들것을 구상하시면 최현덕편, 윤상민편, 차홍기편, 홍영자편, 신념편 등 련속편들을 세계적인 걸작으로 완성하는데 지혜와 열정을 아낌없이 바쳤다.

예술영화 《내가 본 나라》의 련속부들을 만들데 대한 위대한 장군님의 과업을 받아안고서는 2, 3부에 대한 촬영을 단 20여일만에 끝내여 사람들을 놀래웠고 어느 한 군당책임일군에 대한 영화를 만들라고 하시면 백두의 눈보라강풍속에서 고열로 신음하면서도 기어이 성과작으로 완성하였다.

작품 한편한편을 만들 때마다 《우리 수령님께 기쁨드릴 그날까지!》, 《우리 장군님께 기쁨드릴 그날까지!》라고 수십수백번도 외우면서 그는 자기 삶의 유일한 그 목적을 향해 돌격전에 나선 병사마냥 앞으로만 내달렸다.

지난 9월 30일은 박정주동지에게 있어서 그 영예로운 돌격전의 마지막날로 되였다.그날 밤도 그는 의사들 몰래 콤퓨터를 켜놓고 자료작업을 하였다.

《먼저 쉬십시오.나는 콤퓨터를 좀 보다가 자겠습니다.》

함께 입원한 환자들도 안정치료를 받고있었던것만큼 그는 이런 한마디 말과 함께 불을 끄고 홀로 콤퓨터앞에 마주앉았다.이것이 사람들이 보고 들은 그의 마지막모습이고 목소리였다.

육체는 그의 끝없는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였다.하지만 심신을 초불처럼 태우며 우리 당을 받들어 그리도 열정에 넘쳐 살아온 박정주동지에 대하여 추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것을 아직도 믿기 어려워하고있다.

만약 살아있다면 그는 오늘도 어느 불꽃튀는 창조현장에서 당이 준 과업을 관철하기 위하여 밤을 지새우고있을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량심의 목소리-《자신에게 물어보라》

 

몇해전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지난 시기 우리 인민들에게 애국주의를 심어주는 좋은 영화들이 많았다고 하시면서 예술영화 《자신에게 물어보라》에 대하여서도 추억해주시였다.

영화연출가로서 박정주동지가 우리 인민들속에서 유명해지게 된 작품이 바로 예술영화 《자신에게 물어보라》이다.혁명의 지휘성원인 일군들의 량심문제를 전면에 제기하고 대담하게 형상한 그 작품은 나오자마자 커다란 사회적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우리 일군들과 당원들, 근로자들에 대한 사회주의애국주의교양에 적극 이바지하였다.

영화에는 주인공이 자기자신과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문석주! 놀라지 말게.난 자네 마음속에 있는 문석주네.

자넨 정말 산매의 질문에 대답할수 있는가?》

《…》

《그렇지만 체면이 깎일가봐 혀끝의 〈량심〉으로는 대답하지 말게.》

《그럼?》

《자신에게 물어보게!》

이것은 잘 형상된 영화의 한 장면이기 전에 박정주동지가 한생 안고 산 물음이고 대답이라고 할수 있다.우리 당사상전선을 지켜선 일군으로서 그는 말과 행동을 일치시킬줄 알고 겉과 속이 하나와 같은 참된 량심의 인간이였다.

실제로 그는 예술영화 《자신에게 물어보라》를 만든 다음 어느 한 기능공학교에 다니던 맏딸에게 어렵고 힘든 전투장으로 갈수 있겠는가고 물었다고 한다.자신도 할수 없는것을 놓고 대중을 교양할수 없다는 예술가적량심이 비낀 물음이였다.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 인민예술가라는 고귀한 칭호를 지닌 그의 명예는 간단하지 않은것이다.하지만 그의 안해는 지난 37년간을 로동자로 일하였고 두 딸 역시 로동현장에서 일하였다.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이자 곧 창작가의 모습으로 되여야 한다고 여긴 그는 언제나 사람들의 평가보다는 자기자신을 엄정한 량심의 판결앞에 내세우고 스스로 검열하고 총화한 또 하나의 《문석주》였다.

당에 대한 충실성은 바로 이렇듯 티없이 깨끗한 량심에서부터 시작된다.죽어도 버리지 않는 혁명신념이란 무엇이겠는가.굴하지 않는 의지와 견인불발의 투쟁정신은 또 어떻게 생겨나는것인가.

강의한 혁명신념이란 곧 가장 공고화된 혁명적량심이고 영웅적인 위훈은 언제나 진주보석처럼 소중히 지켜온 량심의 축적이 당과 조국이 요구하는 순간에 폭발적으로 발휘되여 이룩되는것이다.

창작사업에서 박정주동지의 순결한 량심은 당이 세워준 창조원칙과 형상기준을 단 한치의 양보도 없이 고수하는 무조건성으로 발현되였다.

한걸음도 양보하지 않는 연출가!

사람들의 기억속에 제일 또렷하게 남은 박정주동지의 모습이 이것이고 젊은 창작가들에게 그가 제일 간곡하게 당부한것도 바로 이것이다.

영화작품 한편한편을 어머니 우리 당에 드리는 최대의 지성품으로 간주한 그는 아무리 조건이 어려워도 영화촬영준비가 계획대로 되여있지 않으면 《촬영 시작!》구령을 치지 않았다.화면에 언뜻 스쳐지나는 장치물이나 소도구 하나도 눈속임으로 해결할 엄두조차 내지 않았으며 그런 창작태도를 제일 경멸하였다.그것을 당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죄악으로 여겼기때문이다.

그런것으로 하여 그가 연출할 때에는 배우를 비롯한 창조성원들이 무척 힘겨워하였다.그의 요구성이 지나치다는 의견도 있었다.

만약 박정주동지가 사람들의 눈에 비쳐지는 자기의 체면이나 좋은 인상에 대하여 더 신경을 썼다면 그렇게 엄격한 요구성을 제기하지 못하였을것이다.하지만 그는 자기보다 먼저 당의 리익, 혁명의 요구를 앞에 놓는 사람이였다.

예술영화 《자신에게 물어보라》를 찍을 때에는 화면에 잠간 나오는 한마리의 산 개구리를 얻느라 반나절나마 기다린적도 있었고 영화를 만들 때마다 일부 배우들의 연기형상수준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들을 울린적도 적지 않았다.

오늘 조선예술영화촬영소의 창작가, 예술인들이 한결같이 인정하는것처럼 당이 정해준 창조원칙과 기준을 그처럼 완강하게 고수하였기에 박정주동지가 연출한 영화들은 우리 당에 커다란 기쁨을 드리고 인민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 성공작으로 되군 하였다.

혁명의 지휘성원인 일군이 당앞에 지닌 깨끗한 량심은 화려한 언사가 아니라 실천행동, 이신작칙으로 담보된다.창작단의 사령관인 연출가로서 박정주동지는 필요한 조직사업을 하고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였다.당이 준 과업을 집행함에 있어서 그는 작전하고 지휘하는 사람인 동시에 앞장에서 뛰여다니는 사람이였다.영화촬영에 꽃밭이 필요하면 솔선 꽃들을 구해다가 땀흘리며 심었고 장치물을 설치하거나 기재들을 운반할 때에도 언제나 남먼저 어깨를 들이밀고 로동자들과 함께 일하였다.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 신념편의 일부 장면들을 촬영할 당시는 맵짠 초겨울이였다.녀주인공이 당일군과 함께 자그마한 쪽배를 타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찍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배밑창에 난 작은 구멍으로 물이 새여들어오기 시작하였다.얼음처럼 차거운 물이 무릎을 적시며 차오르자 배우들이 당황하였을것은 물론이다.그러나 다시 배를 수리하고 촬영하자면 해가 서산에 기울어질수도 있었다.촬영에 적중한 그 시각을 놓치면 당앞에 결의한 작품완성날자를 하루 드티게 된다.박정주동지는 서슴없이 허리치는 물속에 뛰여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자, 동무들! 나도 여기에 함께 있겠소.계속 촬영합시다.》

따뜻한 말 한마디에 한겨울이 춥지 않다는 말이 있다.더우기 그 시각 창작단을 책임진 일군의 그 헌신적인 자세는 배우들을 비롯한 전체 창조집단에 얼마나 큰 힘이 되였겠는가.

완성된 영화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는다.인민이 사랑하는 배우들처럼 언제 한번 자기 얼굴을 화면에 나타낸적도 없는 그였지만 작품만 잘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박정주동지의 남다른 재능을 두고 감탄한다.하지만 그의 재능과 풍부한 지식 역시 당에 대한 높은 충실성과 순결한 량심이 토양으로 되여 자래운것이였다.

나의 재능과 실력이 당이 바라는 높이에 이르렀는가?

바로 이것이 그로 하여금 한생 피타는 노력을 바쳐 사색하고 연구하게 한 자기자신의 물음이였다.

박정주동지는 영화의 운명에 대하여서는 연출가가 당앞에서 책임져야 한다고 하신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언제나 창작의 좌우명으로 간직한 예술가였다.촬영, 배우연기, 조명과 장치, 편집 등 영화제작과 관련한 모든 공정을 그는 누구보다 깊이 파악하고있었으며 앉으나서나 다방면적인 지식들을 습득하기 위하여 열심히 배우고 사색하였다.연출가로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문학에도 밝은 그는 예술영화 《자신에게 물어보라》의 첫 장면에 나오는 설화시도 직접 썼고 여러 예술영화의 가사도 창작하였다.예순살이 넘은 나이에 콤퓨터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그 수준이 상당한 높이에 있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나이나 공로는 뒤전에 밀어놓고 발전하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서려는 그의 노력이 얼마나 진지하고 완강한것인가를 알수 있다.

눈가림식이나 남의 도움이 아니라 이렇게 뼈심을 들여가며 실력으로 당을 받드는 박정주동지의 성실성은 그대로 영화창작성과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 그는 위대한 장군님의 높은 평가를 여러차례나 받아안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 최현덕편에서 박정주동지의 재능이 깃든 독특한 구성형식과 함께 전반적형상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면서 흠잡을데가 없는 그야말로 만점짜리 영화이라고, 자신께서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흥분하기는 처음인것 같다고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시였다.련이어 그가 연출한 차홍기편까지 보신 후에는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은 조선을 대표하는 영화, 조선영화의 얼굴이라고 말할수 있다고 교시하시였고 후에도 여러편의 영화를 보시면서 그의 재능과 실력에 대하여 과분한 치하를 하여주시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분야, 자기 직업에서 성공하고 나아가서 훌륭한 인생을 살기 바란다.이것은 아름다운 리상이다.그 리상이 어떻게 실현될수 있는가를 박정주동지의 생은 말해주고있다.

성공이란 한생토록 순결하게 지킨 혁명적량심이고 어머니당과 조국에 드린 기쁨의 시각들이야말로 마지막순간에 뒤돌아볼 때 웃으며 추억할 값높은 생의 자욱이다!

 

당을 따라 영원히 전사는 간다

 

혁명투쟁의 길에 나선 사람에게는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생명도 서슴없이 내대게 하는 사상적지주, 숭고한 도덕의리심을 간직하고 보답의 한길을 끝까지 걷게 하는 하늘같은 품이 있다.인생의 시작도 끝도 오직 한모습으로 당과 혁명에 무한히 충실하였던 박정주동지에게 있어서 혁명적량심을 순결하게 지키는것을 가장 고귀한 인생의 영광으로 여기게 한 은혜로운 품은 곧 위대한 수령님의 품, 위대한 장군님의 품이고 우리 당의 품이였다.

돌이켜보면 나라없던 세월 남녘땅에서 태여난 박정주동지가 공화국의 품에 안긴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조국의 해방과 통일을 위하여 싸우던 그의 아버지가 원쑤놈들의 악착한 고문으로 희생된 후였다.가렬한 조국해방전쟁의 포연속에서 어머니의 손을 잡고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우리 당을 찾아온 그와 형제들은 얼마나 위대하고 따사로운 품에 자기들이 안긴것인지 그때에는 미처 다 알수 없었다.

홀어머니밖에 의지할데 없는 그의 형제들을 만경대혁명학원에서 공부시켜 어엿한 인민군지휘성원으로 키워준 당의 은혜로운 사랑은 영화창작의 포부를 안은 박정주동지를 나라의 영화예술교육전당으로 이끌어주었고 20대의 젊은 나이에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창작가로 배치된 후에도 그의 온몸에 언제나 해살처럼 비쳐들었다.

영화부문에서 전망성있는 신인창작가들로 외국류학을 보내도록 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부연출가인 박정주동지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명단에서 빠지게 되였다는것을 아시고서는 본인은 어떤 사람인가고, 본인이 똑똑하면 대담하게 믿고 보내자고 하시면서 그를 비롯한 류학생들에게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금시계와 현대적인 소형록음기, 고급사진기 등 사랑의 선물을 가슴한가득 안겨주어 온 세상이 보란듯이 떠나보내시였다.

품들여 키우신 전사가 미숙한 작품들을 한편한편 내놓을 때마다 다심하신 스승이 되시여 어느것은 좋고 어느것은 고쳐야 하며 어떻게 하면 더 잘될수 있다고 일일이 가르쳐주시면서 신심과 용기를 북돋아주시고 영화창작분야의 당당한 재사로 성장하도록 이끌어주신분도 우리 장군님이시였다.

예술영화 《자신에게 물어보라》가 처음 나왔을 때 일부 창작지도일군들속에서는 3대혁명소조 책임자가 한 방목공처녀의 질문 한마디에 안절부절 못하면서 고민하는것으로 그렸다는 등 여러가지 의견을 내놓으면서 갑론을박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론난을 일으키던 이 작품을 직접 보아주시고 영화를 아주 잘 만들었다고,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좋아할것이라고, 인민대중이 좋다고 하는것이 진짜 좋은것이라고 하시면서 영화와 함께 창작가들의 공로도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의 련속편들을 비롯하여 박정주동지가 연출한 수많은 영화들은 모두 이렇게 위대한 장군님께서 첫 관람자가 되시고 심사자, 지지자가 되시여 시대의 명작들로 빛을 뿌리도록 해주신것이였다.

그가 잠시라도 우리 식의 영화창조방식에서 벗어날가봐 늘 마음쓰시고 인민들이 좋아하는 멋진 영화들을 련이어 만들어냈을 때에는 박동무는 자신께서 안다고, 자신께서 그를 류학보냈댔다고 하시면서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 인민예술가로 내세워주신 어버이장군님.

태여난 곳에서라면 막돌처럼 버림받았을 인생의 걸음걸음에 그렇듯 뜨거운 사랑과 정을 고여주시고 하늘같은 은덕과 믿음을 거듭 안겨주시였으니 박정주동지에게 있어서 위대한 수령님들의 품, 당의 품은 곧 생의 전부였고 순간도 저버릴수 없는 량심이였다.

그렇듯 고마우신 생의 은인, 그처럼 위대하신 사상과 령도의 거장, 문학예술의 영재를 높이 모시고 따르는 길에 진펄이 막아서면 어떻고 가시밭길을 헤치면 또 어떤가.살아도 죽어도 이 길에 나의 영광이 있고 무상의 행복이 있다!

이것이 박정주동지가 지니고 산 사상정신세계였다.

바로 그래서 그는 우리 당에 드리는 기쁨밖에는 그 어떤 행복이라는것을 모르는 《문석주》가 되였고 사업에서나 생활에서나,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나 《우리 수령님들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우리 원수님께서 지금 나를 보고계신다면?》 하고 순간순간 자신에게 물어보면서 그 량심의 물음앞에 떳떳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 마지막순간까지 온넋을 불태운것이다.

박정주동지에게 있어서 한생의 여한이 있다면 더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 경애하는 원수님께 기쁨과 만족을 드리려던 소원을 이루지 못한것이다.그는 이것을 제일 죄스러워하였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으면서 박정주동지가 몸에 착용하였던 심전계는 그가 운명할 당시 멎었던 심장이 한참만에 다시한번 고동치였다는것을 정확히 기록하였다.불민한 전사의 공로를 잊지 않으시고 몇해전에는 은정어린 생일상을 보내주시고 영광의 대회장들에도 불러주신 경애하는 원수님께 보답을 못하고 가자니 로전사의 심장이 어찌 쉽게 멎을수 있었겠는가.

위대한 우리 당을 위하여 이제 남은 생에 내가 더 할수 있는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자신에게 제기할 때 박정주동지가 또 하나 마음의 가책을 느끼군 한것은 영화연출가후비들을 키우는 사업에 더 많은 품을 들이지 못한것이였다.

혁명가가 육체적로쇠를 피할수 없게 된 때에 와서 혁명을 위하여 할수 있는 보람있는 일중의 하나는 바로 새 세대들을 훌륭히 준비시켜 당과 조국앞에 내세우는것이다.이것은 대를 이어가며 계속되는 투쟁의 요구이고 혁명선배라면 누구나 지니고있는 신성한 사명이다.

오래전에 박정주동지는 이제는 나이도 적지 않은데 평양연극영화종합대학에 책임일군으로 가는것이 어떤가 하는 권고를 받은적이 있었다.그때 그는 당에서 아는 박정주는 영화연출가 박정주이지 간부를 하는 박정주가 아니라고 하면서 한사코 촬영소를 뜨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영화예술인후비들을 키우는 사업에서 누구보다 책임감을 느낀 사람이였다.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을 만들 때에는 촬영소에 실습나온 대학생들에게 대담하게 부연출과업을 맡겨준적도 있다.

몇해전에는 대학의 겸임교원으로서 자기가 직접 쓴 문학대본을 대학생들에게 주면서 실습영화창작을 지도하기도 하였다.눈보라치는 겨울날 덕천시의 어느 한 산정에 남먼저 올라가 촬영지를 확정하고 자기의 실천행동으로 열정에 넘쳐 배워주던 로연출가의 모습을 대학의 교원들과 학생들은 두고두고 이야기하고있다.너그러운 선생님으로 알았는데 일단 창작에 들어가니 엄한 스승이였다고, 그러나 그때 혁명적창조정신과 본때가 과연 어떤것인가를 똑똑히 알게 되였다고 그들은 감동깊이 말하였다.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3차원화상처리를 맡아한 젊은 창작가들도 한창나이에 끝없이 배우고 열정을 다 바쳐 당과 조국을 위하여 값있게 살라고 절절히 당부하던 박정주동지에 대하여 추억한다.

조국을 위하여 불타는 고지에서 마지막탄환까지 날리다가 한몸이 그대로 수류탄이 되여 작렬한 영웅전사들처럼 그는 이렇게 자기의 온넋과 량심을 우리 당에 바치고 갔다.

우리는 박정주동지가 긴장한 영화창작사업으로 하여 언제 한번 따뜻한 정을 나눌새 없었던 그의 가족들도 만나보았다.일년 열두달치고 집에 들어온 날이 몇날도 안되던 박정주동지는 어머니의 예순살 생일도 멀리 출장길에서 편지 한장으로밖에 축하하지 못하였고 20여년전 당의 은정속에 새집들이하는 날에도 바쁜 창작사업으로 와보지 못했던것으로 하여 아빠트사람들의 도움을 받고서야 집을 찾아온적도 있다고 한다.그러나 이 세상 가장 고귀한 유산을 물려준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그의 세 자식은 눈물속에 말하였다.

그 어떤 물질적재부가 아니라 오로지 당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과 순결한 량심을 유산으로 물려준 아버지를 더없는 자랑으로 여기는 후대들을 보는것이 우리는 참으로 가슴뜨거웠다.지금 조선4.25예술영화촬영소 부연출가로 사업하고있는 박우철동무는 아버지처럼 기어이 새 세기의 요구에 맞는 명작들을 창작하여 우리 당을 옹위해갈 열의에 넘쳐있다.

이제는 그들과 같은 새 세대들이 충정의 바통을 든든히 이어잡고 전세대들의 몫까지 합쳐 위대한 우리 당과 사회주의조국을 온 세상에 빛내여야 한다.

혁명가의 고귀한 사상정신적풍모는 수령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함께 깨끗한 량심에서부터 시작된다.당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과 굴하지 않는 신념도 의지도, 강의한 원칙성과 참다운 도덕의리도 량심을 떠나서는 존재할수 없다.

그런 순결한 혁명적량심을 지니고 살 때 일군이라면 《나를 따라 앞으로!》의 구령을 치면서 인민을 위한 멸사복무전의 앞장에 서는 참다운 충복, 청렴결백한 우리 당의 충신이 될것이고 그가 예술가, 과학자라면 낮이나 밤이나 세계를 디디고 올라설 포부와 열정에 넘쳐 분발하고 또 분발하여 당에 기쁨을 드리는 성과들을 내놓게 될것이다.

백옥같은 충정과 량심을 바쳐 우리 당을 받들어온 전세대들은 영원히 살아있다.그들의 아름다운 생과 투쟁정신은 우리 후대들의 귀중한 삶의 거울이 되여 언제나 신심과 용기를 안겨주고있으며 당을 따라 이 세상 끝까지 가고갈 천만의 대오속에서 참된 문예전사 박정주동지도 변함없이 충정의 보폭을 내짚고있다.그가 작품에 남긴 량심의 목소리와 함께 영원히.

세월이 흘러서

그대의 머리우에 흰서리내릴제

멀리 저 멀리

아득히 걸어온 인생을 돌이켜보라

그대는 무엇을 남겼는가

후대들앞에

그대는 무엇을 바쳤는가

어머니조국에

본사기자 리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