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8(2019)년 3월 27일 우리민족강당
통일애국렬사 늦봄 문익환
주체78(1989)년 3월 25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초청으로 남조선의 전국민족민주운동련합 고문인 문익환목사가 평양을 방문하였다. 당시 평양에로의 길은 피를 같이하는 한 겨레에게로 잇닿은 길이고 통일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강토에로 지향된 참다운 민족애의 길이였건만 서슬푸른 총칼들이 숲을 이루고 지옥의 쇠고랑이 발목을 붙잡는 그야말로 목숨을 내대야 하는 험난한 길이였다. 성서에 나오는 요단강의 소용돌이보다 더 무서운 이 길우에 《남도 우리 조국이요, 북도 우리 조국인데 말로만 할것이 아니라 내 발로 북쪽땅을 디딤으로써 나 스스로 하나의 조국을 확인하고 싶다》고 소리치며 나서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늦봄 문익환목사였다. 1918년 6월 1일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족마을의 독실한 그리스도교신자가정의 맏아들로 출생하여 한생의 대부분을 신학연구와 신앙생활에 몸을 담가온 문익환목사는 한창 배워야 할 꽃나이의 청춘들이 자주와 민주, 통일을 절규하며 분신자결하는 영용한 모습을 목격하면서 비록 늦기는 했지만 분렬의 빗장을 뽑아버리고 통일의 문을 여는데 기여해야 하겠다는 자각밑에 통일운동에 나섰다. 그는 1976년 3월 재야인사들과 함께 유신독재를 철페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할것을 주장한 《민주구국선언》을 작성발표한 이후 1984년에는《민중주도의 통일운동을 지향》하는 《민족통일국민회의》(민통국)를 결성하였으며 애국적민주력량의 결집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련합》(민통련)이 출범하면서는 그 의장으로, 1989년에 남조선 사회각계의 진보적민주단체들을 망라하는 포괄적인 조직으로서 《전국민중민주운동련합》(전민련)이 나오면서 그 고문으로 되였다. 이 과정에 여섯차례나 투옥되는 등 갖은 탄압과 박해가 들씌워졌으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변심없이 투쟁의 길을 꿋꿋이 걸음으로써 남조선재야정치세력의 원로로, 대표적 활동가의 한사람으로 자리를 굳히였다. 문익환목사는 《민족통일이란 정부당국의 점유물이 될수 없으며 통일의 주체는 민중이기때문에 이들의 자주적인 참여속에서 통일방안이 모색되여야 한다》는 《민중통일론》을 주장하면서 재야정치세력뿐아니라 남조선 각계각층 인민들의 통일론의를 수렴하여 나름대로의 통일방식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민족통일의 진로를 찾아 고심을 할수록 문익환목사의 심장속에서는 조국통일의 3대원칙과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방안을 비롯하여 우리 민족모두의 심장을 틀어잡는 통일로선을 제시하여 주신 위대한 이러한 그였기에 1988년이 저물어가는 섣달 그믐날밤에는 평양길을 떠나는 명상에 잠겨 서울 남대문정거장을 찾아가 표파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평양행 기차표를 달라고 떼를 쓰는 내용의 시까지 썼던것이다. 바로 그러한 때인 주체78(1989)년 1월 1일. 문익환목사를 평양으로 부르는 위대한 수령님의 새해 신년사가 분렬의 장벽을 날아넘어 그에게 전달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신년사에서 우리는 남조선의 지도급인사들이 건설적인 통일방안을 가지고 평양을 방문한다면 그들을 환영할것이며 그들이 내놓는 어떠한 제안에 대해서도 함께 허심탄회하게 협의할것이라고 하시면서 남조선의 각 정당 총재들과 함께 이미 주체71(1982)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제안안 100인정치인련합회의 남조선 정치인대표의 한사람이였던 문익환목사의 이름을 찍어서 평양으로 초청하시였다. 문익환목사는 전파를 타고 흘러드는 위대한 수령님의 자애에 넘치는 말씀을 전해들으면서 나라의 중대사인 통일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평범한 목사에 불과한 자기까지 스스럼없이 평양으로 불러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그 믿음, 그 사랑이 더없이 고마워 눈시울을 적시였다고 한다. 문익환목사는 즉시 기자회견을 가지고 《주석께서 제의하신 북남정치협상회의를 공식적으로 수락》한다는 자기의 확고한 립장을 표명하였으며 얼마후에는 온 남녘겨레들의 뜨거운 통일열망을 안고 과감히 평양길에 올랐다. 그는 주체78(1989)년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평양을 방문하고 3월 27일 위대한 수령님의 접견을 받았다. 공화국북반부방문을 마치고 4월 13일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구속되였으며 살인재판정에서 7년형을 언도받고 감옥생활을 하다가 1990년 10월에 가석방되였다. 그후 여러곳을 돌아 다니며 평양방문소감을 남조선인민들에게 전하였으며 대중투쟁에서 중심적역할을 해오던중 또다시 체포되여 1991년 6월 6일 영등포교도소에 갇히였다가 1993년 3월 6일에 가석방되였다. 출옥후에도 그는 조국통일범민족련합 남측본부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 제4차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회장으로서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을 변함없이 벌려나갔다. 문익환목사의 남다른 통일투쟁에 대하여 언제나 각별한 관심과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주신 그리고 주체83(1994)년 1월 18일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못내 가슴아파하시면서 그의 유가족들에게 남조선사회의 자주화와 민주화, 나라의 평화통일을 위하여 몸바쳐 투쟁하여온 명망있는 통일애국인사 문익환목사를 잃은것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큰 손실로 된다고, 문익환목사는 생전에 념원하여온 조국통일의 날을 보지못하고 애석하게 별세하였지만 그가 통일애국의 길에 남긴 업적은 해내외동포들의 가슴속에 언제나 간직되여 있을것이라는 사랑이 넘치는 위문전문도 보내주시였다. 남조선사회의 자주화와 민주화, 나라의 평화통일을 위하여 몸바쳐 투쟁하여온 명망있는 통일애국인사! 이 얼마나 고귀하고 값높은 칭호인가! 단지 나라사랑, 겨레사랑의 일념에서 뒤늦게나마 통일운동에 뛰여든 늦봄 문익환목사의 자그마한 소행도 귀중히 여기시고 힘을 주시고 뜻을 나누시며 평범한 목사에 불과했던 그를 저명한 통일운동가로, 통일애국인사로 내세워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렇듯 값높은 칭호로 문익환목사를 온 겨레의 가슴속에 영생하도록 하여주시였다. 출처:우리민족강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