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심장의 부름-우리 어버이
화창한 4월이 왔다. 봄꽃들이 망울을 터치는 이 계절 인민의 마음속에서는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뜨겁게 끓어번지고있다. 강산에 넘쳐나는 그리움속에 누구나 절절한 목소리로 부르고부른다. 아, 우리 어버이! 이 부름은 이 땅에 생을 둔 우리 인민모두의 심장에서 울리는 한결같은 진정의 목소리이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김일성동지의 한생은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고 사상과 령도에 구현하여 현실로 꽃피우신 인민적수령의 숭고한 한생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평생을 끝없이 겸허하게 사시였다.자신을 인민의 아들, 인민을 위해 일하는 복무자로만 여기신분이여서 우리 수령님께서는 인민들의 칭송을 시종일관 마다하시였다. 그러나 우리 수령님께서 위대한 한평생에 기꺼이 받아들이신 하나의 부름이 있었다.그것은 바로 인민의 어버이라는 부름이였다. 주체74(1985)년 7월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우리 나라를 방문한 어느 한 나라 당대표단과 담화를 나누시였다. 우리 나라에서의 민족간부문제해결의 경험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일군들은 다 자신께서 품을 들여 키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을 어버이라고 부르는데 자신께서는 이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였다. 인류력사를 돌이켜보면 명망이 있다고 하는 위인들가운데 자신을 인민의 어버이로 여긴 사람이 없었다.인민이 한결같은 진정을 담아 어버이라고 호칭한적은 더구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존엄높은 공화국의 주석이시고 력사상 가장 강위력한 백전백승 조선로동당의 창건자이시며 수많은 국제적인 명예칭호를 받으시였지만 우리 수령님께서는 어버이라는 인민의 부름을 더 긍지높게 여기시였다. 인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안으시고 세월의 눈비를 다 맞으시며 공장과 농장, 군부대를 찾으시였고 인민들의 살림살이를 친어버이의 심정으로 보살펴주신 위대한 수령님, 평생토록 인민들의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쓰고사는 문제를 안으시고 자신을 깡그리 태우시며 사신분이 우리 수령님이시였다. 신포땅이 전하는 잊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탄생 60돐을 맞으신 바로 그해 여름이였다.신포항에 랭동공장이 일떠섰다는 보고를 받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제는 산골사람들도 생선국을 먹을수 있게 되였다는 기쁨에 만사를 제치고 현지로 찾아가시였다. 랭동공장을 돌아보시던 수령님께서는 급동실에까지 들어가시였다. 급동실안은 동토대와도 같은 얼음세계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여름옷차림으로 저온속에서도 랭동능력이며 설비상태를 일일이 알아보시였다. 따라들어갔던 한 일군은 어찌나 추운지 온몸을 덜덜 떨었다. 그는 숙소에 돌아와 위대한 수령님께 감기라도 들면 어쩌자고 홑옷바람으로 급동실에 그토록 오래동안 계셨는가고 걱정스럽게 말씀올렸다. 그러는 그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걸려도 할수 없다고, 인민들을 배불리 먹이자면 궂은데, 마른데를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제 한몸을 생각해서는 아무 일도 못한다고 흔연히 말씀하시였다. 이것이 어찌 신포땅에만 수놓아진 이야기라고 하겠는가. 인민들을 잘 먹일 생각이 얼마나 간절하시였으면 위대한 수령님께서 전쟁의 포성이 울부짖던 가렬한 시기에도 최고사령부가까이에 닭우리와 양어장을 만들고 많은 닭과 물고기를 자신께서 직접 기르시였겠는가.남새밭에서 각종 남새들을 손수 가꾸시며 가금업과 축산업, 남새농사의 휘황한 전망도 구상하시였다.고기와 알생산을 본격적으로 하여 인민들에게 먹이는데 필요하다면 전쟁중에도 그를 위한 내각결정을 채택하도록 하신분이 바로 우리 수령님이시였다.함경남도의 정평군에 자리잡은 광포오리공장은 그렇게 되여 전쟁시기에 일떠서기 시작하였다. 인민의 식의주문제를 자신의 사명으로 간주하시고 끝없이 높은 요구성을 내세우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거룩한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멀고 험한 포전길을 걷고 또 걸으시며 농사일로 마음을 놓지 못하시였다. 주체82(1993)년 8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황해남도를 현지지도하시였다. 밤차로 평양을 떠나 새벽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순간의 휴식도 없이 5개의 농장을 련이어 찾으시여 포전에서 농사일을 의논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점심시간마저 바쳐가시며 농사문제와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가시는 곳마다에서 도와 농장의 일군들은 위대한 수령님께 간절한 청을 올리였다. 《어버이수령님, 이제부터는 저희들이 농사를 더 잘 짓겠으니 더는 포전길을 걷지 말아주십시오.》 그러는 일군들에게 나는 황해남도의 농사가 중요하기때문에 어떤 때에는 국가주석을 그만두고 황해남도에 내려와서 농사를 지도하는 고문노릇을 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군 한다고 자신의 심중을 뜨겁게 터놓으신 우리 수령님, 위대한 수령님의 현지지도의 전 로정에서 거의 절반에 해당되는 로정이 농촌길이라는 사실을 두고 오늘도 인민은 격정에 목이 메인다. 우리 수령님께 있어서 한생에 제일 기쁜 날이 과연 어떤 날들이였던가.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나날 경제부문 책임일군협의회에서 온 나라 아이들에게 옷을 다 해입혔다는 일군의 보고를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너무도 기쁘시여 그에게 고맙다고 거듭거듭 말씀하시였다.나라의 주석이 아래일군에게 아이들의 옷을 해입혀 고맙다고 사례를 하는 인류정치사에 다시 없을 이런 가슴뜨거운 광경은 온 나라 인민을 자신의 친자식으로 품어안으신 우리 수령님께서만이 펼치실수 있는 숭고한 화폭이였다. 바로 이런분이시기에 언제인가 지방의 어느 중학교에 가시여 울긋불긋 곱게 핀 꽃이런듯 선물옷을 입고 좋아하는 학생들을 보시고는 나보다 더 신사로구만 하시며 그리도 즐거우시여 온종일 만사를 제쳐놓으시고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주시였다. 얼마나 기쁘시였으면 이날 내 60평생에 기쁜 날이 며칠 되지 않는데 오늘처럼 기쁘기는 처음이요, 정말 내 마음이 이렇게 즐겁기는 처음이요라고 거듭거듭 외우시였으랴. 위대한 수령님께 있어서 한생의 희로애락은 인민들을 더 잘 먹이고 더 잘 입히며 인민들에게 더 좋은 집을 지어주는데 있었다. 이 땅의 천만인민을 돌보시며 인민에게 행복만을 안겨주시려 끊임없는 헌신과 로고의 낮과 밤을 이어가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사업한 한 일군은 자기의 일기장에 이렇게 쓴적이 있다. 《나는 안타까운 이 한밤을 지새면서 소중한 답을 얻었다. 이 땅의 열매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조국의 래일이 어떻게 꽃피워지고있는지… 온몸으로 느끼였다!》 이것은 그 일군만이 아니라 위대한 수령님을 어버이로 모시고 세상에 부럼없이 살아온 우리 인민모두의 체험이였다. 인민이 사는 곳 어디에나 뜨겁게 찍혀있는 우리 수령님의 발자취, 그것을 다 이으면 위대한 어버이를 모시여 온 나라가 하나의 화목한 대가정을 이룬 사회주의 우리 조국의 지도가 되리라.위대한 인민의 긍지높은 력사가 되리라. 인민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깡그리 다 바치시고 인민을 위한 고생을 더없는 락으로 여기신 어버이수령님, 세월이 갈수록 인민에게 위대한 사랑을 주고주신 우리 수령님을 정녕 못 잊어 인민은 목메여 부르고부른다. 아, 우리 어버이! 이 부름과 더불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인민의 마음속에 영생하신다.
글 본사기자 한영민 사진 본사기자 리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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