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8(2019)년 6월 4일 로동신문

 

영원한 혁명의 불길

력사적인 보천보전투승리기념일에 즈음하여

 

보천보!

82년전 이 나라 북변의 자그마한 시가지이름이 력사에 깊이 새겨지고 세계에 널리 전해졌다.

6월 4일 바로 이날 보천보에서 온 세상에 조선의 정신을 알리고 조선의 앞날을 알리는 불길이 타올랐다.

그에 대하여 혁명시인 조기천은 장편서사시 《백두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밤바다같이 웅실거리는 군중

높이 올라서 칼 짚고 웨치는

김대장 -

《동포들이여!

저 불길을 보느냐?

조선은 죽지 않았다!

조선의 정신은 살았다!

조선의 심장도 살았다!

불을 지르라-

원쑤의 머리에 불을 지르라!》

만세소리 집도 거리도 떨치고

화염을 따라 오르고올라

이 나라의 컴컴한 야공을

뒤흔든다 뒤울린다!

력사의 땅 보천보에는 82년전 그날의 우리 수령님 모습을 형상한 동상이 모셔져있다.

봇나무, 분비, 가문비나무들이 들어찬 숲을 배경으로 으스러지게 틀어쥐신 한손을 높이 추켜드시고 인민들앞에서 연설하시는 백두산청년장군!

보천보에는 그날의 전투장이 보존되여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천보전투를 지휘하신 유명한 황철나무밑의 보천보전투지휘처며 130여발의 탄알자리가 력력한 경찰관주재소, 일제가 보천보전투후 불탄 자리에 다시 지어놓은 소방회관, 전투흔적이 생생히 남아있는 농사시험장의 포대…

보천보를 찾아 항일의 전장을 돌아보는 우리의 귀전에는 그날의 총소리가 높이 울리고 보천보시가지에 활활 타오른 불길도 눈앞에 보이는듯싶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보천보전투가 가지는 가장 주요한 의의는 조선이 다 죽었다고 생각하던 우리 인민들에게 조선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것을 보여주었을뿐아니라 싸우면 반드시 민족적독립과 해방을 이룩할수 있다는 신심을 안겨준데 있다.》

193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있는 보천보의 그 어디에 눈길을 주어도 강토를 진감하던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의 우렁찬 함성이 금시 들려오는듯싶어 가슴이 설레이였다.

보천보전투지휘처에 이르니 리영옥 보천보혁명박물관 관장이 있었다.그는 사람들속에 《백두의 봇나무》로 널리 알려진 어제날 구시물동혁명전적지 강사이다.

옛 전장을 돌아보는 우리와 걸음을 같이하면서 관장은 시가전의 경우 지휘처와 시가지와의 거리가 이처럼 가까운 실례는 없었다고, 이것이 보천보전투가 가지고있는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망국의 비운으로 산천초목조차 비분에 떨던 우리 조국은 1930년대 중엽에 이르러 하나의 철창없는 감옥으로 되여버렸다.

우리 인민의 반일민족해방운동을 완전히 말살해버리기 위해 그 어느때보다도 군대와 헌병, 경찰망을 강화하는 한편 세상에 없는 갖은 악법을 다 만들어낸 일제는 보천보에 경찰관주재소, 면사무소, 산림보호구, 농사시험장, 우편소, 소방회관을 비롯한 폭압기구들과 략탈기구를 두고 인민들의 반일투쟁과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출을 가로막아보려고 발악적으로 책동하였다.보천보는 적들의 국경경비선에 있는 중요군사요충지였고 국경일대에서 일제의 식민지통치와 략탈의 중심지들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보천보를 치면 일제침략자들에게 심대한 정치군사적타격을 주고 인민들에게 조국해방의 신심을 안겨줄뿐만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의 위력을 과시할수 있었다.

주체26(1937)년 6월 4일 밤 10시, 가림천기슭의 황철나무아래에 지휘처를 정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천천히 권총을 높이 드시였다.

《땅!》

어둠이 짙게 드리운 보천보의 밤하늘을 헤가르며 전투개시를 알리는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삽시에 시가지로 육박해들어갔다.온갖 폭압과 만행의 아성인 경찰관주재소에 불벼락이 내리고 면사무소와 산림보호구, 농사시험장, 소방회관, 우편소, 료리점 등이 불소나기를 맞았다.

여기저기에서 인민들이 달려나왔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환호하는 인민들앞에서 력사적인 연설을 하시였다.위대한 수령님의 연설은 도탄에 빠져 신음하던 조국인민들을 무한히 격동시켰다.

보천보전투를 빛나는 승리로 결속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추격해오는 적들을 다시한번 족쳐버릴 통쾌한 작전을 펼치시여 구시산전투와 간삼봉전투를 또다시 대승리에로 이끄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동상앞에 다시 선 우리는 옛 보천보거리를 바라보며 보천보전투의 력사적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였다.

이제는 이 뜻깊은 전투가 있은 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그날의 타오르는 홰불앞에서 백두산청년장군을 우러러 만세의 환호성을 터친 그때로부터 세대도 여러번 바뀌였다.하지만 어찌하여 가슴에 붉은넥타이 날리는 소년단원으로부터 머리에 백발을 얹은 전쟁로병에 이르기까지 여기 보천보를 찾고 또 찾는것인가.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몸소 여러차례나 백두산에 오르시여 맞으신 백두의 칼바람이 보천보의 불길에 오늘의 시대적의미를 더해주며 그에 대한 대답을 주고있다.

조국진군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군사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지향점이였다.그것은 백두의 칼바람을 맞받아헤치며 시련과 난관을 이겨내고 지어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할 간고한 행로였다.

력사적인 무산지구전투의 승리가 고난의 행군이라는 비싼 대가로 이루어진것이라면 보천보전투의 승리는 무송원정의 피어린 결전의 결과로 마련된것이였다.

무슨 고생인들 없었겠는가.추위에 시달리고 굶주림에 쪼들리고 수면부족으로 고통을 당하고…

싸움을 련속 하다나니 피도 많이 흘렸고 희생도 많았다.간고한 행군과정에 잃었던 미투리를 해토가 되여 다시 나올 때 이깔나무정수리에서 찾았다는 기막힌 이야기도 이때 생겨났다.

억천만번 죽더라도 원쑤를 치자!

기어이 살아서 조국으로 진군하자!

우리 수령님의 심장에 끓어넘친 불굴의 신념은 유격대원들의 가슴마다에서 그대로 맥박쳤고 항일무장대오는 한치한치 조국에로의 길을 열어나갔다.

보천보전투에로 잇닿은 무송원정은 부닥치는 애로와 난관을 맞받아 뚫고나가는 완강한 공격정신이 무엇이고 백번 쓰러지면 백번 다시 일어나 끝까지 싸우는 견결한 투쟁정신이 어떤것인가를 다시한번 력사에 아로새기였다.

무송원정의 험난한 길에서 투사들에게 혁명적의지를 북돋아준 백절불굴의 혁명정신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시련과 난관을 견결히 이겨내고 조국진군의 꿈을 이루게 해주었고 보천보전투승리라는 력사적사변을 창출하게 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보천보전투를 통하여 절세의 위인을 모신 조선은 언제나 승리하며 침략자들이란 칼로 내려치면 동강이 나고 불을 지르면 짚검불이나 북데기처럼 타번지는 일종의 페기물같은 존재라는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당시 일제가 《후두부를 꽝 하고 강타를 당한것 같다.》느니, 《천날동안 베여들인 새초를 한순간에 태워버린듯 한 한을 남겼다.》느니 하면서 아우성을 치고 《도메이》통신, 《도꾜니찌니찌신붕》, 《오사까아사히신붕》을 비롯한 일본의 출판보도물들과 쏘련(당시)의 따쓰통신, 《쁘라우다》를 비롯한 외국의 신문, 통신들이 보천보전투소식을 전하는데 지면과 시간을 아끼지 않은 사실들은 이 전투가 가지는 중대한 의의를 말해주고있다.

돌이켜보면 우리 혁명력사는 보천보전투와 같은 승리의 련속과정이라고도 말할수 있다.우리 혁명의 어느 시기, 어느 단계에서나 보천보의 불길이 타오르지 않은적이 없다.가까운 몇해어간에만 놓고보더라도 반만년력사에 일찌기 없었던 민족사적사변들을 련이어 안아오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승리의 희열을 안으시고 백두산에 오르시였던 불멸의 모습은 항일전의 그날 보천보에서 조선민족의 기개와 정신을 만천하에 떨치시던 빨찌산 김대장의 걸출한 위인상 그대로였다.

보천보전투는 교과서의 글줄이나 지나간 력사속에가 아니라 우리 인민의 마음속에 민족자존의 기념비로 높이 서있다.

위대한 수령님의 작전적방침을 높이 받들고 항일혁명투사들이 조국으로 진군하던 때와 같은 필승의 기상으로 사회주의강국건설에 떨쳐나선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서는 지금도 보천보전투를 앞두고 그 어떤 성공여부나 담보를 생각하기 전에 해낼수 있습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라고 웨치던 투사들의 절절한 목소리가 쟁쟁히 울리고있다.

우리에게는 백두산의 기질을 천품으로 타고나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계시고 백두의 혁명정신, 백두의 칼바람정신으로 심장을 끓이는 강의한 인민이 있으며 보천보전투승리와 같은 위대한 전통이 있다.

우리 인민은 보천보전투를 영원히 잊지 않을것이며 보천보의 홰불, 승리와 신념의 홰불을 더욱 높이 추켜들것이다.

글 본사기자 김준혁
사진 본사기자 김광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