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8(2019)년 6월 4일 로동신문
혁명열, 투쟁열로 한생을 불태운 흥남비료련합기업소 당위원회
우리는 지금 한편의 시를 마주하고있다. … 백두산이 굽어보는 흥남땅에서 … 내 당선전일군의 본분을 다해가리라
흥남비료련합기업소 당위원회 선전부위원장이였던 김정태동무가 군중문학작품집 《전변의 새 아침》에 창작발표한 시 《그 좌지, 그 참호를 지켜》이다. 당의 사상과 믿음을 한생의 재부로 간직하고
19년전 1월, 흥남비료련합기업소 정문앞에 못박힌듯 서있는 사람이 있었다.당위원회 선전부위원장으로 갓 임명받은 김정태동무였다. 당은 언제나 흥남의 로동계급을 믿는다는 흥남비료혁명사적관을 돌아보는 그의 가슴속에 뜨겁게 파도쳐왔다.비료는 곧 쌀이고 쌀은 곧 사회주의라고 하시면서 흥남을 농업전선의 병기창, 굴지의 화학비료생산기지로 강화발전시키려 바쳐오신 흥남땅에 깃든 절세위인들의 혁명사적과 위대성을 대중의 심장속에 더 깊이 체득시키는것, 바로 그것이 사업의 종자, 핵으로 되여야 함을 그는 심장으로 느꼈다. 《우리 당사상일군들의 어깨가 참 무겁습니다.》 여러해전 초겨울 천내군부근의 도로에서 손에 온통 기름칠을 하며 차수리에 여념이 없는 두사람이 있었다.그중 한명이 김정태동무였다.꼭 이렇게 고생스럽게 가야만 하는가고 하는 운전사에게 그는 말했다. 《어쩌겠소.하루라도 빨리 모시고싶은걸.우리 당선전일군들이 그래서 있는게 아니겠소.》 그때까지만 하여도 기업소에는 그래서 차상태가 시원치 않은것을 알면서도 운전사를 재촉하여 모자이크벽화받침돌을 해결하러 떠난 걸음이였다. 빈틈없는 준비를 갖춘 그는 돌격대장, 시공지도원이 되여 모자이크영상작품을 정중히 모시기 위한 사업을 지휘하였다.40일만에 드디여 모자이크벽화 《흥남의 로동계급속에 계시는 (이곳에 우리 즉시 공기갈이를 하는 한편 팔을 걷어붙이고 로동자들과 함께 바닥을 여러번 깨끗이 닦아낸 그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것을 두번세번 확인한 다음에야 마음을 놓았다. 그때 그가 일군들에게 한 말은 길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절세의 위인들의 불멸의 령도업적을 옹호고수하는것을 첫째가는 본분으로, 숭고한 도덕의리로 간직한 그였기에 흥남에서 평양까지 열번나마 오르내리며 항일혁명투사들도 찾아가고 대소한추위에 발을 얼구면서도 끝끝내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현지지도사적을 고증하여 사적관에 전시할수 있었다.지난해에는 과학적인 혁명사적물영구보존체계를 도적으로 제일먼저 도입하여 혁명의 만년재보를 영구보존할수 있게 하였다. 지난 4월 19일 새벽, 김정태동무는 교양구역을 오래도록 돌아보았다.연혁소개실과 혁명사적비, 《흥남아 일어나라 백두산이 본다 전민이 너를 따르리! 항일만이 살길》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께서 1930년대 중엽 신흥지구에 남기신 이 구호문헌을 처음 모실 때의 일이 어제런듯 떠올랐다. 김정태동무는 자기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항일무장투쟁시기부터 로동계급이 집중된 흥남지구를 중시하신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뜻을 새겨주어 비료산을 더 높이 쌓도록 종업원들을 고무추동하기 위한 일인데 한시도 미룰수 없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당의 사상사업원칙만은 베고 죽을 신념을 지닌 당선전일군의 배짱에 의하여 구호문헌은 종업원들이 출퇴근길에 늘 볼수 있는 장소에 모셔졌다.지난해에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색을 모르게 모자이크벽화로 훌륭히 형상되였다. 사적관일군들을 만나 올해 봄에 심은 잣나무들을 모두 살릴데 대한 문제, 외부를 더 훌륭하고 품위있게 개건하기 위한 문제 등을 토의한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것은 그로부터 불과 몇시간후였다. 생의 마지막날까지 보여준 그의 모습은 말해주었다.
영원한 참호
당선전일군의 전투좌지, 참호는 어디인가.그것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김정태동무는 자기의 불같은 한생으로 그에 대답을 주었다. 10년전 2월 기업소를 찾으시여 갈탄가스화에 의한 주체비료생산공정을 건설할데 대한 과업을 주신 그길로 락원까지 단행하신 우리 잠들줄 모르는 공사장을 돌아보던 깊은 밤 그는 영예게시판을 전지불로 비치며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보는 한 소년을 보게 되였다.머리에 번개치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흥남가스화공사장은 그를 비롯한 당선전일군들을 사상전선의 기수, 화선초병으로 키우는 혁명대학이기도 하였다.기초공사를 할 때에는 부서일군들과 함께 노래 《적기가》, 《결사전가》를 부르며 허리치는 물속에 남먼저 뛰여들었고 설비조립전투때에는 -15℃를 오르내리는 추위속에서 기동예술선동대원들과 함께 경제선동의 힘찬 포성을 울리였다. 흥남의 군중문화예술을 당이 바라는 높이에! 이것은 김정태동무가 사업전기간 비상한 정열을 기울인 문제였다. 로동계급의 대부대가 있는 흥남이 군중문화예술에서도 본보기가 되라는것은 처음에는 악기도 력량도 다 부족했다.악기를 해결하려고 그는 걸음도 많이 하였다.내부예비를 동원하여 마련한 유휴자재를 실은 자동차가 고장나 눈덮인 마식령에서 이틀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고 악기를 싣고 비내리는 령길을 넘다가 미끄러져 개울에 빠진 차를 끌어내느라 찬비에 온몸을 적시며 신고하기도 하였다. 평양으로, 해주로 동분서주한 끝에 백수십대의 금관악기와 북을 해결하였을 때의 기쁨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하랴. 그렇게 준비시킨 100명 취주악대가 5.1절에 흥남구역경기장을 돌며 노래 《승리의 5월》을 연주했는데 사람들의 반영이 대단했다. 모진 곤난속에서도 이렇게 창작된 재담 《흥남의 목소리》는 현지지도의 길에 이곳 예술소조원들의 공연을 세차례나 보아주신 당의 군중문화예술방침관철을 위해 그가 비상한 정력을 기울인 이야기들을 다는 전할수 없다.자신부터 실천적모범을 보이면서 일군들과 종업원들을 이끌어 《흥남아 일어나라 백두산이 본다》, 《단숨에》를 비롯한 3권의 군중문학작품집을 내놓고 《흥남은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에서 대중발동의 메아리는 끊임없이 울리였고 화선나팔소리는 훌륭한 결실로 이어지군 하였다. 몇해전 가스청정공정 조탈류탑에 뜻밖의 정황이 발생했을 때였다. 급히 달려온 김정태동무의 귀전에 로동자들의 맥빠진 소리가 들려왔다.수십m나 되는 저 높은 탑우로 어떻게 그 많은 촉매제와 부분품을 끌어올려 보수하겠는가.… 가슴이 조여들었다.당이 준 비료생산계획을 수행하는가 못하는가 하는것이 바로 조탈류탑의 정상가동에 달려있기때문이였다. 수십m나 되는 탑과 로동자들을 번갈아보는 그의 귀전에 영광스럽게도 조선로동당 제8차 사상일군대회 당의 붉은 정수분자들인 사상일군들은 꺼지지 않는 홰불이 되고 우렁찬 나팔이 되여야 한다! 그는 주저없이 사다리에 발을 올려놓았다.한m 또 한m… 온몸이 땀주머니가 되여 아스라한 탑우에 오른 그에게서 나직하나 비장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결전의 언덕에서 한치 물러설 때 조국은 천리강토를 잃게 되고 비료고지에서 한치 물러설 때 조국은 만리 황금들판을 잃는다, 한줌의 비료를 쌀 천t의 무게로 생각하며 비료고지를 사수하자는 내용의 시였다. 전화의 용사들처럼 결사전을 벌려서라도 당이 준 임무를 수행하자는 참신한 화선선동은 대중의 심장을 명중했다.5일이상 걸려야 한다던 탑보수가 3일동안에 전부 끝났던것이다.시비년도 비료생산계획은 수행되였다. 당정책관철의 제일선, 바로 그것이 생의 마지막까지 온넋을 불태우며 그가 지켜온 참호였다.
값높은 삶의 자욱은 지워지지 않는다
지난 3월초, 수도 평양에서 열린 제2차 전국당초급선전일군대회의 높은 연단에서 토론하는 흥남의 모범선동원이 있었다.변배전직장 보수작업반 김성화동무였다. 영광의 대회장에서 그는 자기의 성장의 갈피갈피에 깃든 당조직의 손길에 대하여 뜨겁게 되새겼다. 처녀시절 모범선동원의 영예를 지닌 그를 따르는 총각은 많았다.자기자신도 복잡한 가정주위환경때문에 번민하며 일에 마력을 내지 못하는 총각을 사랑하게 될줄 몰랐다.부모와 주위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쳐 고민하는 처녀선동원을 극력 지지해준 일군이 김정태동무였다.사랑하면 됐지 뭘 주저하는가.우리 당은 부모의 과거를 놓고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작업반의 맏누이, 화목한 가정의 며느리로 사랑을 받으며 모범선동원의 영예를 빛내여가던 그가 뜻밖의 병을 만나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을 때 엄하게 타이르며 친아버지의 정으로 일으켜세워 초소에 세워준 사람도 바로 선전부위원장이였다. 김정태동무가 사랑과 정으로 참된 삶의 길을 걷도록 이끌어준 사람은 미처 다 셀수 없을 정도이다.가정에서 보약과 영양식품을 마련해가지고 매일과 같이 찾아가 힘과 고무를 주어 소생시킨 기동예술선동대장, 부모없는 설음을 느낄세라 자기 집에서 텔레비죤까지 갖추어 결혼상을 차려준 사적관강사… 합숙생들에 대한 그의 정은 자별했다. 합숙생들을 위한 날이면 출가한 딸들까지 동원하여 갖가지 음식을 성의껏 준비해가지고와서는 맛있게 먹는 모습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군 하였다.길에서 만나면 배고프지 않은가 다정히 물어보고 신발이 해진것을 보면 새 신발을 마련해주고서야 마음을 놓는 그를 합숙생들은 친아버지처럼 따랐다. 가지많은 나무가 바람 잘 날 없다고 그의 곁에는 늘 사람들이 끓었다.아들결혼식을 한다고 찾아오는 사람, 집수리를 하려는데 자재를 해결해달라고 찾아오는 사람… 아무리 바쁠 때 찾아와도, 아무리 어려운 부탁이라도 그는 얼굴색 한번 달리하지 않고 수첩에 적어두었다가 해결해주군 하였다.그러느라니 제 집재산을 들어내오는 일이 빈번하였다. 그의 집살림이라고 남보다 풍족한것은 아니였다.돼지우리를 여러칸 만들어놓고 가정축산을 피나게 하느라 안해인 김정옥동무의 손은 마를 날이 없었다.매해 20여마리의 돼지를 길러 남편과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하고 교양거점꾸리기에 동원된 돌격대원들에게도 보내주군 하였다.터밭에서 가꾼 남새로 김치를 여러 독 담그어놓고 겨우내, 봄내 로동자합숙이며 건설장에 퍼내갈 때마다 남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에 그의 안해는 힘든줄을 몰랐다. 김정태동무의 청렴결백성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올해 태양절에 사적관일군은 축사에서 생산한 얼마간의 닭알을 선전부위원장의 집에 보냈었다.축사부지도 잡아주고 종업원들과 블로크도 함께 찍으면서 왼심을 쓴 당일군, 더우기는 사적관개건을 할 때마다 집에서 기른 돼지를 보내준 그와 안해에게 인사를 하는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던것이다.집에 혼자 있던 둘째딸이 영문도 모르고 받았다. 그런데 그 일로 김정태동무의 노여움을 사게 될줄이야. 다음날 사적관에 나온 그는 관장과 당세포위원장을 무섭게 다불러댔다. 《그래 그 축사가 이 선전부위원장을 위한거요, 아니면 낯내기나 하라는거요?》 그렇게 노한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였다. 《나나 동무들이나 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여나 당의 믿음으로 일군이 되였는데 근본을 잊고 특세를 부려서야 안되지.》 그날 사적관일군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너희들은 당일군의 자식들이다.말 한마디를 하고 행동을 하나 해도 당일군가족이라는걸 항상 명심해야 한다.》 아버지의 이 말을 자장가처럼 들으며 자란 자식들은 옷차림과 머리단장에서도 학습에서도 언제나 모범이였다. 기업소종업원들에게는 그토록 인정많고 다심한 그였지만 안해와 자식들에게는 너무도 해준것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는 해의 어느 여름날 아들 광철이가 힘든 부탁을 한적이 있었다.군대에 나가기 전에 한번만 가족이 함께 해수욕을 하자고. 《지금은 바빠서 정말 시간을 낼수 없구나.이번엔 너희들끼리 가렴.년로보장을 받으면 매일이라도 함께 가마.》 이 말은 영원히 지킬수 없는 약속으로 남았다. 조국보위초소에 섰던 아들이 급병으로 생사기로에 놓였다는 급보를 받은 그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함흥화학공업대학(당시)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아들이 조국이 있고야 과학탐구도 행복도 있다면서 박사원에서 공부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조국보위초소에 달려나간지도 어느덧 3년, 생각같아서는 당장 아들에게로 달려가고싶었다.하지만… 피나게 입술을 강다물고 사적관보수공사에 쓸 자재를 구입하러 그는 단천으로 떠났다.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것 같은 그 아들을 마지막 한번만이라도 보고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으랴. (광철아, 용서해라.그리고 리해해다오.이 아버지마음을.) 아들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그는 자재를 싣고 돌아오는 길에 들었다.억장이 무너져내리는 슬픔을 누르며 현장을 떠나지 않고 공사지휘를 하는 그의 모습은 사람들의 망막에 깊이 새겨졌다. 김정태동무가 눈을 감은 후 그의 책상서랍에서는 보풀인 아들의 렬사증이 나왔다.얼마나 쓸어보았는지 아들의 사진도 렬사증가장자리도 닳아있었다. 그 렬사증이 또 한번 사람들을 울리였다.그리고 말없이 깨우쳐주었다.참된 당선전일군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문화회관개건을 빨리 끝내고 예술소조공연을 본때있게 해보기요.》 김정태동무가 의식을 잃기 얼마전에 부서일군에게 한 말이다. 그래서 문화회관개건을 발기한 때로부터 줄창 현장에서 살다싶이 한 그였다.쓰러지기 전에 그가 마지막으로 보아준것도 새로 꾸리는 문화회관에 놓을 관람의자였다. 평범한 농민가정에서 다섯 남매의 막내로 태여난 자기를 당선전일군으로 내세워준 당의 믿음에 천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해야겠다고 입버릇처럼 외우며 하루를 백날천날맞잡이로 일해온 김정태동무, 그는 지금 우리곁에 없다.하지만 참된 당선전일군의 모습은 흥남로동계급의 심장속에 살아있다. 그가 울리는 진격의 나팔소리는 주체비료생산의 동음과 더불어 흥남의 하늘가에 오늘도 끝없이 메아리치고있다. 본사기자 김향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