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8(2019)년 6월 14일 로동신문
영광의 자욱을 따라 간석지벌의 사연깊은 새땅 증산군 풍정협동농장을 찾아서
증산읍에서 남서쪽으로 50리정도 가면 풍정리에 이르게 된다.소재지마을이 있는 둔덕에 오르면 넓고 기름진 간석지벌이 안겨든다. 서해기슭까지 아득하게 펼쳐진 1 500평짜리 포전들, 가로세로 뻗은 일매진 논뚝들로 하여 간석지벌은 거대한 바둑판을 방불케 한다. 우리가 풍정협동농장에 도착하였을 때 높낮게 솟아오른 등성이들에서 농촌문화주택들이 해빛에 창문을 반짝이고있었다.뜨락또르들이 분주히 오가는 포전길들과 아담하고 산뜻한 문화주택마을들은 농촌의 정서를 한결 진하게 해주고있었다. 수천정보에 달하는 농경지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우리에게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 관리위원장은 력사적인 시정연설에서 농업부문에서 경지면적보장에 특별한 주목을 돌릴데 대하여 강조하시던 《간석지논벌을 흐뭇하게 바라볼 때마다 해방전 해마다 사나운 해풍에 숱한 농가의 이영이 짚검부레기처럼 날아가버리고 남녀로소모두가 시뿌연 마타리물에 찌들어 허리를 펴지 못하던 풍정리, 《지지리 고생하던 우리 풍정리사람들이 초가집자리에 일떠선 문화주택에서 맑은 수도물을 마시게 된것도 50년전 그날을 떠나 생각할수 없습니다.》 추억을 더듬는 관리위원장의 눈굽은 축축히 젖어있었다. 《모든 부문, 모든 단위에서 자기 단위에 깃든 관리위원장은 풍정리에 깃든 사연중에서 50년전 봄과 가을에 있은 일을 먼저 이야기하였다. 주체58(1969)년 3월 하순 1만 5천t, 농장이 생겨 처음 되는 알곡생산목표였다.농장에 대한 당시의 부침땅은 거의다 소출이 낮았다.그래서 해마다 알곡 1만t생산을 목표로 내세우고 애를 썼지만 한번도 실현해보지 못하였다.그랬던지라 농장일군들은 1만 5천t이라는 알곡생산목표앞에서 걱정도 없지 않았다. 그때 농장일군들이 우리는 혁명사적교양실에서 그날 수수한 옷을 입으시고 밭머리에서 농장일군들과 담화하시는 강사는 우리에게 우리의 귀전에서는 인민들의 먹는 문제해결을 위해 기울이시는 세월이 멀리 흘러 어느덧 50년, 지금은 무연한 옥토, 그 끝에서 출렁이는 푸른 바다만 아니라면 간석지벌이라고 믿기 어려운 기름진 벌에서 갈대와 잡초들이 키를 넘게 자라고 갈게들이 득실거리던 옛 황무지의 흔적을 어찌 찾아볼수 있으랴. 오랜 세월 버림받던 땅을 옥토로 가꾸시기 위해 소금물이 질쩍거리는 길을 걸으신 그날의 내 조국의 땅! 항일의 혈전만리길에서 우리 밀영의 깊은 밤 사령부귀틀집에서 등잔불로 조선지도를 비쳐보시면서 해방된 조국의 래일을 그려보실 때 우리 독자들이여, 잠시 지도를 펼치시라.오랜 세월 황무지였던 어제날의 간석지들과 크고작은 갈섬들, 지난날 겨우내 굶주리며 간수해온 목숨과도 같은 종자를 뿌렸건만 하루아침에 장마비에 씻겨내리던 산비탈밭들을 더듬어보시라.옥토로, 비단섬으로, 다락논으로 변모된 그 땅 한치한치에는 한줌의 흙일지라도 조국의 번영을 위한 재부가 되고 인민의 행복을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게 하시려 우리 달아오른 눈길로 간석지의 새땅을 더듬어보는 우리에게 관리위원장은 《그날 당시 풍정리에서는 마을들의 수도화를 실현하여야 했다.농장의 마을들은 사방 20~30리 벌판에 널려있었는데 매 마을에 상수도를 놓자면 막대한 량의 수도관이 있어야 하였다.실태를 보고받으신 참으로 묘안이였다.농장일군들은 막혔던 가슴이 확 트이는것 같았다.사실 수도화를 하는데서도 그렇고 농장을 문화적으로 꾸리는데서 농장일군들이 제일 골머리를 앓던 문제가 벌판가운데 널려있는 마을들이였다.그러나 농장일군들은 벌판에 옹기종기 틀고앉은 집들이 농장을 규모있게 꾸리는데서 장애로 되고있다는데만 집착하였을뿐 그 집들을 옮기면 새땅을 적지 않게 얻어낼수 있다는데 대해서는 미처 타산하지 못하였다.그들은 알곡증산의 중요한 예비의 하나가 마을정리에 있다는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였다. 포전도 멋들어지게 정리하고 새땅도 많이 얻어내게 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꿩먹고 알먹기가 아닌가!…온 농장은 기쁨으로 설레이였다. 풍정리사람들은 지금도 50년전 그해 가을 또다시 농장을 찾으신 《나는 풍정협동농장이 알곡 2만t농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농장원들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싶었다.해방전에는 리의 총면적에 비해 부침땅이 보잘것없이 작은데다가 소출도 다해서 1 300t이 되나마나하던 풍정리가 이제는 2만t을 내다보게 되다니, 이것은 머지않아 농장이 알곡생산에서 나라적으로 손꼽히게 된다는것이 아닌가!… 그날은 9월 22일, 수십년세월 년년이 쌓아오신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이 우리 한해에 두차례나 풍정리를 찾으시고 토지정리와 개간에 필요한 굴착기와 불도젤을 비롯한 기계설비들과 포전작업을 기계화, 화학화하는데 충분한 백수십대의 뜨락또르, 수십대의 화물자동차 등 각종 기계수단들을 보내주신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나서 관리위원장은 지난 고난의 행군, 강행군시기를 추억하였다. 1만 5천t의 알곡고지를 점령한데 이어 2만t의 새 승리를 향해 해마다 경지면적과 알곡생산량을 늘여만 가던 풍정리, 제국주의련합세력의 끈질긴 반공화국고립압살책동과 몇해째 계속된 자연재해로 우리 조국이 겪던 류례없는 고난과 시련은 풍정벌에도 덮쳐들었다.리에서는 몇해째 적지 않은 논이 묵어나고있었다.고난의 나날 풍정사람들이 많은 고생을 하였지만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것은 부침땅을 묵이는데서 오는 마음고생이였다고 한다. 그때 농장을 산악같이 일떠세운것은 가장 어려운 시기 (우리 풍정벌이 과연 어떤 땅인가.서해기슭의 이 간석지논 한치한치에 그무렵 이런 이야기끝에 관리위원장은 논판들에서는 실한 벼포기들이 해빛에 청청한 잎새를 반짝거리고있었다.한 논판에 다가가 농장원들에게 바람세찬 간석지벌실정에서 벼모들을 층하없이 가쯘하게 키워 논에 낸 비결을 묻자 오래전에 관리위원장은 영광의 땅을 대를 이어 가꾸고 꽃피워가는 풍정사람들의 삶은 높은 알곡증산성과로 이 고장을 떠나면서 우리는 간석지벌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사연깊은 땅에서 보고 들은 모든것을 어찌 한편의 글에 다 담을수 있겠는가.허나 한가지만은 재삼 적고싶다. 우리 그것은 단순히 부침땅이 아니였다.후손만대번영의 재보일뿐아니라 사람들에게 조국의 땅이 얼마나 귀중하며 그것을 어떻게 사랑하고 가꾸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애국의 교과서였다. 글 본사기자 한영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