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8(2019)년 7월 3일 로동신문
자력갱생으로 승리떨쳐온 력사를 돌이켜보며 항일의 불길속에서 창조된
연길폭탄, 그 이름과 더불어 아득히 흘러간 세월의 갈피를 조용히 더듬어보느라면 백두밀림의 마치소리가 오늘도 쟁쟁히 들려오는듯싶다. 우리 《자력갱생은 오래고도 간고한 투쟁의 길에서 시종일관 높이 발휘되여온 우리 혁명의 자랑스러운 전통입니다.》 당시 유격구의 병기창들에서 제일 절실하게 요구되는것은 화약이였다. 바로 이러한 때 화약을 자체로 만들 대담한 결심을 내리시고 화약제조의 력사와 자료들을 깊이 연구하시는 한편 그 과정에 화약의 기본원료인 염초를 민간에서도 생산할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신분은 병기창들에서 화약을 자체로 만든다고 하자 어떤 사람들은 머리를 기웃거리였다.맨손으로 어떻게 화약을 만들수 있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소왕청유격근거지를 찾으신 병기창일군들은 연길폭탄제작에 자기의 모든 심혈을 다 바친 병기창일군들가운데는 손원금동지는 폭탄제작에 필요한 장약함을 만들다가 종이와 천이 모자라면 다른 사람들이 미처 생각할 사이도 없이 한밤중에 마을로 뛰여내려가 자기 집 문창호지와 하나밖에 없는 이불까지 날라왔고 철사가 모자라 작탄제작에 지장을 받으면 수십리밖에까지 달려가 수백m나 되는 적들의 전화선을 끊어오기도 했다.류황과 무쇠쪼각, 양철판을 구해오기 위해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는 밤길도 주저없이 떠나군 하였다. 그는 작업도중 폭발사고로 두눈을 잃는 불행까지 당했다.그러나 손원금동지는 실명의 쓰라린 아픔속에서도 락심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동무들, 슬퍼말라. 비록 두눈은 잃었지만 나에게는 심장이 남아있지 않는가.두팔이 있고 두다리가 있지 않는가!》라고 하면서 오히려 동지들을 위로하였다. 연길폭탄제작에 자기의 몸과 마음을 깡그리 바친 손원금동지야말로 강쇠같은 자력갱생정신의 소유자였다. 후날 원쑤들에게 체포되여 화형을 당하는 날 그는 이런 마지막말을 남기였다. 《여러분, 나에게는 눈이 없습니다.그러나 해방된 조국산천이 환히 보입니다.승리의 날까지 굳세게 싸워주십시오! 조선혁명 만세!》 25살의 애젊은 청년인 손원금동지는 이렇게 한생을 마치였다. 1933년 11월 연길현유격근거지의 병기창성원들이 100개의 작탄을 단 3일동안에 만들어낼데 대한 과업을 받았을 때였다. 당시 조건과 환경은 이루 말할수 없이 어려웠다.작업장이라고 해야 통바람이 스며드는 좁은 초막이였는데 그안에 작업대까지 설치해놓고보니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수도 없었고 추위에 손가락이 곱아들어 화약을 다지는 일도, 쇠줄을 감는 일도 뜻대로 해낼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힘들다거나 춥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작업을 시작하여 사흘째 되는 날 부족되는 작탄재료를 얻기 위해 마을로 내려갔던 사람들이 쇠가마와 염초를 뽑을 흙을 한짐씩 지고 돌아왔다.그런데 파편쪼각을 만들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마치로 아무리 두드려도 가마는 좀처럼 깨지지 않았다.더구나 적들이 무시로 주변을 싸다니는 형편이여서 쇠소리를 내며 마음대로 내려칠수도 없었다. 이때였다. 쇠가마를 이윽토록 내려다보던 《작탄령감》이라고 부르는 한 로인이 아무말없이 자기의 솜덧저고리를 벗어 가마우에 덮어놓는것이였다.그리고는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세차게 마치질을 하기 시작했다.그럴 때마다 가마를 싼 덧저고리는 구멍이 숭숭 뚫어졌다.단벌옷이 못쓰게 되는것을 더 보고만 있을수 없어 사람들이 그를 만류하자 로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필요하다면 손바닥이라도 들이대고 가마를 까부셔야 할것이 아니요…》 며칠을 굶은데다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에서 쉼없이 마치질을 해대는 로인의 얼굴로 땀방울이 비오듯 흘러내렸다.어느덧 그의 덧저고리는 갈기갈기 찢겨져 형태마저 알아볼수 없게 되였다.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옷을 벗어들고 나섰다. 강추위와 눈보라가 홑내의를 뚫고 온몸에 스며들었으나 맡은 임무를 기어이 완수하여 원쑤를 무자비하게 족칠 그들의 굳센 신념과 의지는 꺾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연길현의 병기창성원들은 단 3일동안에 100개의 작탄을 만들어 싸움터로 보내줌으로써 유격구방어전투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렇듯 우리 혁명의 제1세대들은 본사기자 리남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