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8(2019)년 7월 10일 로동신문
우리 당이 키운 바다의 용장은 오늘도 진군의 항로우에 있다 223호수산사업소 지배인이였던 진봉준동지에 대한 이야기
우리 조국에는 한생을 묵묵히 한초소에서 일하면서 값높은 삶의 자욱을 뚜렷이 남긴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가운데는 조선인민군 223호수산사업소 지배인이였던 진봉준동지도 있다. 《황금해력사창조의 선구자들, 당의 수산정책을 절대적인 진리로, 신념으로 간직하고 온넋과 량심의 땀방울을 아낌없이 바쳐 결사관철한 인민군대 수산부문 일군들과 어로공들의 위훈을 우리 당과 조국과 인민은 영원히 잊지 않을것입니다.》 우리 당의 수산정책을 절대적인 진리로, 신념으로 간직하고 온넋과 량심을 깨끗이 바쳐왔으며 황금해력사창조의 앞장에 섰던 인민군대 수산부문 일군의 한사람인 진봉준동지, 그는 60여년세월 순간도 변함이 없는 진실한 모습으로, 단 한구간의 탈선도 없는 곧바른 걸음으로 삶의 영예란 무엇이며 참다운 인생은 어떤것인가를 보여주었다. 당의 전사로서, 공화국공민으로서, 일군으로서 그가 남긴 생의 자욱마다에는 백옥처럼 순결한 충정과 불같은 애국헌신의 세계가 거울처럼 비껴있다.
인생의 좌표는 오직 하나
해방전 함경남도 락원군(현재)의 어느 한 농촌마을에서 태여난 진봉준동지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뛰여나게 잘하였다.온 마을 사람들이 대대로 쪼들려살던 농사군가문에 유명한 박사가 나올것이라고 하면서 함께 기뻐하였다. 청춘의 포부와 희망으로 가슴부풀던 그는 청년들을 바다로 부르는 당의 호소에 접하게 되였다.바다야말로 진취성이 강하고 정열에 불타는 청년들의 일터라고 하신 열혈청년 진봉준은 주저없이 결심을 내렸다. 이렇게 되여 그는 동해기슭의 어느 한 포구에 삶의 닻을 내리였다. 고지식한 성품과 불같은 열정, 진취적인 기질을 지닌 그는 얼마 안되여 어엿한 바다사람이 되였고 몇해후에는 수산협동조합의 어로장 또 몇해후에는 생산지도원 그리고 책임기사, 관리위원장으로까지 성장하였다. 사람들은 한번 결심한 일은 끝장을 볼 때까지 내밀고 원칙앞에서는 칼날우에라도 올라서는 진봉준동지의 드센 배짱이 천성이라고 하였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오직 당의 의도대로만 사고하고 실천하는 나날에 체질화된 성품이였다. 주체80(1991)년 12월 어느날이였다.그는 뜻밖에도 회의장에서 돌아온 길로 그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물온도와 흐름, 어황상태 등을 다시 면밀히 조사한데 기초하여 덤장을 놓았는데 얼마후 그물을 춰올려보니 물고기가 수백㎏은 실히 되였다. 그는 1997년 여름 어느날 진봉준동지는 뜻밖의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당의 조치에 따라 그가 일하는 수산협동조합이 인민군대 수산단위로 되였던것이다. 언제 봐야 과묵하고 뚝뚝하던 남편이 흥분하여 어쩔바를 모르는 모습을 본 심금남녀성이 잘 리해되지 않아 말을 꺼냈다. 《건물도 그 건물, 사람도 그 사람… 단위명칭만 달라졌을뿐인데…》 《당신은 내 심정을 다는 모를거요.난 오늘 새 생명으로 다시 태여났소. 인민군대 수산단위의 영예를 안겨준 당의 조치를 그는 이렇듯 무겁게 받아들이였다.그해에 사업소에서는 례년에 없이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물고기를 차에 가득 싣고 인민군군인들을 찾아간 진봉준동지는 말했다. 《앞으로 물고기는 걱정마십시오.》 비록 짧은 말이였지만 그것은 마음속군복을 입고 새 삶을 시작한 한 일군의 가슴속에 꽉 차있는 엄숙한 군인선서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진봉준동지는 늘 품고다니는 수첩을 펼치였다.첫 페지에는 몇해전 수산부문 책임일군협의회에 참가하고 돌아온 날에 적은 글이 있었다. 그밑에 진봉준동지는 정자로 써나갔다. 그 맹세를 지키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사품치는 날바다우에서 어로공들과 함께 통강냉이를 씹으며 《조금만 더 참고 견디기요.이제 꼭 웃으며 오늘을 추억할 때가 있을거요.》라고 하면서 이겨낸 날과 날이 얼마였던가. 마침내 사업소에서는 인민군군인들에게 기준공급량의 4배에 달하는 물고기를 보내주는 기적적인 성과를 이룩할수 있었다. 이렇게 당이 준 임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결사관철하는 나날에 그는 주체100(2011)년 12월 며칠후 그는 당조직에 찾아가 속생각을 터놓았다. 영광의 그날 진봉준동지는 어로공들과 함께 계시는 그때 진봉준동지는 이미 70대였지만 청춘의 열정으로 일에 몸을 잠그었다. 주체102(2013)년 5월 그는 로쇠한 육체가 한스러웠지만 마음을 더욱 굳게 다잡고 일부 단위들에서 바다에 물고기가 없다고 우는소리를 하고 이것저것 조건타발을 할 때 능숙하게 어로전투를 조직지휘하여 1만t이상의 물고기를 잡았으며 인민군대 수산단위적으로 언제나 손꼽히는 실적을 내였다. 그해말 조선인민군 수산부문열성자회의에서 비상한 각오와 완강한 실천력을 발휘하여 당의 명령지시를 결사관철한 인민군대안의 수산부문 일군들과 종업원들의 자랑찬 위훈을 높이 평가하신 하늘같은 그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고저 진봉준동지는 인생의 마지막시간표를 애국충정의 분초로 꽉 채웠다. 언제인가 밤새 아픔에 시달린 몸으로 집을 나서는 남편을 보다못해 안해가 앞을 막아나선적이 있었다.하루만 좀 쉴수 없는가고 애원하는 안해에게 그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라도 그렇게도 강의하고 열정적이던 그가 끝내 불치의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된것은 지난 2월이였다. 어느날 그는 평양의 병원에 함께 와있던 딸 진영숙을 가까이 불러앉히였다. 《사람은 죽어 땅에 묻힌다고 하지만 난 바다에 묻혀야 할 사람이야.》 진영숙동무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그의 뇌리에는 몇해전 인민군대 수산단위들의 도루메기잡이 첫날 실적을 보고받으시고 너무도 기쁘시여 일군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정담아 써주신 《아버지, 래일 사업소로 내려갑시다.》 《고맙다!》 이것이 진영숙동무가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대화였다.생명력이 마지막한계점에 이른 시각에 가까스로 숨을 톺으며 진봉준동지는 사업소일군에게 절곡히 당부했다. 《우리 심장이 마지막고동을 치는 순간에도 오직
자력갱생의 노를 힘차게 저어
자력갱생! 이것은 진봉준동지가 당의 수산정책관철의 길에서 순간도 놓지 않은 투쟁의 무기였다. 20여년전 어느날이였다. 이른새벽 사업소구내를 돌아보는 진봉준동지의 마음은 개운치 못했다.손끝이 갈라터지고 신발창이 닳도록 뛰여다니며 이룩해놓은 물질기술적토대, 많은 사람들의 선망을 받던 사업소의 모습이였다.하지만 인민군대 수산단위 책임자라는 당의 크나큰 신임을 받아안고보니 그에게는 마음에 차지 않았던것이다. 얼마후 종업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심정을 털어놓았다. 《이제부터 우리모두는 혁명군대의 전사들이요.군인정신과 기질로 본때있게 일해봅시다.》 진봉준동지는 고기배현대화를 선차적인 과업으로 내세웠다.당시의 조건에서 배들을 현대화하는 사업은 아름찬 과업이 아닐수 없었다.한푼한푼의 자금이 귀하여 그도 종업원들도 허리띠를 조이며 시련을 겪어야 했다.그는 먹을것을 다 먹으면서 배부를 때 하는것이 당정책관철이 아니라고, 고생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언제 가도 제힘으로 일떠설수 없다고 종업원들을 불러일으켜 고기배현대화를 한걸음한걸음 추진시켜나갔다. 몇해후 진봉준동지는 또다시 현대적인 고기배들을 마련할 높은 목표를 사업소앞에 내세웠다.아마 그의 한생에서 그때처럼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쳐본적은 없었을것이다.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는가고 사람들이 물을 때 그는 말했다. 《병사들에게 물고기만 풍족히 먹일수 있다면 난 그보다 더한 일도 하겠소.》 이렇게 되여 사업소에는 10여척이나 되는 현대적인 고기배들이 련이어 생겨나게 되였다.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가까운바다와 먼바다, 깊은바다와 얕은바다에서 각이한 어종의 물고기를 마음먹은대로 잡을수 있게 어군탐색설비, 항해 및 통신설비들을 계속 갖추어나갔다. 이무렵 종업원들의 눈에 비낀 진봉준동지의 모습은 명령을 받으면 《알았습니다.》라는 말밖에 모르는 화선병사, 명령을 집행할 때에는 대중의 앞장에서 《나를 따라 앞으로!》의 구령을 웨치는 화선지휘관이였다. 배수리기지를 꾸릴 때였다.설비제작문제로 골머리를 앓고있던 기술조성원들은 어느날 진봉준동지와 함께 멀리에 있는 한 공장으로 향하게 되였다. 《아니, 지배인동지가 또 어떻게…》 공장일군들은 깜짝 놀랐다. 《우리 기술조성원들에게 다시한번 설명을 좀 해주오.》 그제서야 기술자들은 자기 지배인이 전날 밤에 이곳을 먼저 다녀온 사실을 알게 되였다. 이런 이신작칙의 사업기풍으로 그는 물고기부림설비를 현대적으로 개조하였고 랭동저장고들도 새로 일떠세웠다. 그는 힘에 부칠 때에도 우에다 그 무엇을 풀어달라고 제기한적이 없었다.사람들속에서 그런 의견이 제기될 때마다 절절히 말하군 하였다. 《나라앞에 철든 자식이 됩시다.》 일군의 손은 우에다 무엇을 달라고 내미는 손이 아니라 조국에 자기의 피땀이 스민 창조의 열매를 바치는 손이 되여야 한다는것이 그의 지론이였다. 언제인가 사업소의 한 일군이 지금 있는 배수리자재도 넉넉한데 그렇게 자꾸 쌓아놓아선 뭘하는가고 물은적이 있었다. 그때 진봉준동지는 웃음섞인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 사업소가 한 10년 더 자체로 살아나갈수 있게 토대가 갖추어지면 난 지배인자리를 내놓겠소.》 사업소의 오늘뿐아니라 래일까지도 책임지려는 그의 마음은 이렇듯 깨끗하였다.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으로 사업소를 이끌어나가는 진봉준동지의 이신작칙의 일본새는 과학수산을 위한 두뇌전, 탐구전에서도 높이 발휘되였다. 그는 사업소의 운명을 걸고 끊임없는 사색과 탐구의 생눈길을 걸었다. 새로운 어로방법을 받아들일 때였다.아까운 기름을 소비하면서 몇차례나 시험어로를 진행하였지만 기망당 어획량은 기껏해서 1~2t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진봉준동지는 갑판우에 여러장의 설계도면을 펼쳐놓았다. 《이대로 그물을 한번 개조해보기요.》 일군들과 어로공들은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며칠째 밤을 꼬박 새우더니…) 이 어로방법을 받아들여 사업소에서는 연유 1t당 평균 20t이상의 실적을 냈다. 새로운 착상을 내놓을 때마다 자재와 로력, 작업기일까지 과학적으로 타산된 안을 내놓는 그를 보며 종업원들은 이런 일군과 함께라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벅차오르군 하였다. 진봉준동지가 남긴 사품속에는 날씨와 그에 따르는 바다상태가 구체적으로 분석종합된 한권의 책이 있다.색이 바래고 보풀이 인 그 책은 《걸어다니는 탐지기》로 불리울만큼 바다물의 온도와 색갈, 흐름, 바람방향만 보고도 어장을 척척 알아내는 그의 높은 실력이 어떻게 마련된것인가를 전하고있다. 그는 사람은 모르는것이 죄가 아니라 모르면서도 배우려 하지 않는것이 죄라고 하면서 끊임없이 실력을 높여나갔다.아래일군들로부터 사업정형을 보고받는 과정을 통해서도 배웠고 어로공들과 종업원들이 기탄없이 내놓는 의견에서도 배웠다.어느 사업소에서 새로운 어로방법이 도입되였다든가 어구가 개조되였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것을 파악하기 전에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일욕심은 끝이 없었다.해상지휘체계프로그람도 도입하였고 품질분석실도 높은 수준에서 꾸려놓았다.모든 일군들과 종업원들이 두가지, 세가지의 일을 맡아하도록 기업관리를 짜고들었고 기술력량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도 일관하게 내밀었다. 그 나날에 사업소는 3중3대혁명붉은기, 2중26호모범기대영예상을 쟁취하였으며 해마다 인민경제계획을 훨씬 넘쳐 수행하였다. 이 수산사업소를 돌아본 사람들은 물질기술적토대가 그쯘한 자력갱생의 본보기사업소, 사회주의본태가 살아있는 사업소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는다. 한생토록 자력갱생의 노를 힘차게 저어 당이 맡겨준 한개 단위를 제힘으로 일떠서고 비약하는 선구자집단으로 만든것으로 하여 진봉준동지의 삶은 시대앞에 더더욱 돋보인다.
《우리 지배인》
진봉준동지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그를 두고 진짜 바다사람이라고 부른다. 한것은 너그러운 도량과 인정미가 넘쳐흐르는 그의 사업작풍과도 크게 관련되여있다. 종업원들속에서 스스럼없이 울려나오는 《우리 지배인동지》, 《우리 지배인아바이》라는 부름은 한생토록 대중을 위하여 멸사복무하여온 그의 인간미를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진봉준동지는 일상사업과 생활과정에 종업원들의 얼굴표정, 목소리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조금만 앓는 기색이 보여도 치료대책을 세워주고 가정사를 알아보며 마음쓰군 하였다. 그에게 《위생지도원》이라는 별명이 붙은것도 바로 그래서였다.후날 이 사실을 알게 되였을 때 그는 반색을 했다. 《그게 어째서.지배인이란 말보다 더 듣기 좋구만.》 진봉준동지는 사업소일이 아무리 긴장하여도 해마다 집수리와 관련한 종업원들의 제기를 모두 접수하여 풀어주었다. 언제인가 대줄기같이 쏟아지는 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수리자재를 구하러 떠나는 그를 한 일군이 만류하였다. 《지배인동지가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지붕공사를 당장 해야 할 집들이 있던데… 내가 오늘 이 비를 피한다면 래일은 아마 종업원들의 마음이 나를 외면할거요.》 이렇게 그는 종업원들의 생활상애로를 풀어주기 위해 발이 닳도록 뛰고 또 뛰였다. 가공작업반건물개건이 한창이던 어느날 진봉준동지는 일군들과 모여앉았다. 《이제라도 가공작업반에 종업원휴계실을 꾸려줍시다.》 가공작업반을 새로 꾸리는것만도 힘에 부친데 갑자기 종업원휴계실이라니 일군들은 어안이 벙벙하였다.이때 진봉준동지가 심각히 자기비판을 했다. 《매일과 같이 숱한 물고기를 처리하느라 언제 한번 편히 앉아볼새 없는 녀성들의 수고를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번듯하게 꾸려진 휴계실에 이사를 하는 날 가공작업반 녀성들은 너도나도 눈시울을 적시였다. 《우리 지배인동진 어쩌면…》 《우리 지배인》, 이 진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진봉준동지가 부모잃은 종업원의 마음속그늘도, 물이 잘 나오지 않아 고생한다는 가정부인의 말도 스쳐지나지 않은 이야기를 들을수 있고 어로공들을 위해 애써 마련한 먹는물공급용물차에 깃든 사연도 알수 있다. 언제인가 바다에서 돌아온 한 어로공은 난데없이 지배인이 들려주는 식료품구럭을 받아안게 되였다. 《이번에도 또 생일을 바다에서 보냈지.》 진봉준동지는 이렇게 웅심깊고 사심없는 인정미로 종업원 한사람한사람을 아끼고 위해주었다. 사업소에서 일하다가 사망한 종업원가족들의 생활을 끝까지 책임지고 보살펴주어야 한다는것은 지배인이 스스로 맡아안은 당적분공이였고 량심과 의리로 걸머진 의무였다.그는 조국이 시련을 겪던 시기 사업소에 50명의 부모잃은 아이들을 데려다가 친혈육의 정으로 보살펴주었다.그 한명한명이 모두 사업소일군들이 등에 업고 손목을 잡고 데려온 아이들이였다. 그는 이런 사람이였다.수백명 종업원들의 호주가 되여 구석구석 생활을 돌보아주느라 가정도 잊고 뛰여다녔다. 인민보안원을 하던 아들이 바다에 빠진 아이들을 구원하고 희생되였을 때에도, 흥남비료련합기업소 당책임일군을 하던 사위가 뜻밖에 사망하였을 때에도 종업원들을 위한 밤길을 걸었고 병원에서 생의 마지막나날을 보내면서도 년로보장나이에 이른 종업원들의 생활에 마음썼다. 이런 진봉준지배인의 고상한 품성앞에 머리숙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지배인이 늘 앉아있군 하던 지령실의 수수한 의자를 보면서도, 그의 조언을 받으면서 일손을 놀리던 구내에서도 종업원들은 항상 어디선가 지켜보는듯 한 그의 눈빛을 느끼고있다.어로공들은 바다에서 돌아올 때면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던 그의 얼굴이 삼삼히 떠올라 선듯 부두에 발을 옮겨디디지 못하고있다. 퍼내고퍼내도 끝이 없는 바다물처럼 가슴뜨거운 이야기들이 계속 쏟아져나오는 진봉준동지의 아름다운 생을 한마디로 함축할수 있는 그런 말을 우리는 힘들게 찾지 않았다. 《지배인=고생》 진봉준동지가 수첩의 갈피에 적어넣은 짤막한 글줄이다. 남보다 더 사색하고 남보다 더 일하며 남보다 더 자신을 바치는것이 몸에 푹 배이고 그것을 더없는 삶의 긍지로 생각하는 진봉준동지와 같은 인간만이 지배인이라는 임무를 이렇듯 《고생》이라는 직무 아닌 직무와 나란히 놓을수 있다. 우리 당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인민을 위한 고생을 제일가는 락으로 여기는 일군, 멸사복무의 자욱이 뚜렷한 이런 일군의 삶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게 되는것이다. 지난 2월 외국방문의 길에 오르시는 그 바쁜 속에서 혁명전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보고를 받으신 인민군대 수산부문의 앞장에서 혁신의 기치를 높이 들고 직선침로만을 달려온 바다의 용장 진봉준동지, 본사기자 조향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