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8(2019)년 7월 20일 로동신문

 

만리마시대 전형들의 모범을 따라배우자

사회주의수호전의 전초선에서
기치를 들고나가는 애국농민

재령군 북지협동농장 제1작업반 반장
로력영웅 윤룡석동무에 대한 이야기

 

재령군이라고 하면 해방후 애국미헌납운동의 선구자였던 김제원농민과 2000년대의 김대성애국농민을 낳은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바로 여기서 오늘은 만리마시대의 전형이 배출되였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농사를 잘 짓자면 나라의 쌀독을 책임진 농업부문 일군들과 농장원들이 자기의 책임과 본분을 다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당의 농업정책을 심장으로 받들고 북지협동농장 제1작업반 반장 윤룡석동무는 작업반원들과 함께 지대적특성에 맞는 다수확품종과 선진적인 과학농법을 적극 받아들이고 지력을 높여 해마다 논벼 정보당 10t이상 생산하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농업전선은 사회주의수호전의 전초선이다.농사를 잘 지어 인민들의 식량문제, 먹는 문제를 푸는것은 우리의 사회주의를 지키고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중요한 정치투쟁이다.

오늘의 현실은 모든 농장원들이 다수확농민이 되고 분조, 작업반, 농장들이 다수확단위가 되여 나라의 쌀독을 가득 채울것을 요구하고있다.

자기 혁명초소에서 맡은 일을 책임적으로 잘할 때 조국이 부강해진다는것을 뼈에 새기고 다수확운동의 앞장에서 기치를 들고나가는 윤룡석동무, 우리 당은 북지리의 참된 애국농민인 그를 로력영웅, 중앙사회주의애국공로자, 만리마시대의 전형으로 내세워주었다.

 

진정을 바치라

 

10여년전까지만 하여도 제1작업반은 농장적으로 제일 뒤떨어져있었다.이웃농장에서 갓 넘어오다보니 토대도 빈약하고 로력구성도 씨원치 않았으며 작업반건물도 볼품없었다.알곡생산계획은 계속 미달하고있었다.누구나 외면하고 발길조차 하기 저어하여 《곰보딱지》라는 수치스러운 별명까지 붙어있었다.

하기에 이곳 작업반장으로 일하게 되였을 때 윤룡석동무는 《알았습니다!》라는 대답을 쉽게 하지 못하였다.

리당일군이 한다하는 배짱가가 웬일인가고 하자 윤룡석동무는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솔직히 말하였다.

《인민군대 사관장으로서 중대를 본보기단위로 만들던 그 솜씨로 한번 본때있게 내밀어보오.우리는 동무를 믿소.》

군사복무의 나날 그는 농사일을 돕기 위해 북지리에 나온적이 있었다.장진군의 어느 한 광산 로동자의 아들인 윤룡석동무는 그때 농민들과 함께 일하면서 쌀 한알한알이 얼마나 힘들게 마련되는가를 잘 알수 있었다.

수십년전 8월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몸소 이 농장에까지 찾아오시여 농사를 잘 짓기 위한 방도를 하나하나 가르쳐주신 사연을 가슴뜨겁게 전해들은 그는 제대후 일생 지켜갈 전투좌지를 북지협동농장으로 정하였다.

재령벌에 제대배낭을 푼 윤룡석동무는 농사일을 직심스레 배우면서 농장원, 분조장을 거쳐 관리위원회 부원으로 일하였다.

당조직의 믿음과 기대속에 작업반장이 된 윤룡석동무는 이신작칙하면 농장원들이 따라올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분조, 저 분조로 분주히 뛰여다녔다.그러나 갈수록 실망감을 금할수 없었다.결근자들이 있는가 하면 일부 농장원들은 개인리기주의를 부리면서 작업반농사에는 열성을 내지 않고있었다.

윤룡석동무는 규률을 단단히 세워야 하겠다고 벼르었다.

우선 농장원들이 아침출근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분조들에서 그날과제를 어김없이 수행하도록 요구성을 높이였다.그러나 주관적욕망만 앞세우며 젊은 혈기에 사람들앞에서 욕설을 하고 감정을 폭발시켜 나중에는 심각한 의견이 제기되였다.

어느날 밤 그는 심한 괴로움속에 모대기며 작업반실토방에 앉아있었다.이때 길가에서 전지불이 비쳐들었다.

리당비서(당시) 오광철동무가 찾아온것이였다.

《반장동무, 대중과 한마음이 되여야 무슨 일이나 잘해나갈수 있소.농장원들을 탓하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진정을 바쳐야 하오.》

준절히 깨우쳐주는 그의 말이 가슴을 쳤다.

(새로 온 이 작업반장에 대한 기대가 큰데 나는 아직 농장원들의 마음의 문도 열지 못하고있지 않는가.)

윤룡석동무는 작업반을 당이 바라는 높이에 올려세울 각오밑에 농장원들의 앞장에서 입술이 부르트고 발이 닳도록 뛰여다니였다.

찬바람부는 포전에서 하루종일 일하고나면 빨리 집으로 가서 뜨뜻한 구들에 등을 대고 어린 자식들의 응석도 받아주고싶었다.하지만 그는 하루일이 끝난 늦은저녁이면 마을을 한바퀴 돌아보군 하였다.

이것은 그의 어길수 없는 일과로 되였다.농장원들의 집집에 들려 가마뚜껑을 열어보고 구들바닥을 짚어보군 하였다.

날이 갈수록 작업반장을 대하는 농장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바쁜 시기에는 농장원들의 집에까지 땔감을 실어다주고 첫물남새가 나오면 골고루, 지어 개울에서 물고기를 좀 잡아도 반찬감으로 꼭같이 나누어먹는 풍이 서가니 작업반에 따뜻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하였다.

작업반탁아소를 다시 짓게 된것도 윤룡석동무의 발기에 따른 일이였다.

어느날 윤룡석동무는 탁아소건물앞에서 오래도록 걸음을 뗄수 없었다.당시 탁아소는 마을 한켠에 치우쳐있어 아이들을 맡기고 찾거나 젖을 먹이러 오갈 때에도 여간만 불편하지 않았다.마을중심에 탁아소를 꾸려준다면 녀성들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이런 생각을 하던 그는 앞채를 메고 마을의 제일 좋은 위치를 정하여 탁아소건물을 다시 지었다.작업반장의 웅심깊은 마음에 감동된 녀성농장원들은 일에 더 성수를 냈다.

언제인가 한작업반에서 일하는 윤룡석동무의 안해 리명옥동무는 남편이 집에 없던 낡은 솜옷을 입고있는것을 보았다.

《어디서 이런 옷을…》

《글쎄 어디서 바뀌였는지 모르겠구만.》

남편은 옷뿐만아니라 신발까지 농장원들에게 종종 벗어주군 하였던것이다.그때마다 리명옥동무는 허구픈 웃음을 짓군 하였다.

안해의 심정을 헤아려본 남편은 조용히 말하였다.

《우리 작업반원들이 뭐 남이요.》

농장원들은 그에게 있어서 친혈육이나 같았다.

어느해 12월이였다.작업반의 농장원인 조금성동무가 다리를 상하여 입원치료를 받게 되였다.윤룡석동무는 그달음으로 병원에 가보고싶었으나 긴급한 일이 제기되여 좀처럼 시간을 낼수 없었다.

(한창나이인데 마음에 그늘이 지지 않겠는지…)

그는 며칠후 짬을 내여 병원으로 달려갔다.

한겨울의 날씨에도 땀에 젖은 얼굴로 들어서는 작업반장의 손을 꼭 잡으며 조금성동무는 감동어린 어조로 말하였다.

《반장동지, 전 이젠 일없습니다.》

남편을 대신하여 그의 안해가 입원치료를 받는 농장원들을 찾아간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작업반과 반원들을 위해 모든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그가 자기 건강이나 가정일에 관심이 적어지는것은 뻔한 일이였다.하기에 어린 딸 정임이는 이런 아버지를 야속하게 여기던 때의 철없는 심정을 자작시에 담았다.

 

내 웃음 넘쳐나는

행복의 집을 두고

아버진 포전에서

애기벼모 가꿔가니

내가 아마 미운가봐

낟알털기가 한창이던 어느날이였다.

농장원들과 어울려 일하던 그는 탈곡기에서 피대가 벗겨지려는것을 발견하였다.무작정 달려가 긴급대책을 세웠지만 그만 팔을 다치게 되였다.

상처가 심하여 사람들은 당장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하였다.

윤룡석동무는 한사코 도리머리를 저었다.모진 아픔을 이겨내며 현장에서 구급으로 상처를 치료한 그는 상한 팔을 머리뒤로 올려 붕대로 고정시키고 한손으로 벼단을 날랐다.

농장원들은 눈물을 삼키며 작업반장의 뒤를 따라섰다.

작업반장이 요구성을 높인다고 뒤소리를 하던 어제날을 아프게 돌이켜보면서 더욱 분발해나섰다.그리하여 윤룡석동무가 반장사업을 시작한 그해 작업반은 전해보다 150t의 알곡을 증수하고 농장적으로 2등을 하게 되였다.

이제야 진짜주인을 만났다고 농장원들은 기쁨을 금치 못하였다.

작업반이 한해두해 농사가 잘된다고 소문이 나자 언제인가 마을을 떠나갔던 림동무가 돌아왔다.

그로 말하면 제살궁리만 하다가 대중의 눈밖에 나 농장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던 사람이였다.

농장원들은 그를 작업반명단에서 아예 삭제해버리자고 하였다.

《그래 림동무를 보내면 어디로 보내자는겁니까.》

사람은 돌부처가 아닌 이상 사업과 생활에서 과오를 범할수도 있고 생활의 궤도에서 탈선할수도 있다.그러나 1%의 량심이 있으면 그것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것이 당의 뜻이 아닌가.

그의 진심어린 목소리는 농장원들의 심금을 울리였다.

윤룡석동무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는 림동무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그리고 어린 자식들에게 림동무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제부터 우리 큰아버지와 함께 살자.》

림동무는 끝내 오열을 터뜨렸다.열백번 버려도 아깝지 않을 자기같은 인간을 다시 받아준 작업반장과 농장원들앞에서 잘못을 뼈아프게 뉘우쳤다.작업반에서는 림동무에게 새 집을 지어주고 가족이 안착된 생활을 할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집단의 극진한 보살핌속에 림동무가 새 출발을 하였다.특히 그의 안해가 혁신자로 전국농업부문분조장대회에 참가하였을 때 농장원들은 뒤떨어진 사람, 애꾸러기까지도 책임지는 작업반장의 웅심깊은 마음에 감동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때 누구보다 기뻐한것은 윤룡석동무였다.

작업반장이 고생하는것만큼, 진정을 바치는것만큼 대중은 그를 따랐다.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말이 당연한것으로 불리워지고 집단주의정신이 차넘치는 속에 작업반농사에서는 변이 나기 시작하였다.

 

목표는 언제나 최고수확고

 

당에서는 농촌초급일군들이 이신작칙의 모범으로 대중을 이끌어나가며 농업전선에서 투쟁의 기수가 될것을 바라고있다.

윤룡석동무는 언제나 이것을 명심하고 어렵고 힘든 일의 앞장에서 돌파구를 열어나가며 대중을 이끌어 작업반을 다수확단위로 만들었다.

대대로 논농사로 이름난 재령벌에서 알곡생산계획을 수행하지 못한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우리 농장에 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유훈을 관철하자면 해마다 알곡생산을 늘여야 한다.

그는 이런 생각으로 늘 자신을 채찍질하였다.무엇보다 지력을 높이는것이 기본이였다.그런데 거름생산에서 형식주의가 많았다.

땅을 속이는것은 자기자신을 속이는것이며 거름생산에서 허풍치는 현상을 뿌리뽑지 않는다면 언제 가도 알곡수확고를 높일수 없었다.

하루일이 끝난 어느날 저녁 그는 농장원들앞에서 자기의 안타까운 심정을 터놓았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나라일이 그처럼 바쁘신 가운데서도 농장에 찾아오시여 논벼농사에서 전국의 본보기가 되라고 간곡히 가르쳐주시였다.그런데 아직까지도 우리는 수령님들의 유훈을 관철하지 못하고있다.북지리의 땅이 나빠서인가.아니다.우리가 농사군의 본분을 잊고있기때문이다.

농장원들은 지난 시기의 그릇된 일본새를 돌이켜보며 거름생산에 떨쳐나섰다.하지만 야산조차 찾아볼수 없는 벌방이여서 풀거름원천이 없는것이 제일 안타까왔다.그렇다고 도시거름을 실어올데도 없었다.

생각던 끝에 재령강에서 배를 타고 다른 지역에까지 나가 풀을 베여들였다.그러나 수십정보의 논에 거름을 내자면 그런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었다.자나깨나 거름원천을 찾기 위해 골머리를 앓던 윤룡석동무는 농장정미소바닥에 주의를 돌리게 되였다.오래동안 닭을 놓아기른 여기에 잘 썩은 벼겨가 두툼하게 깔려있었던것이다.

작업반에서는 이것을 100여t이나 실어들여 상, 중, 하로 구분한 포전중에서 지력이 낮은데부터 냈다.여기서 정보당 2t의 알곡을 증수하였다.결과를 제눈으로 확인한 농장원들은 지력을 높이는데 뼈심을 들이였다.

그뿐이 아니였다.작업반장은 전망적인 거름원천을 찾기 위해 애쓰다가 농장정미소에서 나오는 벼겨를 부림소를 동원하여 실어들이는 일을 근기있게 내밀었다.

제일 걸렸던 거름원천예비를 찾아낸 작업반장을 두고 농장원들은 땅을 속일줄 모르는 사람이 진짜농사군이라는것을 절실히 느끼였다.

애국으로 불타는 심장, 당에 대한 충정으로 고동치는 심장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것도 보이는 법이다.

겨울에는 개바닥흙을 파내고 흙깔이를 하여 알곡수확고를 높이니 낟알짚이 많이 나와 거름원천이 계속 늘어났다.낟알짚은 나오는족족 포전옆에 쌓고 한해 묵여 거름으로 리용하게 되였다.

그렇다고 탕개를 늦출수 없었다.논벼농사에서 본보기가 되자면 남들이 뛸 때 우리는 날아야 하는데 무슨 방법이 없겠는가.

이런 생각으로 고심하는 그에게 부문당위원장 송윤명동무가 튕겨주었다.

《혼자 속쓰지 말고 힘과 지혜를 합쳐봅시다.》

그의 손을 말없이 꽉 잡는 윤룡석동무의 온몸이 후더워졌다.

농장원들의 의견을 귀담아들으니 지력을 더 높일수 있는 궁냥이 트이였다.

그전에는 분조별로 겨울에 야외에 온돌을 놓고 불을 때면서 흙보산비료를 생산하였다.그런데 온도보장을 제대로 못하여 질이 떨어졌다.작업반에서는 그 방법을 버리고 가을에 생산을 시작하였다.

부식토에 비료와 진거름 등을 골고루 섞고 수분을 보장해주면서 수백t규모로 높이 쌓았다.그다음 박막을 씌우고 낟알짚을 두툼하게 덮어놓았다.더미속에는 생석회를 넣어 열이 나게 하니 온도가 충분히 보장되여 질좋은 흙보산비료를 생산할수 있었다.

생물활성퇴비생산도 새로운 방법으로 하였다.가을걷이한 뒤 물을 채운 논에 낟알짚을 넣고 밟아준 다음 일정한 기일이 지나 짚더미가 푹 내려앉았을 때 균처리를 하면서 당해에 생산 및 리용할수 있었다.

농장원들은 사기가 났다.거름더미이자 쌀더미라고 했는데 이쯤하면 알곡소출이 굉장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윤룡석동무는 농장원들에게 말하였다.

《지력을 높이는것만으로는 다수확을 낼수 없소.이제는 뚝심으로 농사를 지을것이 아니라 과학으로 지어야 한단 말이요.》

당의 뜻대로 과학농사의 기치를 들고나가는데 다수확의 지름길이 있다.

이렇게 확신한 윤룡석동무는 종자문제를 기본으로 틀어쥐고 품종선정을 바로하는것을 중시하였다.그는 기사장을 비롯한 기술일군들과 토론을 거듭하고 다른 단위들의 경험도 참작하면서 작업반포전의 특성에 맞는 다수확품종을 선정하였다.이에 기초하여 영양랭상모, 성형알모를 비롯한 실정에 맞는 모기르기방법을 받아들이였다.다른 영농공정들도 해마다 반복하는것이라고 기계적으로 대하지 않고 혁신적안목으로 하나하나 분석해보았다.

어느해 논갈이를 하기 전이였다.작업반기술원과 함께 포전을 돌아보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던 윤룡석동무는 문득 이전에 밑비료주기를 어떻게 했던가 하고 혼자소리처럼 말하였다.의아해하는 기술원에게 그는 뭐 생각되는바가 없는가고 하였다.

일리가 있는 물음이였다.그전에는 논갈이를 하고 물을 댄 다음 밑비료를 주었다.그때 물을 며칠동안 잡아두어야 하겠는데 인차 새여나가다보니 비료성분이 적지 않게 빠지군 하였다.

《여기에 문제가 있소.》

결정적으로 밑비료주는 방법을 개선해야겠다고 본 윤룡석동무는 농업기술자료들을 깊이 연구하고 해당 일군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은 끝에 논갈이전 깊은층비료주기방법을 착상하였다.이 방법을 도입하여 논갈이를 할 때 땅속에 묻힌 비료가 지속적으로 그 효과를 나타낼수 있게 하였다.

작업반에서는 린성분이 포함된 흙으로 흙깔이를 하는것과 함께 닭을 많이 길러 그 배설물을 거름생산에 적극 리용하였다.

이 과정에 경험만 믿던 농장원들도 과학기술을 알아야 실농군이 될수 있다는것을 깨닫고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에 망라되여 열심히 배웠다.

과학농사의 앞장에 선 윤룡석동무는 농산기사자격을 받았으며 기술원과 함께 개바닥흙을 모판재료로 리용하는 방법, 벼대벌레구제방법을 비롯하여 여러건의 창의고안을 하였다.

각이한 형태의 깊은층비료주는기계를 만들어 리용하는 등 농산작업의 기계화비중을 높여 자체로 농사를 지으면서 정보당 알곡생산량을 계속 늘이였다.

북지리는 지대가 낮은데다가 제1작업반이 말단위치에 있다보니 비가 오면 여러 농장에서 흘러내린 물이 집중되여 포전들이 침수되군 하였다.

그는 농장일군들의 방조밑에 배수로를 가셔내기 위한 공사를 대담하게 진행하였다.그리하여 장마철에 여러대의 양수기로 며칠이 걸려서야 퍼내던 물을 하루동안에 뽑아낼수 있게 하였다.재령강물을 자연흐름식으로 끌어들이는 공사를 통이 크게 하여 긴장한 물문제도 해결하였다.

이렇게 되니 한결 마음이 놓이였다.그런데 알곡수확고에서는 다른 농장, 다른 작업반보다 뚜렷한 차이가 나지 않았다.하지만 농장원들은 그전에 정보당 5t도 못내던 땅에서 9t이상 내게 된것만도 큰 성과라고 자부하고있었다.

(수확고를 더 올릴 방도는 없을가?)

이런 생각으로 잠 못 이루며 모지름을 썼다.

그런 때에 전국농업부문분조장대회가 열리였다.영광스럽게도 이 대회에 참가한 작업반장은 경애하는 원수님의 력사적서한을 받아안고 무릎을 쳤다.

전형분조창조, 바로 이것이다.

신심에 넘쳐 대회장에서 돌아온 그는 분조를 강화하기 위한 사업을 드세게 내밀었다.이 과정에 4분조포전을 자주 찾았다.대회에 함께 참가하였던 분조장 제갈동삼동무의 일본새가 눈에 뜨이게 달라졌던것이다.

《올해농사에서 우리 분조가 통장훈을 부르겠습니다.》

《좋소.우리 손을 맞잡고 꼭 해내기요.》

윤룡석동무는 그가 결심을 실천에 옮기도록 적극 떠밀어주었다.

4분조가 모든 영농공정수행에서 앞서나가니 4분조장과 중학교동창생인 3분조장은 등이 달았다.두 분조의 승벽다툼이 벌어지는 속에 앞선 분조를 따라잡기 위한 경쟁열풍이 온 작업반에 몰아쳤다.

전국농업부문분조장대회가 열린 그해 가을 작업반은 알곡생산에서 최고수확을 내게 되였다.그 기세로 작업반은 최근 3년동안 정보당 알곡생산에서 최고기록을 련이어 돌파하였다.

이것은 나라의 쌀독을 책임진 주인이라는 영예와 중대한 임무를 깊이 자각하고 당의 농업정책을 결사관철하기 위해 정력과 지혜를 다 바쳐가는 재령땅의 애국농민들이 안아온 자랑찬 결실이였다.

 

자기 손으로 더 좋은 래일을

 

오늘 제1작업반 농장원들은 자기가 살며 일하는 마을과 일터를 제힘으로 알뜰히 꾸리며 더 좋은 래일을 앞당겨가고있다.

일찌기 북지리를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농사를 잘하는것과 함께 리에 현대적인 문화주택들을 짓고 농민들이 위생문화적으로 생활하도록 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윤룡석동무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유훈을 자자구구 되새기며 농사 못지 않게 마을꾸리기에 힘을 넣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농장원들이 선뜻 따라서지 못하였다.농사만 짓자고 해도 베찬데 건설은 무슨 힘으로 하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는 이런 농장원들에게 제힘을 믿는 정신, 집단의 단합된 힘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언제인가 농장적인 체육경기를 눈앞에 두고있을 때였다.

당시 농장원들의 심리상태는 《우리 작업반은 아무래도 꼴찌할걸.》하는것이였다.

윤룡석동무는 이것을 단순히 경쟁의욕이 없기때문이라고 보지 않았다.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힘을 믿지 못하고 집단의 단합된 힘이 얼마나 위력한가를 모르는데 있었다.체육경기를 계기로 늘 마지막자리밖에 모르는 농장원들에게 마음먹고 달라붙으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것을 보여주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짬시간마다 대중체육활동을 벌려 농장원들을 분발시키며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

지어 경기심판원들을 만나 자기의 안타까운 속생각을 호소도 하였다.

그 보람이 있어 작업반은 종목별경기점수는 좀 낮았지만 규률과 응원, 분렬행진 및 대렬합창 등 여러 종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제1작업반이 종합 1등이라는 경기순위가 발표되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작업반원전체가 와- 하고 일어서서 만세를 부르며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이 글썽하여 돌아갔다.

윤룡석동무는 불같이 호소하였다.

보라.마음만 먹으면 우리도 얼마든지 1등을 할수 있지 않는가.자기가 살며 일하는 마을과 일터를 남의 도움을 받아 꾸리려고만 생각하여서는 안된다.남의 도움으로는 자기 마을과 일터를 잘 꾸려나갈수 없다.이 기세로 우리 마을을 일하기도 좋고 살기도 좋은 곳으로 꾸리자.

작업반장과 농장원들은 한마음한뜻이 되여 떨쳐나섰다.

윤룡석동무는 작업반도로는 어떻게 형성하며 살림집과 공공건물은 어떤 형식으로 배치하겠는가를 놓고 고심하였다.

전문가들의 도움도 받으면서 밤새워 전망도를 그리였다.

마을을 새로 꾸리는데 필요한 자재와 자금을 제힘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도도 찾아나갔다.

작업반에서는 영농공정을 빈틈없이 짜고들고 로력을 절약하여 봄철모내기전까지 건설을 집중적으로 하였다.

특히 평가기준을 세분화하여 농장원들의 로력일평가를 정확히 하고 가을에 일한것만큼, 번것만큼 현물분배를 실시하였다.이렇게 되니 농장원들의 의욕이 높아져 건설을 더 힘있게 내밀수 있었다.

윤룡석동무는 축산을 활성화하고 가마니짜기를 꾸준히 하여 건설에 필요한 자금과 자재를 해결해나갔다.

초기에는 축산토대가 너무 빈약하다보니 걸린 문제도 많았다.

하지만 군인기질, 군인본때로 난관을 뚫고나갔다.무엇이나 제손으로 창조해야 한다는 립장에서 농장원들을 불러일으켜 집짐승우리들도 새로 짓고 돼지와 닭, 오리 등 많은 집짐승을 길렀다.

축산이 활성화되니 꿩먹고 알먹기였다.농산과 축산의 고리형순환생산체계가 확립되고 건설에 필요한 자금도 해결할수 있어서 좋았다.

부족되는 자재문제를 풀기 위해 애쓰던 그는 또 한가지 일감을 찾았다.

몇해전 바다가지방에 갔다가 푸르러 설레이는 갈밭을 보게 된 윤룡석동무는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고장에 심어 쓸모있게 리용할수 없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애지중지 갈뿌리를 캐가지고 돌아와 그것을 재령강뚝에 심어가꾸었다.

이미전부터 포전도로옆에 심은 왜싸리도 더 무성하게 키웠다.

야산 하나 없는 벌방에서 이것은 큰 도움이 되였다.갈과 왜싸리는 산자와 활창대 등으로 전환되여 건설자재와 영농자재로 쓸모있게 리용되였다.

이처럼 필요한 모든것을 자급자족하면서 마을의 면모를 새 세기의 요구에 맞게 일신시키였다.

곧게 뻗은 작업반도로, 좌우에 아담하게 지은 살림집들과 탁아소, 농업과학기술선전실, 편의봉사시설, 버섯재배장…

자기 손으로 행복을 가꾸어가는 과정에 그들은 실생활을 통하여 확신하였다.자력갱생, 자급자족에 흥하는 길이 있다는것을.

오늘 북지협동농장 제1작업반은 농사를 잘 짓는 단위로 전국에 소문이 났다.많은 농장원들이 다수확농민으로, 땅의 참된 주인으로 자라나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를 지니고 제4차 전국농업부문열성자회의에 참가하여 경애하는 원수님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는 영광을 지니였다.

이 나날에 작업반은 다수확작업반이 되고 2중3대혁명붉은기를 쟁취하였다.

재령벌에서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며 애국농민들이 련이어 배출된것은 결코 땅이 좋아서가 아니다.

가사보다 국사를 먼저 생각하며 나라의 식량문제를 풀어나가는것을 본분으로 여기고 쌀로써 당을 받들어온 참된 애국자들이 있기때문이다.

우리가 만난 윤룡석작업반장, 그는 협동벌 어디서나 흔히 볼수 있는 평범한 농촌초급일군이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사회주의경제건설의 주타격전방인 농업전선을 지켜선 높은 책임감, 쌀로써 당을 받들어갈 애국충정이 깊이 간직되여있다.

김제원농민처럼, 김대성농민처럼 나도 살리라.우리 원수님을 쌀로써 받들어가는 애국농민이 되리라.

윤룡석동무는 오직 이 하나의 생각을 안고 하루하루를 분초를 쪼개가며 헌신해왔다.

지난해 12월말 제4차 전국농업부문열성자회의에 참가하여 로력영웅칭호를 수여받고 기념사진촬영장에서 그처럼 뵙고싶던 경애하는 원수님을 우러러 만세를 목청껏 부르며 그는 심장으로 웨치였다.

(경애하는 원수님, 농사를 잘 지어 인민들의 식량문제를 푸는데 이 한몸 깡그리 바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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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마속도창조운동의 불길높이 당이 제시한 알곡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투쟁이 힘있게 벌어지고있는 지금 그는 올해에도 또다시 최고생산년도수준을 돌파하기 위한 높은 목표밑에 경제강국건설의 주타격방향, 사회주의수호전의 전초선에서 기치를 들고나가고있다.

《쌀로써 당을 받들자!》는 애국충정의 구호를 높이 들고 윤룡석동무와 이곳 작업반원들처럼 모든 농업근로자들이 나라의 쌀독을 먼저 걱정하며 전야마다에서 풍요한 가을을 안아올 때 우리의 사회주의는 굳건하고 내 조국은 더욱 부강해질것이다.

글 본사기자 박동석
본사기자 김성철
사진 본사기자 최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