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99(2010)년  8월  20일 조선중앙통신

 

《한일합병》은 일본이 감행한 전대미문의 국가테로이다

조선중앙통신사 고발장

 

일본이 《한일합병》으로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지 100년이 되는 올해에 일본정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지난 세기 우리 나라에 대한 식민지군사통치로 조선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강요한 일본이 그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할 대신 《한일합병》의 《당위성》을 주장하고있다.

수상과 여야당들이 8월 22일을 맞으며 발표한 담화들에서 사죄와 배상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으며 지어 《일본의 립장은 달라질수 없다.》고 강변하였다.

이것은 과거청산을 바라는 우리 인민과 세계인민들에 대한 우롱이며 도전이다.

조선중앙통신사는 일본의 국권강탈행위를 추호도 용납 못할 침략으로 락인하면서 준렬히 단죄규탄한다.

 

1

 

《한일합병》은 일본이 관권과 군권을 총발동하여 주권국가를 대상으로 감행한 국가테로이다.

일본은 조선의 국권을 빼앗기 위해 그 준비를 오랜 세월에 걸쳐 계획적으로, 체계적으로 추진시켜왔다.

1868년 《명치유신》후 《일본의 번영과 〈천황〉국가를 위해 무력으로 조선을 정복하여야 한다.》는 《정한론》을 내놓음으로써 《한일합병》의 정책적기초를 마련하였다.

그후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 등을 날조하여 리조봉건정부의 외교권과 내정권, 사법권을 틀어쥐고 조선을 사실상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병합》을 위한 정치외교적지반을 닦았다.

1906년 2월에는 《한일합병》을 현지에서 추진시킬 목적으로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이와 함께 군사적지반을 구축하기 위한데도 열을 올렸다.

함선건조 10개년계획을 세우고 1896년부터 막대한 자금을 여기에 쏟아부었으며 청일전쟁에서 받아낸 배상금을 포함한 17억¥을 군사비로 탕진하였다. 그리하여 1905년에 6 000t급이상의 최신군함 12척에 현대적무장을 갖춘 20만명의 륙군상비무력을 보유하였다.

조선반도에 무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하면서 《한일합병》실현에서 마지막장애로 되고있던 조선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으며 경찰권을 빼앗고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였다.

일본당국은 서울에 둥지를 튼 일본군부대들에 《현지수비대는 전력을 다하여 예방경계를 하라.》, 《조선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적변동의 전제와 같은 감촉을 주지 않게 행동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일본당국은 이러한 준비에 기초하여 1909년 내각회의에서 《한국을 병합하여 이를 제국판도의 일부로 하는것은 반도에서 우리의 실력을 확립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라는 강도적결정을 내렸다.

1910년 7월의 내각회의에서는 조선의 황실권을 박탈하고 국토를 완전히 강탈할데 대해 밝힌 조선강점안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한일합병》을 강행하면서 구조선의 최고대표자였던 황제를 정치무대에서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일본당국은 《한일합병》의 《법적》문건이라고 한 《조약》에 《한국 황제페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페하에게 양여》하였으며 《일본국 황제페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한 완전히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하였다고 박아넣음으로써 조선의 국가원수의 지위와 역할을 유명무실하게 하였다.

당국의 지휘조종하에 현지정책집행자들은 조선의 황제를 퇴위시켜 일본의 《평민》으로 만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책동하였다.

그들이 작성한 3건의 비밀문건 《조선총독보고 한국병합시말》(《병합시말》)과 《한국병합에 관한 서류-발전, 착전》, 《추밀원회의필기-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외(명치43년 8월 22일)》만 보아도 그것을 잘 알수 있다.

조선《통감》 데라우찌는 1910년 7월 23일부터 9월 30일까지의 《한일합병》과정을 작성한 조선강점종합보고서 《병합시말》을 11월 7일 내각에 제출하였으며 내각은 그것을 21일 왕에게 보고하였다.

보고서에는 《첫째, 현 황제페하는 통치권을 양여함과 동시에 태공전하의 〈존칭〉을 받게 될것. …앞서 말한 〈존칭〉은 지금보다 약간 낮다 할지라도… 태공전하로 일본황족의 례우를 받는것도… 낮다고는 말할수 없다.

이것을 가지고 수백년래의 존엄이 격변한다고 받아들이는것은 심히 허무맹랑하고 근거가 없다.》, 《병합이 실행된 후 왕위를 존속할만 한 리유가 없을뿐아니라 또 그 필요가 없으며 특히 이를 존속하게 한다면 오히려 장래에 화근을 남긴다. … 세계 어느 나라도 주권을 갖지 않은자가 왕위를 대대로 계승하는 례가 없다.》고 지적되여있다.

이에 대해 남조선의 《조선일보》 1993년 8월 13일부는 데라우찌가 《병합되는 마당에 국호는 무슨 국호이며 황제에게는 태공의 작위를 주겠다.》고 떠벌였다고 폭로하였다.

이것은 리조봉건정부의 최고대표자인 황제를 왕도 아닌 태공으로 한다고 명기한 보고서가 일본이 《한일합병》을 통해 《천황제중심》의 국가체제를 조선반도에 수립하려 하였음을 보여주는 공개적인 침략문서이라는것을 실증해준다.

또한 반만년의 오랜 력사를 가지고 독립과 자주권을 당당히 행사해온 우리 나라의 력사를 외곡하여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려는 저들의 그릇된 기도를 합리화한 황당무계하기 그지없는 궤변이다.

조선강점 일일보고서로서 조선《통감부》와 일본내각사이에 오고간 기밀전문인 《한국병합에 관한 서류-발전, 착전》에는 《한일합병》을 위해 일본당국이 고안해낸 음모와 모략이 집약되여있는데 그 대부분은 《병합》후 조선의 국호를 정하는 문제와 황실변경문제내용으로 되여있다. 일본이 구조선의 최고대표자를 없애기 위해 얼마나 집요하게 책동했는가를 보여주는 산 자료이다.

《병합》후 그 무슨 《기념촬영》을 한다고 하면서 조선《통감》 데라우찌는 군복차림을 하면서도 조선황제에게는 평복차림을 강요하였다.

1910년 8월 30일 《도꾜니찌니찌신붕》은 일본왕의 사진아래에 고종과 순종황제의 사진을 편집함으로써 두 나라 왕실의 관계가 군신관계로 전락된 사실을 암시하였다.

구조선의 최고대표자를 퇴위시켜 일본의 《평민》으로 만든 극히 오만하고 횡포한 처사는 그 무엇으로써도 용납될수 없다.

국가원수에 대한 탄압은 곧 국가테로의 최고표현이다.

그것은 국가원수에 대한 탄압과 모욕이 그 나라 인민들에게 나라잃은 설음을 안겨주며 망국의 운명을 강요하기때문이다.

오죽하였으면 학부대신 리용직을 비롯한 우국지사들이 《임금이 욕을 보게 되면 신은 죽음뿐》이라고 곡성을 터뜨렸겠는가.

《한일합병》조작의 주범은 일본왕과 그의 명령, 비준밑에 움직인 정부와 군부이다.

왕과 내각수상이 직접 《한일합병》을 위한 국가테로행위를 지휘조종하였으며 군부가 폭력과 강권으로 그것을 뒤받침하였다.

조선《통감부》와 일본내각사이에 1910년 8월 7일부터 10월 14일까지 오고간 전문은 공개된것만 해도 290여건이다.

그중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8월 18일 오후 3시 30분발

데라우찌통감앞

더우기 서류가 래일밤 도착하면 시기를 그르칠 가망도 있으므로 말을 전해듣는대로 필요한 부분만 전문을 타전할것.》

《8월 22일

고다마비서관앞

추밀원에 자순한 법령안은 모두 내각제출안대로 가결된다. 알고있을것. 오늘부터 공포에 이르는 기간은 비밀을 유지하는데 가장 어려울 때임. 이곳에서도 충분하게 주의할것임. 귀부에서도 선처 바람.》

당시 외무차관이였던자는 《…나는 조선을 완전히 없애고 제국령토의 한부분으로 되여야 한다는 뜻을 명백히 밝히는 동시에 그 어조가 너무 과격하지 않는 단어를 고르려고 여러가지로 생각하다가 좋은 단어를 발견할수가 없어서 결국은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지 않는 단어를 고르는 편이 득책이라고 인정하여 〈합병〉이란 단어를 쓰기로 하였다.》고 떠벌였다.

남조선의 《세계일보》 1993년 8월 13일부는 《〈일 한국강점〉전모 기록문서 발견》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선총독보고 한국병합시말〉은 〈한일합병〉추진을 데라우찌단독으로 처리한것이 아니라 일본내각은 물론 천황이 직접 지휘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결정적문서이다. 문서는 데라우찌가 한국에 부임되기 이전인 1910년 7월 20일 조선〈총독부〉를 천황직속기구로 두었으며 한국의 국호문제 또한 일본내각의 결정을 그대로 집행했음을 립증하고있다. 문서는 한국황제가 주권을 일본에 위임했다는 일본측의 주장과는 달리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아래 일제가 조선을 강탈했다는 점을 밝히고있다. 데라우찌는 〈한일합병〉과정에 일본천황과 내각의 각본을 그대로 시행했다.》고 지적하였다.

《한일합병》은 일본당국자들이 력사적으로 《소원》해온 침략야망의 직접적산물이며 결과이다.

《한일합병》후 일본반동들은 《기념그림엽서》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엽서에 《신공황후》이래 2 000년간 기다려왔던 《합방》을 축하한다는 내용의 《일한합방의 노래》를 실었다. 또한 《합방》으로 령토는 오스트리아-마쟈르, 인구는 도이췰란드이상 되였음을 보여주는 《기념지도》를 실었다. 《지도》에 우리 나라와 일본을 같은 색으로 표시했으며 일장기가 꽂혀있는 숭례문주변사진 등을 편집하였다.

1934년에 일본의 극우폭력단체인 《흑룡회》가 주동이 되여 《일한합방기념탑》을 건립하였으며 그 후면에 《유사이래의 현안인 한국강점을 해결했다.》고 쪼아박았다.

2001년 1월 미국의 하와이종합대학에서 진행된 《지난날 조일관계를 재인식할데 대하여》라는 의제의 국제토론회에서 참가자들은 일본이 조선을 합법적으로가 아니라 무력을 동원하여 비법적으로 강제병합하였다는것을 일치하게 인정하였다.

《한일합병》은 말그대로 일본정부와 군부가 무력을 동원하여 감행한 특대형의 국권강탈이며 국가테로의 극치이다.

 

2

 

일본이 국가조직적으로 감행한 범죄인 《한일합병》에 관한 문제는 패망후 곧 해결되였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일본은 장장 65년간 일본정부가 관권과 군권을 총발동하여 우리 인민에게 강요한 《한일합병》의 부당성을 인정하지 않고있으며 력사적사실을 전면외곡하고있다.

여야, 학계가 모두 떨쳐나 《합병》의 《당위성》을 주장하는데 주되는 힘을 넣고있다.

《일한회담》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다는 1953년 10월 15일 《일본의 한국점령은 한국민에게 유익하였다. 한 민족의 노예화에 대해 말한 까히라선언은 련합국의 전시히스테리의 표현이다.》라고 하였다.

1958년 6월 11일 《일한회담》 일본측 수석대표 사와다 렌조는 《우리는 세번째 일어나서 38°선을 압록강밖으로 물리치지 않으면 선조에 대해, 선배에 대해 면목이 없다. 이것이 일본외교의 의무이다.》고 망발하였으며 1959년 1월 전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꾸는 《한국과 대만을 포함한 〈일본합중국〉이 되기전에는 극동에서 안전은 있을수 없》으며 따라서 일본은 《미국과 손잡고 〈일본합중국〉을 세워야 한다.》고 떠벌였다. 전 수상 요시다도 《일본이 이또 히로부미의 길을 따라 조선을 부식시켜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1963년 외상 시이나 에쯔사부로는 도서 《동화와 정치》에서 《명치이래 강대한 서유럽제국주의의 이발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고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대만을 경영하고 한국을 합방하였으며 만주에 5족협화의 꿈을 맡긴것이 일본제국주의라 하면 그것은 영광의 제국주의이다.》고 떠벌였다.

일본 《데이또니찌니찌신붕》 1963년 2월 21일부가 폭로한데 의하면 군국주의자 시바조 노세이는 《한국과 일본은 벌써 하나의 국가로 되였어도 좋지 않았겠는가고 생각한다. 다시말해서 조선이 일본국의 조선주로 되는것이 좋지 않았겠는가 하는것이다.》고 줴쳤다.

《일한회담》 일본측 수석대표 다까스기 싱이찌는 1965년 1월 7일 기자회견에서 《조선에 대한 지난날의 통치에 대해 일본이 사죄하라는것은 도저히 할수 없는 일이다. 일본은 좋은 일을 하려고 하였다. 일본의 노력은 결국 전쟁으로 좌절되였는데 한 20년 더 조선을 쥐고있었더라면 좋았을것이다. 창씨개명을 보아도 그것은 조선인을 동화시켜 일본인과 같이 취급하려고 취한 조치였지 나쁜것이였다고만 말할수 없다.》라고 하였다.

전 일본문부상 후지오는 1986년 8월 12일 일본 전국기자구락부에서 한 강연에서 《세계사는 침략사이며 전쟁사이다. 일본만이 침략했다고 하는 잘못된 력사관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10월 6일에는 《〈일한합병〉문제에서 당시 세계렬강은 한 나라도 병합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세계렬강은 제각기 병합을 승인하였다. 일본만이 비난받는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뇌까리였다.

1987년 12월 15일 일본자민당소속 히로시마시의회 의원이였던 니시무라는 《장차 또 다른 〈일한합병〉이 이루어질수만 있다면 〈만만세〉이다.》고 지껄였다.

2003년 에또 다까미 전 일본총무청장관은 유엔이 1945년에 발족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한합병》은 《량국이 조인하였으며 유엔이 이를 무조건적으로 승인하였다. 그때로부터 90년이 지났는데 어찌하여 식민지지배로 된다는것인가.》고 떠들었다.

또한 도꾜도지사 이시하라는 2003년 10월 28일 《〈일한합병〉은 조선인의 총의로 일본을 선택한것》이며 《조선에 있어서 일본의 식민주의는 인간적이였다.》, 《〈일한합병〉의 시비를 가른다면 조선인선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10월 31일에는 1920년대에 창설된 국제련맹을 꺼들면서 《그때 국제련맹도 있었지만 누구도 일본을 비방하지는 않았다.》는 상식밖의 망언을 하였다.

일본의 보수우익반동단체인 《새 력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이전 회장 역시 이시하라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식민지시대 조선인들은 합병을 하는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느니, 《조선인들이 자기의 취약점을 보지 않으려 하는것이 죄이자 악》이라느니 뭐니 하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2001년 중학교용 력사교과서에서는 《한일합병》을 《정당한 합병》으로 합리화하면서 《조약》의 《적법성》과 《유효성》을 운운하였다.

2005년 《새 력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일본문부과학성에 제출한 다음해 중학교력사교과서 신청본에서 《일한합병》을 조선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인정한듯이 력사적사실을 외곡하였다. 그리고 교과서에 《조선의 근대사를 도운 일본》이라는 별도의 란을 내오고 《식민지화가 조선의 근대화를 도왔다.》는 식으로 서술하였다.

간과할수 없는것은 최근 일본의 집권자들이 《한일합병》실행 100년이 되는것과 관련하여 발표한 담화들에서 지난 시기 우리 공화국과 우리 인민에게 끼친 죄악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언급조차 하지 않은것이다.

지어 자민당은 담화에서 《국제법적인 평가에 따른것이며 우리의 립장은 조금도 달라질것이 없다.》고 강변하였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지난 세기 우리 나라의 국권을 강탈하고 조선민족에게 수난의 력사를 가져다준 《한일합병》을 새 세기에 들어선지 10년이 된 오늘까지도 합리화하려는 극히 파렴치한 행동이다.

《한일합병》으로 하여 모든것을 빼앗긴 우리 나라가 현대문명에서 멀리 뒤떨어지게 되였으며 우리 인민이 정든 고향산천을 등지고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으로 쫓겨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40여년간에 이르는 전대미문의 식민지파쑈통치기간 일본의 통치배들은 《조선사람은 일본법률에 복종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는 강도적론리와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략탈하라.》는 《3광정책》이 그대로 반영된 수많은 파쑈악법들을 조작공포하여 우리 애국자들과 인민들을 닥치는대로 체포, 처형하였으며 인적, 물적자원을 깡그리 략탈하여 저들의 침략전쟁에 동원하고 조선민족문화를 말살하는 등 가장 야만적이며 악랄한 군사적파쑈통치, 민족말살책동을 감행하였다.

일본의 야만적인 식민지통치로 말미암아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무참히 학살되고 840만여명에 달하는 청장년들이 강제련행되여 노예로동을 강요당하고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내몰렸으며 20만명의 녀성들이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 녀성의 존엄을 유린당하였다.

조상대대로 전해온 귀중한 국보적문화유물들은 일본강도들의 사치와 향락을 위한 수집품으로 략취되고 풍부한 자연부원들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군수물자로 실려갔다.

일본이 군사적강점기간 우리 인민에게 끼친 피해액은 실로 방대한것이다.

력사에 전무후무할 특대형의 국가테로행위와 민족말살책동을 감행하여 조선인민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친 일본이 이번에 《한일합병》과 관련한 립장에 변함이 없다고 공공연히 떠벌인것은 또 하나의 특대형정치협잡행위이다.

수상 간 나오또가 2010년 8월 10일에 발표한 담화는 1995년 8월의 무라야마담화나 2005년의 고이즈미담화보다 더 후퇴한것으로서 우리 나라에 대한 국권강탈을 인정하지 않고 사죄도 배상도 하려 하지 않는 강도적본성이 담겨져있다.

지난 시기의 담화들도 물론 국가적립장에 선 공식적인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립장을 표명한것으로 하여 문제가 있었지만 그래도 사죄대상은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람들》로 표명하였다. 그러나 현 집권자의 담화는 남조선만을 대상으로 정하였다.

그런데도 전 일본수상 아베를 비롯한 극우익보수세력들이 《정부가 담화를 발표하는것은 신중해야 한다.》, 《일본의 장래에 중대한 화근을 남기게 될것이다.》고 떠벌이면서 수상의 이른바 담화에 항의하는 성명들을 발표하고 《산께이신붕》을 비롯한 주요신문들이 《수상담화가 발표된것은 매우 유감스럽다.》느니, 《력사를 외곡한 사적인 견해는 결코 허용할수 없다.》느니 뭐니 하고 력설하는것은 일본의 정치흐름이 오늘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게 한다.

일본의 이러한 처사는 명백히 우리 공화국과 우리 인민에 대한 또 하나의 용납 못할 죄악으로 된다.

일본당국이 《한일합병》의 《당위성》을 제창하면서 40여년간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통치를 전면부정, 전면외곡하고 미화분식하는것은 과거청산을 회피하려는 그릇된 태도로부터 출발한것이다.

일본반동들이 죄많은 력사를 덮어버리고 과거를 청산하지 않으려는것은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는짓이다.

가해자인 일본은 우리에게 지난날의 모든 죄과에 대해 성근하게 사죄, 배상할 법적, 도덕적의무를 지니고있으며 피해자인 우리는 국제법의 공인된 원칙과 국제관례에 따라 과거의 모든 피해에 대해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아낼 당당한 권리를 가지고있다.

조일현안문제해결의 최우선적과제도 일본의 과거청산이며 여기에 조일관계개선의 전망이 달려있다.

조일국교정상화는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문제이지만 과거청산은 일본의 력사적책임이며 회피할수도 미룰수도 없는 법적의무이다.

일본당국자들은 과거범죄에 대한 국가적책임인정과 배상을 반드시 하여야 한다.

그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국권을 강탈하고 조선민족의 생명권과 생존권을 무참히 유린말살한 전대미문의 범죄를 감행한 과거를 청산하려 하지 않는것은 일본특유의 파렴치성과 교활성의 집중적표현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일본의 과거청산회피는 본질에 있어서 범죄의 과거를 재현하고 《대동아공영권》의 옛꿈을 기어이 실현하려는 재침야망의 발로이다.

지난 세기 아시아를 《대식민지제국》으로 만들려는 망상밑에 작성한 《대동아공영권》에서도 일본은 첫 단계를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 만주, 북중국의 양자강하류지역, 이전 쏘련의 연해주지방을 포괄하는 이른바 《대동아》의 중핵지대를 창설하는것으로 정하였다.

일본당국의 《대동아공영권》야망은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고있다.

일본은 《한일합병》100년을 맞으며 지난해 말부터 NHK TV방송을 비롯한 주요언론들을 동원하여 피로 물든 조선침략사를 외곡하면서 일본이 감행한 청일, 로일전쟁을 미화하고 《명치영광론》을 고취하는데 주력하고있다.

이에 대해 8월 6일과 7일 일본 도꾜에서 진행된 《〈한일합병〉 100년을 묻는다》라는 주제의 국제토론회에서 연설한 일본 나라국립녀자대학 명예교수 나까쯔까 아끼라는 최근 일본에서 이또 히로부미를 미화하는 로골적인 언동들이 나도는 엄중한 사태에 언급하고 《조선을 다른 나라가 점령하면 일본의 안전이 보장될수 없다는 침략적이며 강도적인 이또의 식민주의적망언이 오늘 일본의 대조선정책에 그대로 지속되고있다.》고 폭로하였다.

이 모든것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제2의 《한일합병》을 꿈꾸고 그를 기화로 《대동아공영권》을 강행하려 한다는것을 명백히 보여주고있다.

일본이 이 땅에 제2의 《한일합병》을 강요하려 한다면 우리 군대와 인민은 모든 자위적억제력을 총발동하여 일본이라는 섬나라를 전면타격하고 세기를 이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모든 죄과를 총결산할것이다.

 

주체99(2010)년 8월 19일

평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