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8(2019)년 9월 16일 로동신문
유구한 력사와 절승경개로 자랑높은 내 조국 기행 다양한 생태와 오랜 형성력사를
오가산령에서 모포골이 있는 남쪽방향으로 우리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그저 산길이라고 하여도 힘겨울텐데 원시림구역이다보니 답사에 갑절 품이 들었다. 때없이 길을 가로막는 커다란 진대나무들을 타고넘어야 했고 타고넘을수 없는 진대나무는 허리를 깊숙이 수그리고 빠져나가야 했다.게다가 조금씩 내리던 보슬비가 후둑후둑 굵은 비방울로 바뀌면서 난관을 더해주었다.이곳 지형에 밝은 최영복동무가 길안내를 하지 않았더라면 길을 잃고 온종일 헤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모든것이 오히려 태고연한 원시림의 정취를 더 그윽하게 해주는것만 같았다. 《오가산자연보호구에 있는 천연원시림은 수종이 다양하고 수백년 자란 나무들이 많아 정말 멋있습니다.》 보기 드문 여러가지 식물들, 수백년 자란 피나무줄기에 직경이 약 30㎝는 실히 될 커다란 버섯이 드문드문 자라는 희귀한 광경이며 여기저기에 칠칠이 드리운 덩굴식물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건장한 남성의 튼튼한 팔근육보다도 더 실한 덩굴식물들이 키높이 자란 나무의 우듬지까지 칭칭 타래져 뻗어올라간 모양을 보고 놀라와하는 우리에게 최영복동무는 여기에서는 다래, 오미자를 비롯한 덩굴식물들이 수많이 자라는데 어떤 경우에는 아예 나무전체를 휘감아버리기때문에 나무가 선채로 죽기도 한다고 말하였다. 푸른 이끼로 뒤덮인 진대나무들도 그렇고 휘여든 나무줄기에 뾰족뾰족 잎새를 펼치고 자라는 식물도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일엽초라고 부르는 그 식물은 나무밑둥에서부터 포자번식을 하면서 높은 줄기끝에까지도 뻗쳐올라가 산다고 한다. 오가산에는 가는 곳마다 주목이 많았다.주목은 강한 살균효과를 나타내는데 이 나무로 만든 집기류를 사용하면 음식의 선도를 오래동안 보존할수 있다고 한다. 한뿌리에서 나온것처럼 꼭 붙어자라는 물황철나무와 잣나무의 이채로운 모습이며 바위와 나무그루터기우에 왕성한 뿌리를 내리고 식물들이 자라는 독특한 광경도 우리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천연원시림의 신기한 정경에 흠뻑 심취되여 걸음을 옮기던 우리는 어느덧 모포골밀영에 도착하였다. 제일먼저 눈에 안겨든것은 길량옆에 서있는 구호나무들이였다. 《독립조선의 령수 세월의 풍상에도 지워지지 않고 오늘도 항일선렬들의 숭고한 넋을 전하는 구호나무의 글발들을 우리는 경건히 바라보았다. 이처럼 깊고깊은 수림속에도 항일투사들의 발자취가 어려있으니 정녕 이 나라 그 어느 산야인들 무심히 대할수 있으랴 하는 생각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항일투사들의 알뜰하고 깐진 생활기풍이 어려오는 밀영을 깊은 감명속에 돌아보고난 우리는 그 주변에서 하나의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다. 앞에서는 솨솨 소리를 내며 맑은 내물이 흐르는데 그 기슭에 커다란 진대나무가 자리잡고있었다.가관은 푸른 이끼로 뒤덮인 그 한대의 진대나무우에서 애어린 분비나무, 쉬땅나무, 화살나무, 피나무, 전나무, 면마 등 6종이 넘는 식물들이 자라고있는것이였다.그야말로 하나의 작은 수림, 침활혼성수림의 축소판이라고 해야 할 희한한 광경이였다. 인간의 환상이 아무리 기발한들 이처럼 신기한 생태를 어찌 만들어낼수 있겠는가. 이 세상 어디에 가면 이런 기묘한 광경을 또 볼수 있으랴 하는 생각으로 하여 우리는 흥분을 금할수 없었다. 이렇듯 독특한 생태를 간직하고있기에 지난 수십년간 수많은 동식물학자들이 여기 오가산에서 연구론문을 완성하였고 해마다 여러 대학의 학생들이 찾아와 실습과 관찰을 진행하고있다고 한다. 연방 감탄을 터치는 우리에게 최영복동무는 오가산을 결코 자연이 펼친 신비경이라고만 말할수 없다고 하면서 수십년전 모포골밀영에서 받은 깊은 인상을 안고 우리는 다음목표로 된 오가산정점을 향하여 떠났다. 무성한 숲속을 헤치며 가던 우리앞에 별안간 자갈이 한벌 쭉 깔린 길이 나타났다.이 태고연한 밀림속에 어떻게 난 길인지 영문을 몰라하는 우리에게 최영복동무는 바로 이것이 일제놈들이 우리 나라를 강점하였을 때 오가산의 나무들을 략탈해가려 닦아놓았던 길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때 일제놈들은 이 깊은 산속에까지 좁은 레루를 놓고 운반기재를 리용하여 수많은 목재를 략탈해갔는데 그러다보니 이 길량옆에는 오래 자란 나무들이 별로 없다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지금까지 보아온 나무들과는 대비도 안되는 애어린 나무들만 촘촘히 자라고있었다. 뜻밖에 알게 된 사실앞에서 우리는 치밀어오르는 분격을 금할수 없었다. 수려한 오가산의 한가운데서 아직도 아물지 않은 원한의 상처를 보게 될줄 우리 어찌 상상이나 했으랴. 문득 장편서사시 《백두산》에 나오는 하나의 시구절이 떠올랐다. … 오오, 조상의 땅이여! 오천년 흐르던 그대의 혈통이 일제의 칼에 맞아 끊어졌을 때 떨어져나간 그 토막토막 얼마나 원한의 선혈로 딩굴었더냐? … 오가산의 귀중한 땅을 칼로 가르듯 일제놈들이 이곳에 낸 길 역시 시인이 분노와 아픔을 안고 절규한 《떨어져나간 그 토막토막》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북받쳐오르는 민족적의분과 적개심을 안고 간악한 일제가 저지른 죄악의 대가를 반드시 받아내고야말 의지를 가다듬으며 우리는 오가산정점에로 걸음을 다그쳤다. 가래나무골을 거쳐 오가산정점에로 오르는 길은 비교적 경사가 급하여 걸음을 옮기기가 조련치 않았다.키높이 자란 나무들때문에 대낮에도 어둑컴컴하게 그늘이 지군 하는 원시림속을 만약 그 누가 홀로 걷는다면 인적기도 없는 이곳에서 맹수와 맞다들릴가봐 저도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을것이다. 오가산에는 곰, 메돼지와 같은 맹수들도 많다고 하던 렴철훈연구사의 말이 떠올랐다.몇해전에는 오가산식물전시관앞마당으로 곰들이 무리지어 내려온적도 있다고 한다. 곰을 형상하여 만든 조각앞에서 대가리를 기웃거리는 곰들의 모양이 하도 우스워 몸을 감추고 바라보는 속에서도 웃음을 터뜨렸다던 렴철훈연구사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면서 최영복동무는 수십년전에 오가산일대에서 수백kg이나 되는 큰 범을 잡은적도 있다고 하였다.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며 산을 오르는데 앞서가던 최영복동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그가 멈추어선 곳으로 가까이 가보니 약간 펑퍼짐한 땅에 락엽을 걷어낸 자리가 둥그렇게 나있었다. 《노루가 자고일어난 자리입니다.분명 어제밤에 여기서 잔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노루는 절대로 우묵하게 패인 자리나 외진 구석에서 자지 않는다고 한다.사방이 훤히 잘 보이는 곳에서 자다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냅다 뛴다는것이였다. 오가산정점으로 거의다 오르게 되였을무렵 지금까지는 볼수 없었던 절벽이 우리앞에 나타났다.요란하게 생긴 기암절벽은 아니였으나 이번 등산길에 풀과 나무만 수없이 보아온 우리는 환성을 지르며 다가갔다. 우리가 《오가산의 절벽풍경》을 사진기렌즈에 담느라 여념이 없는데 아래쪽에 내려갔던 최영복동무가 별안간 《오소리다!》 하고 소리쳤다. 서둘러 그곳으로 가보니 아쉽게도 오소리가 바위밑에 난 짬으로 몸을 숨긴 뒤였다.우리는 야속한 눈길로 오소리가 들어간 바위밑을 바라볼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런들 어떠랴.비록 한번 맞다들려보았으면 했던 범도 곰도 이번 길에 나타나지 않았고 코앞에서 뛰여다닌 오소리도 놓쳤지만 오가산의 보배로움을 가슴그득히 느끼기에는 충분하였다.우리 나라에서 사는 짐승류의 절반이상이 오가산자연보호구에 퍼져있다는 자료를 놓고보아도 이곳의 동물상이 얼마나 풍부한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최영복동무는 이곳에 갖가지 새들도 보금자리를 틀고있다고 하였다. 국조인 참매로부터 시작하여 원앙새, 검독수리, 뻐꾸기, 접동새, 도요새, 후투디 등 새류만 하여도 백수십종이나 된다고 한다. 산을 오르면서 진대나무의 여기저기에 작은 구멍이 숭숭 뚫린것도 여러번 목격하게 되였는데 그것은 딱따구리가 나무속에 있는 벌레를 잡아먹느라 뚫어놓은것이라고 하였다. 힘겨운 등산길도 어느덧 끝나 우리는 마침내 산정점에 올랐다. 흰구름이 두둥실 산허리를 감돌아흐르고 멀리에선 아아한 련봉들이 우뚝우뚝 머리를 쳐들고있었다. 맑게 개인 날이면 이곳에서도 멀리 백두산의 웅자를 한눈에 바라볼수 있다고 한다. 구름을 뚫고 산과 강을 넘고넘으며 우리의 마음은 민족의 기상을 안고 거연히 솟아있는 백두산으로 끝없이 달리였다. 정녕 백두산줄기 내려 금수강산 삼천리, 내 나라 이르는 곳마다에는 아름다운 명산, 명소들이 그 얼마나 많이도 자리잡고있는것인가. 이 땅의 한그루 나무, 한포기 풀도 너무 소중해 여기 오가산일대의 인민들은 나라없던 세월 《애림》의 구호를 들고 산림자원을 마구 략탈해가는 일제놈들과 견결히 싸웠다고 한다. 하여 그때부터 오늘현재까지도 오가산기슭의 마을은 애림마을로 정답게 불리우고있었다. 참으로 오가산은 수려하고 희한한 자연생태가 보존되여있어서만이 아니라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이 어리고 우리 인민의 강의한 자존의 넋이 깃들어 더욱 귀중한 조선의 국보였다. 세세년년 길이길이 푸르러 설레이라, 민족의 자랑 오가산이여! 이런 뜨거운 념원과 확신을 안고 우리는 오가산자연보호구를 떠났다. 글 본사기자 리 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