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8(2019)년 10월 2일 로동신문
《오늘 우리 당이 요구하는 인재는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을 알고 사회주의건설에 복무하는 혁명인재, 심도있는 전문지식과 다방면적인 지식, 높은 탐구능력과 응용능력을 지닌 창조형의 인재입니다.》 그는 지난 7월말 남흥청년화학련합기업소에서 생을 마치였다. 주체과학의 최고전당인 우리는 이제 그의 생의 일단을 여기에 전하려고 한다.
내 생명 다할 때까지
원백선생이 폴리프로필렌촉매연구를 시작한것은 1980년대초이다. 그무렵 화학공업부문 일군들과 과학자들은 폴리프로필렌생산과 관련한 농촌에서라면 흔히 있고 또 누구나 범상히 여기는 일을 두고 생각할수록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였다. 얼마후 촉매화학연구소에서는 폴리프로필렌촉매연구와 관련한 토의가 진지하게 벌어졌다.세계적으로 첨단기술에 속하는 폴리프로필렌촉매생산기술을 화학공업의 력사가 오래지 않은 우리 나라에서 자체로 개발할수 있겠는가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폴리프로필렌촉매연구는 기술적난도가 매우 높고 폭발위험성이 큰것으로 하여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서로 다른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생각에 잠겼던 원백선생이 일어섰다. 《저를 폴리프로필렌촉매연구집단에 망라시켜주십시오.이 한몸을 다 바쳐서라도 우리 농민들을 어렵고 힘든 일에서 해방하시려는 평소의 조용한 성격에서 벗어나 불을 토하듯 이야기하는 그를 연구소의 일군들이 미더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렇게 되여 촉매화학연구소에서는 39살의 원백선생이 속한 폴리프로필렌촉매연구집단이 무어지게 되였다. 연구집단이 내세운 목표는 폴리프로필렌 1세대촉매를 뛰여넘어 화학공업이 발전된 몇개 나라들처럼 첨단급의 2세대촉매를 개발하는것이였다.그것은 초행길이였다.폴리프로필렌촉매생산기술을 독점한 나라들은 촉매를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팔아먹으면서 그 기술이 절대로 다른 나라로 새여나가지 않도록 전력을 다하고있었던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였을 때 원백선생을 비롯한 연구사들의 가슴은 비상한 각오로 끓어번졌다. 철저히 우리 식으로! 이것이 그들의 사고관점, 투쟁의지였다. 방대한 기술문헌들에 대한 연구와 끊임없이 계속된 실험… 완전히 밀페된 용기속에서만 안전성이 유지되는 활성이 강한 화학물질들에 의한 실험인것으로 하여 항시적인 폭발위험성을 안고있었지만 원백선생은 주저하지 않았다.어려운 실험과제가 제기될 때마다 그는 《내가 하겠소.》라고 하며 솔선 맡아나서군 하였다. 그렇게 여러해가 지난 어느 추운 겨울밤 원백선생은 퇴근길에 올랐다.근 한달만에 집으로 들어서는 남편을 맞이하던 박춘희녀성은 저도모르게 소스라쳤다.불에 그슬린 머리칼이며 솜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구멍이 숭숭 난 솜옷, 그런데다가 한손에는 붕대까지 감고있는 남편의 모습이 그를 놀라게 했던것이다.그날 실험을 하다가 또 폭발한것이 분명했다. 빨간 피가 슴배여나온 붕대를 쓰다듬으며 입술을 깨무는 그의 귀전에 남편의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부탁한 번역자료는 다 되였소?》 《여보, 당신 그러다가…》 울먹이는 안해에게 원백선생은 말했다. 《일없소.설사 이 길에서 생명을 잃는다고 해도 말이요.우리 흔히 과학연구사업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안온한 사무실이나 실험실에서 하얀 실험복을 입고 하는것으로 여긴다.그러나 촉매연구사 원백선생이 걸어온 고심어린 탐구의 길은 생사를 판가름하는 결전장에서 자기 한목숨을 서슴없이 내대고 살아온 결사의 순간순간의 련속이였다. 한고비 또 한고비 겹쌓인 시련과 난관을 뚫고헤치며 성공에로 걸음걸음 육박해가던 주체83(1994)년 7월 원백선생은 청천벽력같은 비보에 접하였다.온 나라가 눈물의 바다에 잠기고 산천초목도 몸부림치던 그 시각 원백선생은 룡남산마루에 올라 뼈저린 죄책감은 그의 의지를 백배해주었다. 1996년 8월, 원백선생을 비롯한 촉매화학연구소 연구집단은 우리의 힘과 기술로 폴리프로필렌 2세대촉매를 개발하고 우리의 설계로 생산공정을 꾸린데 기초하여 공업화를 실현함으로써 남흥청년화학련합기업소에서 우리 식의 촉매에 의한 폴리프로필렌수지마대생산을 높은 수준에서 진행할수 있게 하는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그때로부터 10여년세월이 흐른 주체98(2009)년, 일흔살이 가까와오던 원백선생은 섬유생산용 폴리프로필렌 4세대촉매개발이라는 첨단연구과제를 또다시 맡아안았다.로과학자의 심장속에는 당과 인생의 로년기에도
량심은 과학자의 생명
원백선생과 오래동안 함께 일한 교수 박사인 맹태원실장은 그에 대하여 감회깊이 추억하였다. 원백선생의 교수학직추천문제가 론의된것은 여러해전부터이라고 한다. 2010년까지 폴리프로필렌 4세대촉매개발과 관련한 기초연구를 끝낸 원백선생은 지체없이 남흥청년화학련합기업소로 떠날 차비를 하였다.그러는 원백선생에게 사람들이 년로한 몸으로 어떻게 객지생활을 하겠는가고 걱정하였다.그때 그는 웃으며 말하였다. 《걱정마십시오.연구사업이 실험단계에 그치고만다면 무슨 의의가 있습니까.실지 제품이 나와야 진짜 가치있는 연구가 아니겠습니까.》 연구성과가 현실에서 은을 낼 때까지! 그것이 참된 과학자의 량심이였다. 량심과 의리를 떠나 과학자의 삶에 대하여 생각할수 없는 그였기에 지난 시기 2세대촉매를 연구하던 때에도 공업화가 실현되여서야 비로소 연구사업이 끝났다고 여겼던것이다. 또다시 남흥청년화학련합기업소 폴리프로필렌직장의 생산현장에 깊숙이 몸을 잠근 그는 수년간의 고심어린 노력끝에 폴리프로필렌 4세대촉매생산의 공업화를 실현할수 있는 밝은 전망을 열어놓았다. 새로 꾸린 생산공정에서 우리 식의 4세대촉매를 리용하여 뽑은 폴리프로필렌섬유가 굵기와 당김세기, 실수률 등 여러가지 질적지표에서 세계적수준에 도달한다는것을 알게 되였을 때 누구나 기쁨을 금치 못했다. 《박사선생님, 성공입니다.》 직장장 량성국동무를 비롯한 직장의 일군들과 종업원들이 달려와 얼싸안을 때 원백선생의 두볼로는 뜨거운것이 흘러내렸다. 완성 또 완성이라는 높은 목표를 내세우고 촉매생산에 들어가는 10여가지나 되는 시약들의 순도를 99.9% 지어 100%까지 올리기 위해 밤마다 현장의 실험탁을 마주한채로 새날을 맞고 때로는 로동자들과 함께 정류탑우에서 쪽잠에 들군 한적은 그 얼마였던가. 그 기쁜 소식에 접하고 한달음에 남흥으로 달려왔던 맹태원실장이 그에게 대학으로 돌아갈것을 권고하였다.실장은 대학에서 원백선생의 교수학직추천문제가 론의되고있는 사실에 대하여 알려주었다.그러면서 그는 지난 시기 교육사업과 후비육성사업에서 이룩한 성과로 보나 이번에 거둔 높은 실적으로 보나 선생님은 당당히 교수학직을 받을수 있다고, 빨리 돌아가 교수사업에 더 힘을 넣는것이 좋지 않겠는가고 덧붙이였다. 그러나 원백선생은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이렇게 말하고난 그는 남흥에 좀더 머물러있으면서 생산공정을 완비하는 사업을 도와주어야 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때 남흥땅을 떠나며 맹태원실장은 생각했다고 한다.과학자의 본분을 다한다는것은 과연 어디까지인가고, 하나의 과학적발견을 하고 론문이나 완성하는것으로 과학자의 책임을 다하였다고 말할수 있겠는가고. 원백선생은 이렇듯 그 어떤 명예나 재산보다 량심을, 과학자의 본분을 먼저 생각하며 참된 삶의 자욱자욱을 새겨왔다. 1980년대에 그는 당의 은정어린 조치로 동유럽의 어느 한 나라에서 얼마동안 실습을 하고 돌아온적이 있었다.그때 짐이 류달리 많아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눈길을 모으게 되였다. 그런데 집으로 들어선 그가 방안가득 펼쳐놓은것은 과학도서들과 새 기술문헌자료들이였다.차곡차곡 쌓아놓으니 침대만큼이나 되였던 그 사실을 원백선생의 자식들은 오늘도 잊지 못해하고있다. 고령의 몸으로 남흥의 로동계급과 함께 일하면서 폴리프로필렌촉매의 국산화를 위해 지혜와 열정을 바쳐온 원백선생이 불치의 병이라는 진단을 받은것은 지난해 12월이였다. 심한 아픔으로 평양에 올라와 자식들과 함께 병원으로 갔던 그는 자기에게 내려진 뜻밖의 선고를 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의 생이 이제 얼마나 남았겠는가.) 그는 늘 손에 들고다니며 매일매일의 기록을 남긴 연구일지를 한장두장 번지였다. 그러던 그의 눈길이 2016년 5월 8일이라고 쓴 날자에 가멎었다.그옆에는 《화학공업부문에서 생산설비와 계통을 제때에 정비보수하고 생산능력을 확장하며 촉매의 국산화를 실현하여 주체비료와 비날론, 기초화학제품생산을 정상화하여야 합니다.》 촉매의 국산화! 그가 바라는것은 오직 하나, 우리 촉매에 의한 폴리프로필렌생산을 하루빨리 정상화함으로써 평양에 남아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안해와 자식들의 간절한 청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다시 남흥으로 떠났다. 우리와 만난 남흥청년화학련합기업소 기술과장 김현일동무는 말하였다. 《지난해말 평양에 갔던 원백선생님이 현장으로 다시 왔을 때 우리는 그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꿈에도 알지 못하였습니다.작업복차림으로 로동자들과 함께 어울려 일하고 기술지도를 하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렇게 원백선생은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폴리프로필렌촉매의 국산화를 위한 길에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였다. 그러고도 새로운 폴리프로필렌촉매생산공정을 확립하는데 바쳐진 남흥로동계급의 수고를 앞에 놓으며 우리 로동계급이 제일이라고 늘 이야기한 그였다. 오늘도 려명거리에 자리잡은 그의 집문패에는 《원백》이라는 이름이 씌여져있다.하지만 려명거리 새집들이가 있은 때로부터 지난 2년간 그가 집에서 산날은 불과 한달정도라는 사실이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가정보다 나라를 더 귀중히 여긴 참된 과학자, 그는 그는 사상과 뜻을 같이한 룡남산의 과학자들, 혈육의 정을 나누며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남흥의 로동계급과 함께, 전진하는 우리 조국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있다. 본사기자 허명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