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일  성

 

2. 오의성과의 담판

 

김일성동지회고록《세기와 더불어》 3

제8장 반일의 기치높이

 

투쟁무대를 왕청으로 옮긴후 우리의 활동에서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가장 큰 난문제의 하나는 반일부대와의 관계에서 생긴 심각한 대립이였다. 일제의 집요한 리간책동과 반일부대 두령들의 빈번한 동요, 쏘베트좌경로선의 해독적인 후과로 하여 항일유격대와 구국군과의 관계는 1933년에 들어와서 다시금 교전직전의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였다.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이 9.18사변후부터 만주지방에서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에 막대한 정열을 기울여왔다는것은 앞에서도 이미 지적하였다.

그런 노력의 결실로 초기에는 왕청유격대도 반일부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수 있었다. 유격대와 자위대를 일방으로 하고 관영장부대를 타방으로 하는 두 무력이 힘을 합쳐 1932년 봄에 덕골에서 일본수비대의 침공을 격퇴한것은 그 좋은 실례로 된다.

그때 대두천의 일본군수비대는 국민당시절에 해놓은 목재를 실어가려고 수십대의 마차를 끌고 덕골방향으로 나왔다. 대왕청, 소왕청 골안에는 목재가 무진장하게 쌓여있었다.

이날 아군은 유인매복전으로 40∼50명이나 되는 일본수비대병력의 대부분을 소멸하고 많은 무기를 로획하였다.

덕골전투는 반공풍조가 뿌리깊이 스며있는 왕청일대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상을 개선하고 구국군과의 관계를 적대적관계로부터 협동적관계로 전환시키는 좋은 계기를 지어주었다. 이 전투는 공산주의자들이 구국군속에 침투할수 있는 길을 닦아놓았다. 덕골전투가 있은후 김은식, 홍해일, 원홍권, 장룡삼, 김하일 등은 관부대에 입대하였다.

명사수인 김하일은 교통원으로 임명되였고 지식분자인 김은식은 인차 참모장이 되였다.

덕골전투가 있은 다음에도 마촌군중들은 이전날과 다름없이 관부대장병들의 옷을 빨아주었고 치솔, 치분, 비누, 수건, 담배쌈지와 같은 선물들을 정성껏 마련해보내였으며 아동단원들을 내세워 위문공연도 자주 조직하였다. 공청원들은 선전문과 삐라를 가지고 정치사업을 하였다.

구국군이 공산주의자들을 보고 《퉁즈》(동무)라고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관부대의 장병들은 혁명군대원들을 만나기만 하면 《퉁즈》라고 불렀다.

그 부대에 들어간 동무들은 모두 구위이상 정도의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여서 구국군장병들과의 사업을 아주 능숙하게 하였다. 관영장은 공산주의자들의 인품과 능력에 홀딱 반해버리고말았다. 그들을 쟁취한것은 구국군의 다른 부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데서도 주요한 의의를 가지는 사변이였다.

훈춘지방의 항일유격대는 구국군부대들과 정보교환까지 하였으며 지어는 주구청산도 공동으로 하였다. 연통라자유격대는 구국군이 원호한 총으로 자신들을 무장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이 더 진공적으로 달라붙으면 구국군과의 련합전선을 실현하는데서 전환을 가져올수 있는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였다.

그러나 좌경모험주의자들이 저질러놓은 《김명산사건》으로 하여 모처럼 이루어진 반일부대들과의 우호관계는 령으로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관영장이 흰기를 들고 일제를 찾아가는 엄중한 사태를 빚어냈으며 구국군의 다른 부대들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격리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연길현에서는 최현부대가 귀순하는 반일부대병사들에게 기관총사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구국군과의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왕청유격대는 초기에 구국군과의 관계에서 실책을 많이 범하였다. 대대를 책임진 량성룡은 몇자루의 무기에 현혹되여 통일전선정책을 정확히 집행하지 못하였다. 그는 품성도 좋고 싸움도 잘하는 유능한 지휘관이였지만 군사실무주의와 모험주의에 빠져 통일전선을 홀시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량성룡을 되게 비판하였다.

관영장의 전철을 밟지 않고 항일유격대와의 련합을 계속적으로 견지한것은 우리 영향을 많이 받은 코산부대였다. 그 부대는 1933년 5월 단오날 박두성이 인솔하는 잣더기(현재의 태평촌)자위대와 련합하여 동녕현성에 기지를 두고 동남차를 거쳐 십리평으로 쳐들어온 300여명에 달하는 일본군 수비대와 위만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수많은 적들을 소멸하였다.

구국군이 망원경계를 무시하고 문전보초만 세우고있었기때문에 반일자위대는 코산부대의 망원보초까지 서주었다. 코산은 다른 반일부대들에 지급으로 중요한 련락을 보낼 때에도 십리평의 반군사조직들에 곧잘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면 소선대원들이 반일부대병사들을 대신하여 책임적으로 통신을 전달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우호관계가 다른 부대들과의 관계에까지는 확산되지 못하였다. 유격구역을 휩쓸고있던 좌경망동바람은 코산과의 이 동맹관계마저 깨뜨려버릴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있었다.

쏘베트의 좌경시책은 어제날까지 동맹관계에 있었거나 동정적인 관계에 있던 반일부대들의 부패변질을 앞당긴 촉진제의 역할을 하였다.

좌경기회주의자들은 중국인반일부대와의 사업도 극좌적으로 하였다. 그들은 《구국군과는 하층통일만 해야 한다.》느니, 《구국군병사들로 하여금 자기 두령을 죽이고 반변해나오게 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지주, 자산계급인 장관들을 타도하라!》, 《병사들은 반변을 일으켜 유격대로 넘어오라!》는 구호를 망탕 고창하였다. 이런 구호는 반일부대와의 상층통일을 파괴하는 해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반일부대는 조선사람들을 《일본의 앞잡이》라고 하여 죽이고 《로꼬리 궁챤당》이라고 하면서 죽이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이것을 기화로 조선인민과 중국인민,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 항일유격대와 반일부대들을 리간시키기 위한 전면적인 공세를 벌리였다. 그들은 만주를 강점한 첫날부터 장학량의 구동북군에서 항일의 기치를 들고 떨어져나온 구국군부대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발악하였다. 일제가 여기서 제일 두려워한것이 바로 유격대와 구국군의 련합이였다. 공산주의자들이 만일 구국군부대들과의 합작을 실현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일본제국주의의 치안유지와 대륙침략을 방해하는 무서운 힘으로 되여 저들의 숨통을 조이게 되리라는것을 그들은 잘 알고있었다.

일본의 리간솜씨는 벌써 만보산사건과 룡정사건(조작만 하고 실현되지 못하였다.), 무순사건들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권모술수에 이골이 난 일제의 첩보모략기구는 조중인민의 선린관계를 약화시킬 목적으로 금수나 돌부처도 낯을 붉힐 무순사건이라는 살인극도 서슴없이 조작하였다.

무순사건이란 일본의 첩보기관이 한 일본인에게 단도를 주어 무순에서 아무 죄도 없는 중국사람을 살해하게 한 사건이다. 일본의 모략가들은 그때 조선사람이 중국사람을 죽이고 도주하였다는것을 선전하기 위하여 자객에게 두루마기를 입히고 조선사람으로 변장시키였다. 살인은 성공하였으나 자객이 입고 갔던 두루마기밑에서 일본옷이 발견되고 그가 일본족이라는것이 드러나는 바람에 무순사건은 조중인민을 리간시키려던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한채 하나의 실패작으로 끝나고말았다.

이런 사건들을 확대하면 류조구사건도 되고 로구교사건으로도 된다. 일본이 어떤 모략을 꾸밀 때 적용하는 방정식은 이처럼 유치하고 악랄한것이였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가짜를 잘 날조하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수법때문에 노상 골탕을 먹으면서도 그 가짜에 쉽게 속아넘어가군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중인민을 리간시키기 위하여 《조선사람이 만주를 빼앗으려 한다.》, 《공산당은 구국군을 무장해제시키려 한다.》고 선전하는 한편 《민생단》에 망라된 반동분자들을 내세워 《간도조선인자치구》와 《조선법정자치정부》의 수립을 골자로 하는 조선인의 간도자치를 부르짖게 하였다. 때로는 중국사람들의 집에 불을 질러놓고 조선유격대가 한짓이라는 황당한 소문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항일유격대와 반일부대와의 련합전선을 파국에로 이끈 또 하나의 요인은 일제의 악랄한 귀순공작과 그에 따르는 반일부대 두령들의 항일의식의 변질에 있었다.

1933년 1월에 훈춘현 토문자에 주둔하고있던 왕옥진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적들에게 투항하였다. 그중 수백명에 달하는 력량이 우리를 반대하는 림시유격대로 개편되였다. 2월에는 소왕청에 있던 관부대의 반수가 귀순하여 만주국 보위단과 공안국에 채용되였으며 같은 달 대황구근처에서 출몰하던 마계림부대장병 수십명도 전향하여 하마탕자위단에 합류하였다. 왕청현 이차자구의 강해부대와 화소포의 청산부대 장병들도 귀순을 신청하였다.

일제는 로흑산일대에 웅거하고있던 악명높은 토비대장 동산호를 매수하여 리광의 별동대를 전원 참살하게 하였다.

유격대는 구국군의 행패가 두려워 밤에만 행군하고 낮에는 행군조차하지 못하는 형편이였다. 구국군과의 관계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조선사람이 살아서 숨조차 쉴수 없었다. 구국군과의 관계를 적대적관계로부터 동맹관계로 전환시키는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혁명을 계속하느냐 마느냐 하는 운명적인 문제로 다시금 상정되였다.

나는 용단을 내려 구국군 전방사령인 오의성을 찾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왕덕림이 간도땅에서 떠나가버린후 구국군의 실권은 그가 쥐고있었다. 오의성을 잘 설복하면 《김명산사건》과 리광별동대참살사건으로 하여 동만땅에 빚어진 유격활동의 경직상태를 종식시키고 우리 혁명이 직면하고있는 난국을 얼마든지 타개할수 있을것이라는 신심이 생기였다.

나는 오의성과의 담판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반성위와 함께 진지한 의논을 하였다. 반성위는 나의 결심이 정당한것이라고 긍정해주면서도 오사령한테로 직접 찾아가는것은 삼가하라고 말하였다. 중국사람이 간다면 모르겠지만 조선사람이 가서는 오의성과 같이 자존심이 강하고 편견이 심한 사람을 휘여낼수 없을것이라고 하였다. 반성위는 오사령이나 채사령을 돌려세우자면 그의 배후에서 모사노릇을 하는 리청천이 작간질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그것도 문제라고 하였다.

나는 반성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떤 장애가 있든 가야겠다고 고집하였다.

《리청천도 조선사람인데 반공분자이긴 하지만 설복을 잘하면 우리를 방해하지 않겠지요. 그 사람과 나는 서로 구면입니다. 길림에서 3부통합회의를 할 때 그와 이야기도 여러번 나누어보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리청천하고는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여기서 구면, 초면이 무슨 상관이 있소? 그런 사람들이 뭐 구면, 초면을 가리는줄 아오? 게다가 오의성은 벽창호라지 않소. 승산이 없거든.》

반성위는 나의 모험을 저지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나에겐 안도에서 우사령을 설복한 경험이 있습니다. 우사령을 돌려세웠는데 오의성이라고 왜 돌려세우지 못하겠습니까.》

《우사령과 담판을 할 때는 류본초선생이 참모장으로 있지 않았소. 그게 좋은 배경이였단 말이요.》

《그런 배경은 오의성부대에도 있습니다. 진한장이 거기서 비서장을 하고있지 않습니까. 참모장을 하는 호진민도 공작원입니다.》

나는 이 한마디의 말때문에 그만 자가당착에 빠지였다. 내가 든든한 배경이라고 력설한 진한장한테서 얼마전에 결정적인 응원을 바란다는 요청의 편지가 왔던것이다. 그는 편지에서 자기 개인의 힘으로 오사령과의 동맹문제를 해결하는것은 료원한 일로 되였다고 전제를 둔 다음 《김일성동지가 와야만 문제를 해결할수 있으니 조직에서 가급적으로 대책을 세워 줄것을 바란다.》고 호소하였다. 반성위도 이 사연을 알고있었다.

《혁명의 전도가 아직 료원한데 그렇게 모험을 해서야 되겠소? 제발 심사숙고해주시오.》

반성위는 끈덕지게 나를 설복하였다.

《자기의 몸을 개인의 몸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겠소. 자칫하면 제2의 리광이 될수 있다는걸 잊지 말아야 하오. 우리가 다 죽어서 백골이 되더라도 동무들만은 살아서 끝까지 조선을 위해 싸워줘야 할게 아니요!》

반성위의 그 말은 나를 저으기 감동시키였다. 그러나 나는 공동전선의 대망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았다.

반성위가 훈춘현으로 떠난 다음 동만의 각 현에 있는 유격대 대표들은 왕청에 모여서 회의를 열고 통일전선문제를 심각하게 토의하였다. 이 회의에서도 중심을 이룬 안건은 구국군과의 동맹문제였다. 이를테면 오의성, 채세영, 사충항 등의 구국군이 집결되여있는 라자구에 누가 담판을 가느냐 하는 문제였다.

나는 구국군의 집결처에 내가 가야 한다는것을 완강히 주장하였다. 회의는 호위성원이 100명 정도 따라가는 조건에서 나의 라자구행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나의 주장을 받아들이였다. 오의성을 찾아가는 경로가 이처럼 간단치 않았다.

오의성과 담판하자면 먼저 진한장이나 호진민과 같은 사람들을 통하여 실정부터 료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진한장은 오의성의 비서장인데다가 고정한 사람이여서 사무실에만 배겨있었지 밖에 잘 나다니지 않았다. 설사 밖에 나온다고 하여도 조선사람들과 접촉하면 오해를 받을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이전날 내가 관여하던 공청조직의 성원이였고 또 그때 서로 맹세한바도 있기때문에 나의 일이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줄수 있었다.

나는 진한장과 호진민에게 편지를 쓰고 뒤이어 오의성과 채세영에게도 서한을 보내여 우리가 라자구로 가는 취지를 밝히였다. 발신인이름옆에는 격을 갖추느라고 네모나게 생긴 큼직한 도장도 찍었다.

편지를 발송한 다음 라자구지방의 혁명조직을 통해 오의성부대의 동태를 알아보았는데 반응이 좋았다. 라자구의 지하조직들은 구국군이 시내입구에 《조선인반일유격대를 환영한다!》는 구호를 써붙인 사실까지도 우리에게 통보해주었다.

나는 선발된 100여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라자구로 떠났다. 새 군복을 입고 새 총에 새 가죽가방을 메고 질서정연하게 행군해가는 우리 부대의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였다.

나는 백마를 타고 맨 앞장에서 대오를 인솔하였다.

태평구에 도착한 우리는 반일인민유격대의 라자구입성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고 오의성부대에 전령병을 파견한 다음 거기서 회답을 기다리며 하루밤 류숙하였다.

다음날 라자구에서 담판을 하는데 동의한다는 내용의 통지가 왔다. 오사령이 이처럼 담판에 응해나서기까지에는 진한장의 보증이 큰 힘을 냈다. 내 편지를 받고 오의성에게 자기가 김대장을 아는데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오의성은 그 말을 듣고나서 《그 사람이 공산당인데 너는 어떻게 되여 잘 아는가? 너도 공산당이 되지 않았는가?》고 물었다.

진한장은 김대장이 동창생이기때문에 알고 지낸지가 퍼그나 오래다고 하였다.

《너의 동창생이고 좋은 사람이라면 점심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만나봐야 하겠다.》

우리는 구국군이 우리를 억류하고 해칠수 있는 경우에 대처하여 즉시 응원을 할수 있는 무력으로 훈춘에서 온 1개 중대를 태평구 아래마을에 배치한 다음 나머지 50명만 데리고 붉은기를 앞세우고 나팔을 불면서 위풍당당하게 라자구시내로 들어갔다.

유격대를 마중하러 나왔던 진한장이 구국군 지휘부로 나를 안내하였다. 담판중에 나를 보좌하게 되여있는 조동욱과 련락병 리성림도 목갑싸창을 차고 진한장을 따라갔다. 지휘부에는 국민당계통의 부관들이 많이 와있었다.

오의성은 수염을 길게 드리운 풍채좋은 사나이였다.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않고 호랑이가죽우에 비스듬히 누워서 담화도 하고 차도 마시는 거만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날은 격식을 차려 깍듯이 나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중국식례절만은 지키지 않았다.

나는 첫 인사로 《장학량의 구동북군에서 많은 부대들이 일본군에 투항할 때 사령님네 부대가 항일에 나선것을 애국적장거로 높이 평가합니다.》하고 겸손하게 말했다.

오의성은 그 말을 듣자 입가에 미소를 짓고 부관을 시켜 차를 가져오게 하였다.

《내 김대장이 일본놈과 잘 싸운다는 소문을 들어서 다 알고있소. 당신네 군대는 수가 적으면서도 일본놈과 잘 싸우는데 우리는 수더구가 많지만 당신네들처럼 일본놈과 잘 싸우지 못해. 우리 사람들한테서 들으니까 당신이 데리구 온 군대들이 알쭌히 새 총을 메구 왔다는데 그걸 몇자루 우리한테 있는 낡은 총과 바꾸지 않겠소?》

담판은 오의성의 이런 인사로부터 시작되였다. 인사치고는 아주 까다로운 인사였다. 한쪽으로는 추어올리고 한쪽으로는 응해나서기 곤난한 흥정을 붙여 상대방의 속을 떠보려는 오사령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가 쓴밥단밥 다 먹어본 외교의 능수이고 능구렝이라고 판단하였다. 수천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는 전방사령이 새 총 몇자루가 탐나서 례의도 없이 첫 대면에 그런 주문을 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바꿀게 있나요. 그런것쯤은 거저 줄수도 있습니다.》

나는 오사령의 제의를 흔연히 받아들이면서도 넌지시 꼬리를 달았다.

《그거 뭐 궁색스럽게 그런 놀음을 할거나 있습니까. 일본군대와 한바탕 싸우면 될터인데. …그렇지만 정 요구한다면 그까짓거 거저 줄수도 있습니다.》

오의성은 수염을 내리쓴 다음 다른 각도에서 또 들이댔다.

《그런데 당신네 거 공산당이란건 무엇인가? 저 진한장이란 사람은 공산당이 나쁘지 않다고 하지만 난 통 믿을수가 없거든. 주보중두 공산당인데 내 고문으로 있을 때 보니까 무얼하는지 꾸물꾸물하는게 마음에 안들더군. 그래서 그 사람을 줴내깔렸지. 그런데 당신네 공산당은 상공당도 마스고 다닌다면서?》

《우리가 무엇때문에 상공당을 마스겠습니까. 그건 나쁜 사람들이 공산당한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하여 꾸며낸 선전이지요.》

《그럼 김대장도 상공당에 절을 하오?》

《난 상공당을 마스지도 않고 또 거기에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까 절도 하지 않지요. 그래 오사령은 절을 하는가요?》

《안하지.》

《그러니까 내가 절을 안하는거나 오사령이 절을 안하는거나 같고같지 않습니까.》

말문이 막힌 오의성은 빙그레 웃으면서 아까처럼 또 수염을 쓸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그런데 당신네 공산당은 남자, 녀자의 구별이 없이 한이불밑에서 자고 남의 재산을 막 빼앗는다는데 그게 사실이요?》

나는 담판의 성패여부가 이 대목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데 달려있으며 오의성에게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옳바른 인식을 주기 위해서는 그가 던진 미끼를 재치있게 받아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도 나쁜 사람들이 꾸며낸 선전이지요. 공산주의물을 잘못 먹은 몇몇 사람들이 지주의 땅이라면 친일, 반일을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빼앗은 사실이 있는데 우리도 그걸 잘되였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또 지주라는것들이 소작인들이 굶어서 죽어가는데 선심이라도 써서 먹을것을 주어야지 저만 잘 살겠다고 아닌보살을 하니 이게 도리가 됐는가요? 지주들이 식량만 주면야 무엇때문에 들고일어나겠습니까? 배는 고픈데 살길이 막히니 싸울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잘 모르긴 하겠지만 옛날 중국에서도 태평천국이라는 란리가 있었다는데 그것도 아마 그렇게 돼서 일어난것 같습니다.》

오의성은 동감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건 그럴듯한 말이요. 한참 국란이 심한 때인데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자는거야 나쁜놈이지.》

나는 내친김에 계속 공세를 들이대였다.

《그리고 남자, 녀자가 한이불을 쓰고 잔다는것도 공산당을 모욕하느라고 일본사람들이 꾸며낸 소리입니다. 우리 유격대에도 녀자들이 많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서로 마음이 맞으면 부부간이 될수는 있구요. 우리는 남녀간의 규률이 엄격합니다.》

《그러면 그렇겠지. 한 녀자를 가지고 여러 사람이 교대하는 일이야 없겠지.》

《물론이지요. 우리 공산당처럼 청백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간 다음부터 오의성은 나를 김사령이라고 부르면서 시까스르려는 말투를 거두어들이였다.

《하하, 김사령이 나를 공산당으로 만들자구 한다.》

《오사령을 공산당으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공산당이란건 누가 시켜서 되는게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싸워서 이기자면 힘을 합치는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의성은 신경질적으로 팔을 홱 내저었다.

《우린 따로 하면 했지 공산당과 합작은 안하우!》

《그래두 힘이 부족한 때에야 합작해서 일본놈과 싸우는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글쎄 난 공산당신세는 안진다니까.》

《사람의 전도를 어떻게 압니까. 그러다 이제 우리 신세를 지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것두 그럴듯한 말이요. 사람의 전도야 정말 귀신도 알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 김사령에게 한가지 부탁이 있소. 쟈쟐리에 들지 않겠소? 내 생각에는 공산당보다 우리 쟈쟐리에 드는게 좋을것 같은데…》

오의성은 이런 질문을 느닷없이 던지고나서 내쪽에서 주춤거리는 눈치를 좀 보이자 깨고소해하는듯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지켜보았다.

나는 그때 정말 쟈쟐리란 말을 듣고 정신이 아찔해졌다. 오사령이 나를 골탕먹일수 있는 만점짜리 문제를 내던진것이였다.

쟈쟐리란 한집안이라는 뜻인데 중국사람들의 《청홍방》이라는 조직이다. 운하를 파고 배를 끌던 로동자들이 생활상 고통을 참을수 없어 황제를 반대하여 내온 조직이다. 이 조직에서는 네것내것이 따로 없다고 하였다.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조직이였다.

결의형제를 무으면 형님, 동생사이가 되지만 쟈쟐리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사이가 되였다. 쟈쟐리에는 아버지될 사람이 아들을 얻기 위해 들어가는것이 아니라 아들될 사람이 아버지를 얻기 위해 들어갔다.

쟈쟐리는 문벌이 높은데 들수록 위풍이 있고 권한도 있었다. 쟈쟐리에 들어가자면 식을 해야 했다. 우리의 지시를 받고 제24대항렬의 쟈쟐리에 들어갔던 김재범(김평)의 말을 들어보면 그 의식이 볼만하다고 하였다. 새로 쟈쟐리에 들어간 사람은 아버지될 사람과 선배들한테 절만도 몇십몇백번 해야 했다.

이런 조직에 나를 들라고 하니 야단이였다. 싫다고 거절하면 모처럼 잘되여가던 담판이 파탄될것 같고 들겠다고 동의해나서면 당장 부처님앞에 끌고가서 절을 시킬 판인데 그것은 오의성한테 코를 꿰여다닐 길을 스스로 닦는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담판준비를 할 때 이런 정황까지는 미처 예견하지 못하였다. 어쨌든 이자리는 면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사령하고 같이 쟈쟐리에 드는것은 뜻이 깊은 일이긴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조직에 드는것은 당조직의 허락을 받아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마음대로 하지 못하지요.조직에서 승인할 때까지는 그만둡시다.》

《하하,그럼 그쪽은 절반짜리 사령이지 옹근사령은 아닌게로구만.》

오사령은 약간 아쉬워하는듯한 기색으로 나를 찬찬히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질문을 하였다.

《김사령,그래 술은 마시는지?》

《마시기는 좀 마시는데 혹 실수하여 반일하는데 지장이 될가봐 마시고싶어도 마시지 않지요.》

《당신네 공산당은 괜찮아. 김사령네하구는 합작하구싶은데 맑스의 물을 먹을가봐 걱정이거든. 우리 사람들한테 공산당선전을 하는건 나빠.》

《사령, 그건 념려마시오. 우린 공산당선전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항일선전만 하겠습니다.》

《당신네 공산당은 공산당치고는 량반공산당이군! 그런데 왕청공산당이 관영장부대의 무장을 해제한건 잘못이야. 김사령은 그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어떻게 생각하고 뭐고가 있습니까. 그거야 실책중에서도 제일 엄중한 실책이지요. 그래서 우리도 지난해에 왕청별동대를 되게 비판했습니다.》

《김사령은 참 공정한 군사가야.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공산당이 하는 일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그른데가 없다고 하지 않겠소. 어떻게 그럴수가 있소.…》

《공산주의자들도 사람들인데 어찌 실수가 없겠습니까. 나도 이따금 실수를 합니다. 그건 내가 기계가 아니고 사람이기때문입니다. 일을 많이 하느라면 잘못을 범할 때도 종종 있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공부를 많이 하고 정신수양을 많이 합니다. 그래야 실책도 적을게 아닙니까.》

《그건 그렇소. 일을 안하는 건달뱅이들한테야 실수라는것두 있을수 없지. 공산당이 일을 많이 해. 그건 우리두 인정하는거구. 어쨌든 김사령하구는 말할 재미가 나거든. 솔직해서 의사소통이 잘된단 말이요.》

오사령은 이런 말로써 담판을 일단락지은 다음 내 손을 다정스럽게 잡았다놓았다. 담판의 성공은 확정적인것이였다. 그는 기분이 좋은 김에 진한장이 김사령의 친구라는데 이 사람이 글솜씨를 가지고 자기 일을 도와준다고 하면서 그가 없으면 자기는 눈뜬 소경과 같은 신세가 된다고하였다.

오의성은 나에게 호진민을 아는가고 물었다. 안다고 하면 우리끼리 서로 내통한다는것이 알려질것 같아 모른다고 대답했더니 사령은 호진민을 호출하여 이 사람이 김일성사령이니 서로 알고 지내라고 성의있게 인사까지 시키였다. 나와 호진민은 생판 모르는 남남처럼 례법대로 초면인사를 하지 않을수 없었다. 진한장은 오의성이 이처럼 자기의 막료들을 불러다가 인사시키는것은 드문 일이라고 하면서 오늘 담판은 성사된것으로 믿어도 된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이날 우리는 오의성과 함께 항일유격대와 반일부대의 일상적인 련계를 보장하며 두 군대의 공동행동을 유지하는데서 조절자적역할을 감당하게 될 반일부대련합판사처라는 상설적인 기구를 내오기로 합의하고 그 성원문제까지 토론하였다.

판사처 반일부대측 대표로는 중국사람인 왕윤성을 내세우고 유격대측대표로는 조동욱을 선발하였으며 사무실은 라자구에 설치하되 오사령의 지휘부 가까이에 두기로 하였다.

이날 오의성은 우리를 위해 푸짐한 점심상을 차렸다.

진한장은 그것도 특대라고 귀띔해주었다.

오찬중의 담화도 역시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되였다. 일제의 만주강점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오의성은 시꺼먼 눈섭을 푸들푸들 떨며 비분강개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동산호가 리광을 참살한데 대해서도 격분을 표시하였다.

《그것들은 원래 토배기비적패거리들인데 우리하구는 갈래가 달라. 그 동산호가 왜놈의 하수인이 되다니. 그 놈팽이들이 김사령네 부대를 해친건 천벌을 받을 일이야. 우리 중화민족가운데 그런 악마가 있다는건 참 부끄러운 일이거든.》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한번 오사령의 인끔을 가늠할수 있었다.

나는 담판결과와 오의성의 환대에 만족하였다.

오사령은 틀도 차리고 사상적으로는 국민당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였지만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였다. 중요한것은 그의 항일의지와 구국열이 남달리 강하다는것이였다. 사상을 따지고 계급을 따지고 민족을 따지면서 제한성만 들춰내면 합작을 성사시킬수 없었다. 공동전선의 경륜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제한성을 무시하게 하였다.

나는 그날로 소왕청에 오사령과의 합작이 잘되여간다는것과 문제는 채세영인데 그와도 점차적으로 협상해보겠지만 통일전선을 위해서는 동녕현성과 같은 큰 성시를 칠 필요가 있으니 아무때나 출동할수 있도록 준비를 잘해두라고 련락하였다.

오의성과의 첫 접촉에서 성과를 거둔 우리는 지체없이 구국군에서 가장 완고한 세력인 채세영부대를 반일련합전선에 끌어넣기 위한 사업에 달라붙었다. 진한장도 오사령은 변덕이 없을것 같으나 채사령이 문제인데 리청천을 쫓아낼 방도가 없겠는가고 걱정하였다. 오사령의 수하에는 1개려단 정도의 병력밖에 없었지만 채사령네 부대는 수적으로 그보다 더 많았다.

나는 리청천에게 담판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리청천은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공산군의 무장을 해제하자고 채세영을 꼬드기였다. 리청천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던 채사령도 그 간계만은 반대하였다. 오의성사령이 김대장을 데려다가 오찬까지 하였고 또 김대장이 싸움 잘하는 왕청부대를 데리고왔는데 잘못 다쳤다가는 큰 변이 난다고 거절했다는것이다. 리청천이 어떻게나 반공바람을 세게 불어넣었던지 우리는 채세영문전에 도무지 접근조차 할수 없었다.

문제해결의 유일한 방법은 채사령부대를 오의성과 떼여놓는데 있었다. 우리와의 합작에 응해나선 오의성을 채세영으로부터 떼여내는 길은 오사령의 기간부대인 사충항려단을 우리의 영향하에 두는데 있었다. 려단장을 잘 설복하면 오의성과의 담판에서 이루어진 초보적성과도 더 공고히 할수 있었다.

려단의 구성을 알아보니 대체로 하층계급출신이였다. 사충항자신도 9살때부터 지주집에서 돼지몰이를 하다가 먹고 살기 위해서 군복을 입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는 길림륙군에서 왕덕림의 부하로 복무하다가 9.18사변후 구국군이 되여 소대장, 중대장, 련대장을 거쳐 한개 려단의 주인이 되였다. 그는 싸움을 즐기는 전형적인 군인기질의 소유자였다.

나는 호진민의 소개신을 가지고 그날로 사충항을 만났다. 내가 면회를 요청하자 려단장은 아무런 겉치레도 없이 만사를 제쳐놓고 나를 만나주었다. 그는 왜놈을 잘 치는 김대장이 자기네 부대에 온것은 경사라고하면서 나를 친구로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 사람에게는 반공의식도 없었고 군벌기질도 없었다. 아주 소탈하고 점잖은 사람이였다.

사충항은 김대장부대가 일본군대와의 싸움에서 련전련승하는것은 조선사람의 자랑이자 동만인민의 자랑으로 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 당시 쟈피거우전투,량수천자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들을 통하여 일제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비록 신문들이 보도는 하지 않았지만 간도지방에 그 소문이 굉장히 퍼졌다. 놀랍게도 사충항은 그 전투의 전말과 전과를 잘알고있었다.

련합하여 동녕현성의 적을 치자는 나의 제의는 사충항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나는 오래전부터 우리의 측근에 김대장네 유격대와 같은 강력한 우군을 두고싶었소. 오늘부터 우리는 한형제요. 김대장의 원쑤자 나의 원쑤고 김대장의 벗이자 나의 벗이요.》

려단장과 나는 담판의 성공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억세게 포옹하였다. 그후 우리는 어려운 싸움의 나날에 피와 살을 나누는 형제가 되고 전우가 되였다. 사충항이 독립2사 사장으로 임명된후부터 전사할 때까지 우리의 우정은 변치 않고 계속되였다.

라자구담판의 결과로 하여 항일혁명앞에 가로놓였던 가장 큰 암초는 제거된셈이였다. 우사령과의 합작이 공동전선을 위한 시발점이였다면 오의성과의 담판은 그 시발점에서 얻은 성과를 전동만의 범위에로 확대시킨 력사적인 진일보였으며 5.30폭동과 만보산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조중 두나라 민족의 무의미한 대립과 류혈을 종식시키고 반만항일의 거세찬 흐름을 하나의 대하에로 합류시킨 통쾌한 사변이였다.

오의성,사충항과의 담판을 통하여 우리가 새롭게 깨달은것은 공동전선도 자기의 주체적인 힘이 강해야 실현할수 있다는것이였다. 만일 우리가 1932년의 남북만원정과 왕청을 중심으로 하는 1933년의 대소전투들에서 자체의 군사적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거나 유격대를 승승장구하는 무적의 철군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더라면 오의성은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밖에서 쫓아버렸을것이다. 오사령과의 합작이 그처럼 순조롭게 이루어질수 있은것은 우리의 힘이 강했고 정치도덕적풍모가 구국군보다 우월했기때문이며 우리의 열렬한 애국심과 국제주의적우애심, 자기 위업의 정당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그를 공감시켰기때문이였다.

나는 구국군과의 합작을 실현한 그때부터 통일전선을 위한 최상의 수단은 주체적힘이라는것과 이 힘을 키우지 않고서는 어떤 우군이나 우방과도 련합하여 투쟁할수 없다는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혁명의 주체를 튼튼히 하기 위한 투쟁을 일생동안 벌려왔다.

동녕현성을 치자는데 대해서는 오의성과 채세영도 찬성하였다. 우리는 라자구에서 오의성,사충항, 채세영을 비롯한 구국군지휘관들과의 련합회의를 열고 이 전투와 관련된 구체적인 작전방침을 세운 다음 왕청본부에 또다시 편지를 써보냈다.

오의성과의 담판과 동녕현성전투의 성공으로 하여 동만의 유격부대들과 구국군부대들, 반만항일세력들속에서 우리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오의성과의 합작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통일전선을 강화하는것이야말로 전반적항일혁명을 추진시키는데서 계속 틀어쥐고나가야 할 생명선이며 중심고리라는것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였다.

그후 간도를 떠나 장백일대로 활동무대를 옮긴 다음에도 나는 오의성과의 합작을 성사시키던 나날들을 감회깊이 회고하였다. 그 당시 동북항일련군에 소속된 오의성은 무송지구에 활동거점을 잡고 우리의 익측에서 싸우고있었다. 그가 가까이에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공동투쟁의 나날에 맺어진 옛정이 다시 살아올랐다.

나는 100여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오의성부대의 밀영이 자리잡고있는 서강 동쪽수림으로 찾아갔다.

그때 오의성은 영채밖에까지 뛰여나와 나를 얼싸안았다. 우리는 10년이나 20년쯤 서로 떨어져있다가 만나는 죽마고우들처럼 뜨겁게 포옹하였다.

초연에 절은 오사령의 거슬거슬한 수염이 볼에 와닿는 순간 나는 어째서인지 목이 꽉 메는듯한 격정에 휩싸이였다. 군벌기질이 다분하고 자존심이 강한 이 중국사나이와의 상봉이 왜 그다지도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해주는지 알수 없었다. 싸움속에서 맺어진 정이란 참으로 류별난것이였다. 나는 오사령이 국적과 년령에 관계없이 나를 친형제와 같이 진심으로 환대해주는데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탄우속에서 맺어진 우정, 세상에 이 우정보다 더 진실하고 더 열렬하고 더 공고한 우정은 없을것이다. 우리가 가장 친근한 사람들끼리의 우정을 전투적우정이라고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가.

호랑이가죽우에 비스듬히 기대여앉아 매눈같이 예리한 눈길로 사람들의 인끔을 가늠하던 왕년의 도고하던 기상은 오의성의 모습에서 찾아볼수 없었다. 수천명의 부하들을 쥐락펴락하던 록림호걸이라기보다는 촌늙은이에 가까운 텁텁한 모습이였다. 살도 빠지고 눈정기도 약해진것 같았다.

나는 오의성의 밀영에서 이틀을 묵고 돌아왔다. 내가 떠날때 오사령은 부하 100명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내가 사양의 뜻을 표시하자 그는 짐짓 노하는체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김사령한테 무엇이 없거나 부족하겠소. 그렇지만 큰 싸움을 준비하는 김사령에게 나도 친구로서 무슨 도움을 줘야 할게 아니요. 그 100명은 내가 데리고 다니는것보다 김사령수하에 가야 합니다. 속담에 다북쑥도 삼밭에 가면 곧아진다고 하지 않았소.》

그후 나는 오의성을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그해말에 오사령이 부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쏘련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뒤로는 서로 련계가 끊어져 아무 소식도 들을수 없었다.

오의성은 우리가 공동전선의 위업을 개척할 때 잠간동안 필요했던 일시적인 동반자가 아니라 실전속에서 어깨겯고 포연탄우를 헤쳐온 잊지 못할 전우였다. 오사령이 후반생을 어떻게 보냈고 최후를 어떻게 마쳤는가 하는것은 지금까지도 미해명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어데서도 믿을만한 소식은 들을수 없다.

그가 마지막순간까지 애국애족의 리념에 충실했다면 나는 그것으로도 만족할뿐이다.

 

출처:우리 민족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