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8(2019)년 10월 28일 로동신문

 

우리 시대의 참된 애국자는 어떤 사람인가

최전연초소의 군인들을 위해 헌신의
길을 걸어온 김희련녀성에 대한 이야기

 

평양에서 천여리나 멀리 떨어진 곳에 최전연초소가 있다.

1950년대 조국방위자들의 영웅적위훈을 전하는 1211고지가 거연히 솟아있고 사연많은 태백산줄기와 매봉산줄기가 뻗어내린 이곳에서 우리 시대의 참된 애국자에 대한 감동깊은 이야기가 태여났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군대는 인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복무하며 인민들은 군대를 친혈육처럼 사랑하고 성심성의로 원호하여야 합니다.》

수도 평양에 정든 집을 남겨두고 최전연초소로 달려가 10여년세월 병사들을 위해 가장 진실하고 성실한 피와 땀을 바쳐온 나날에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은 곧 조국에 대한 최대의 사랑이라는것을 실천으로 보여준 김희련동무,

그는 이 땅의 평범한 녀인들중의 한사람이다.그러나 조국의 최전방을 지키는 군인들을 위한 길에서 인생의 가장 큰 보람과 영광을 찾는 그의 애국적인 삶은 그 순결성과 숭고성으로 하여 사람들의 심장을 무한히 격동시키고있다.

 

초소에 선 어머니

 

철령!

온 나라 인민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이 력사의 마루에서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금으로부터 11년전 7월 철령의 아아한 산발들을 적시는 여름날의 부슬비에 몸을 맡긴채 오래도록 서있는 한 녀성이 있었다.최전연부대에서 군사복무를 하다가 두해전에 희생된 맏아들과 절절한 마음속대화를 나누는 대성구역 고산동 7인민반에 사는 김희련동무였다.

(동철아, 위대한 장군님께서 아흔아홉굽이나 된다는 이 험한 령을 넘어 너의 부대를 찾아가시였겠구나.)

(그래요, 어머니! 그처럼 머나먼 길을 힘들게 오시여 우리들에게 크나큰 사랑을 안겨주시였습니다.)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위대한 장군님께서 최전연초소의 군인들에게 베풀어주신 뜨거운 육친적사랑을 잊지 못해한 아들이였다.

군사임무수행중 뜻하지 않은 일로 부상당한 아들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받고 다급히 부대의 병원을 찾아갔을 때 침상에 누워있는 아들의 얼굴은 뜻밖에도 밝았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전해 가을 부대를 찾으시였던 위대한 장군님께서 사랑의 소고기를 보내주시였다고, 푸짐한 소고기국이 식탁에 오른 날 군인들 누구나 장군님 사랑에 목이 메여 선뜻 수저를 들지 못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어머니, 위대한 장군님께서 인민군구분대들에서도 풀먹는집짐승을 많이 길러 고기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하시였는데 내가 다 나으면 염소기르기를 맡아 본때있게 해보려고 해요.》

천진스러운 아들의 목소리에 김희련동무는 억이 막혔다.이제 불과 19살인 아들은 자기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알려고도, 믿으려고도 하지 않는것이 아닌가.그 정상에 가슴이 찢겨와 흐르는 눈물을 가까스로 감추는데 다시 울리는 아들의 목소리…

《어머니, 한 3 000마리면 될가요? 그러면 위대한 장군님께서 더는 우리 걱정을 안하시고 부대에 찾아오시여도 산기슭에 흐르는 하얀 염소떼를 보시고 못내 기뻐하실게 아니나요.》

《뭐, 3 000마리나?》

김희련동무는 놀라운 눈길로 아들을 다시 보았다.그가 부른 염소마리수가 엄청나서가 아니였다.엄마품밖에 모르던 철부지를 조국보위초소로 떠나보내고 이것저것 잔근심도 많았는데 나라일을 걱정하고 수령의 마음을 헤아릴줄 아는 참된 군인으로 성장한것이 눈물겹도록 기쁘고 대견해서였다.

그후 아들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예로부터 부모를 잃으면 산에 묻지만 자식을 앞세우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끌날같은 아들을 잃은 그 아픔이야 오죽하랴.

그러나 김희련동무는 강잉히 눈물을 거두었다.부대의 산기슭에 하얀 염소떼가 흐르게 하여 위대한 장군님께 기쁨을 드리겠다던 아들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히 울려와서였다.

아들의 꿈, 그것은 결코 물불을 모르는 젊은 혈기의 즉흥이 아니였다.수령의 고마운 은덕을 가슴에 새긴 새 세대 병사가 간직한 충성의 꿈, 보답의 꿈이였으며 수령의 뜻을 실천으로 받들려는 참된 군인의 고결한 정신의 발현이였다.

(사랑하는 아들아, 부디 마음을 놓거라.너의 소중한 꿈을 이 어머니가 꼭 이루련다.네가 못다한 군사복무도 내가 마저 하련다.)

가슴에 넘치는 모진 슬픔을 남다른 결심으로 바꾼 김희련동무, 그는 희생된 한 병사의 어머니이기 전에 우리 당의 품속에서 자라난 참된 군인들의 고결한 정신과 소원을 그대로 넘겨받아 충성의 삶을 이어갈 굽힘없는 맹세를 다진 이 땅의 한 공민이였다.

당시 그의 남편은 한 인민군부대에서 초기복무사관으로 복무하고있었다.집에 돌아온 안해에게서 뜻밖의 결심을 들은 정준만동무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그도 늘 집을 나가 사는 몸이였던것이다.살림살이도 그리 풍족치 못한 형편에서 어미염소를 구하는데 필요한 자금은 또 어떻게 마련한단 말인가.

이윽하여 그들사이에 이런 말이 오갔다.

《여보, 둘째 금철이를 맏이가 섰던 부대에 보내면 되지 않겠소?》

《둘째도 물론 보내야지요.두 아들을 다 최전연초소에 세우자고 하지 않았나요.그런데 동철이가 갔으니… 그 빈자리는 어쩌겠나요.》

맏아들을 조국보위의 성스러운 싸움에서 잃고 둘째아들을 또 그 길에 세우는것만으로도 만사람의 찬양을 받을 일이다.하지만 김희련동무는 희생된 아들이 남긴 빈자리가 마음에 걸렸다.더우기 아들이 품었던 장한 꿈을 기어이 이루어주고싶었다.

그는 틈틈이 자금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터밭농사도 부지런히 짓고 이 일, 저 일 가림없이 찾아하였다.텔레비죤수상기를 비롯하여 소중히 여기던 집세간도 서슴없이 내놓았다.

그의 속마음을 알게 된 고산동의 녀맹일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원 세상에, 군인들에게 원호물자를 마련하여 보내준다는 말은 들었어도 부대에까지 가서 염소를 길러준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누만.그렇게 될수 있을가.》

생각끝에 김희련동무는 인민군대의 해당 부문 일군들을 찾아갔다.하지만 그들도 시원한 대답을 못하였다.쉽지 않은 결심이나 전례가 없는 일이였던것이다.

그러한 때 맏아들 정동철의 애국렬사증이 수여되였다.조국보위의 임무를 불과 몇해밖에 수행하지 못하고 희생된 애젊은 병사, 빛나는 위훈의 주인공도 아닌 아들에게 값높은 영생을 안겨준 당의 크나큰 은정은 김희련동무의 심장속에 타번지는 불길을 더욱 세차게 하여주었다.

둘째아들을 최전연초소로 떠나보낸 날 저녁 김희련동무는 꿈결에도 그리운 위대한 장군님을 우러러 삼가 편지를 썼다.

《…

위대한 장군님,

저는 장군님께서 제일 사랑하시는 병사들을 위해 맏아들이 섰던 부대로 떠나려고 합니다.

자식이 다하지 못한 군사복무를 마저 하면서 병사들의 친어머니가 되여 그들의 생활을 따뜻이 돌보아주겠습니다.그리고 희생된 아들의 뜻대로 염소 3 000마리를 길러 장군님께서 마음쓰시는 군인생활향상에 이바지하겠습니다.

…》

애오라지 위대한 장군님만을 믿고 운명도 미래도 그 품에 맡기고 사는 이 나라 인민의 지극한 충성심이 그의 소박한 편지의 구절구절에 어려있었다.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마음속진정을 담아 쓴 편지를 몸소 보아주시고 믿음과 사랑이 어린 친필을 새겨주시는 크나큰 영광을 안겨주시였다.

이렇듯 가슴뜨거운 사연을 안고 오른 철령이였다.김희련동무는 저 멀리 최전연의 하늘가밑에 잠든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동철아, 네가 섰던 초소에서 너의 꿈을 이루고싶어하는 이 어머니의 소원을 어버이장군님께서 풀어주시였단다.)

이 나라 방방곡곡에는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조국보위초소에 세운 어머니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그 훌륭한 어머니들앞에 희생된 아들을 대신하여 초소에 선 어머니 김희련녀성이 있다.

병사였던 아들의 꿈을 자기의 소중한 꿈으로 받아안고 위대한 장군님께서 바라시는 군인생활향상의 어렵고 보람찬 길에 용약 나선 이런 어머니는 조국보위, 원군을 충성과 애국의 제일가풍으로 삼는 우리 나라에서만 태여날수 있는것이다.

 

령장없는 군인의 선서

 

지난 10여년간 김희련동무는 최전연부대에서 령장없는 군인으로 살았다.

군사복무는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한 군사임무수행에 충실할것을 엄숙히 맹약하는 군인선서와 함께 시작된다.령장없는 군인인 김희련동무의 마음속선서는 최전연으로 떠나기에 앞서 위대한 장군님께 삼가 올린 편지의 구절구절이다.

그 맹세, 그 선서를 그는 어떻게 지켜왔는가.

우리와 만난 최전연부대 지휘관들은 10여년전 김희련동무에게서 받은 첫인상을 생생히 기억하고있었다.40대 후반기의 중년나이에 비해 퍽 젊어보이는 동실한 얼굴이며 금시 바람에 날려갈듯 작고 가냘픈 몸매…

그 모습은 조국의 최전방에서 강쇠처럼 단련된 지휘관들에게 믿음보다 동정과 우려를 더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장한 걸음을 내짚은 김희련동무와 동행한 대성구역과 고산동의 일군들도 앞뒤가 높고낮은 산으로 둘러막히고 인가도 별로 없는 깊은 산골에서의 험한 고생을 어떻게 이겨내겠는가고 걱정을 금치 못하였다.하지만 김희련동무는 흔연히 말했다.

《전연생활이 어찌 번화한 도시생활과 같겠나요.》

부대지휘관들과 토의하여 아들이 복무하던 구분대가 바라보이는 산기슭에 자리를 정한 그는 염소종자구입에 나섰다.가까운 몇해안에 염소 3 000마리를 키우려면 어미염소가 적어도 150마리는 되여야 한다고 생각한 그였다.

멀고 가까운 수많은 리들에 그의 발길이 닿았다.어느 리, 어느 작업반마을에 좋은 어미염소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100리길도 멀다 않고 달려갔다.

어느날 여러마리의 염소를 끌고 군의 읍지구를 지나던 그는 어디선가 풍겨오는 구수한 음식냄새에 정신이 아찔해졌다.신새벽에 떠나느라 아침을 건늰데다가 처음 다루는 염소들과 씨름질하며 먼길을 오다나니 점심때가 지나는것도 알지 못했던것이다.

무심결에 안주머니를 더듬던 그의 손길이 뚝 멎었다.

(아니, 이게 어떤것이라고…)

희생된 맏아들의 고결한 넋이 깃들고 남편과 온 가족의 심혈, 대성구역의 수많은 일군들과 주민들의 뜨거운 지성이 담긴 소중한 자금이였다.

어떻게 하나 더 많은 종자염소를 마련하리라고 강심을 먹은 그는 로상에서의 끼니를 산열매나 풀뿌리로 대신하였고 때로는 시내물로 시장기를 달래기도 하였다.

부대에 온지 60일이 지나서야 만단사연을 안은 150마리의 어미염소가 마련되였다.

하지만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였다.낮에는 방목을 하면서 염소우리를 지을 잡관목과 싸리를 베였으며 밤에는 산자를 엮고 진흙을 발라 벽체를 세웠다.그우에 새초이영까지 얹어놓으니 제법 염소우리맛이 났다.

그런 가운데 겨울은 하루하루 다가왔다.가뜩이나 바람세찬 곳에서 날씨가 나날이 추워졌지만 김희련동무는 방목시간을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어느날 밤새 눈이 내려 방목지로 가는 길에 한길이나 눈이 쌓였다.군인들이 달려와 오늘은 방목을 나갈것 같지 못하다고 하였지만 그는 염소떼를 이끌고 앞장에서 길을 내며 나아갔다.종일 허리치는 눈길을 헤치며 방목을 하느라고 녹초가 되여 저녁에 돌아왔는데 마당가에 난데없는 콩짚무지가 무둑무둑 쌓여있었다.부대지휘관들이 염소먹이로 쓰라고 구분대들에서 모아 보낸것이였다.

고맙고 반가왔다.그러나 다음순간 뇌리를 친것은 내가 여기에 와서 오히려 부대에 부담을 주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였다.군인생활에 도움을 주자고 왔지 도움을 바라서 온것은 아니지 않는가.염소마리수는 앞으로 더 늘어나겠는데 그때 가서는 어떻게 하겠는가.

깊은 생각끝에 부대의 후방일군을 만난 김희련동무는 다음해부터 주변산등성이의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지을 결심을 이야기하였다.그러자 일군은 난감한 기색을 지었다.

《여긴 토심이 얕아 농사가 안됩니다.한정보에 극상해야 강냉이 삼사백kg밖에 나지 않으니 고생만 하다 말겁니다.》

그날 밤 김희련동무는 우등불을 피워 땅을 녹인 후 여기저기 파보았다.삽날이 조금 박히는듯 하더니 이어 탕탕 튕겨났다.땅겉면에서 불과 5cm밑은 굳은 석비레판이였던것이다.

그는 눈판우에 풀썩 주저앉았다.안타까움으로 손맥이 스르르 풀리였다.

이때였다.캄캄한 어둠속에서 《어머니-》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야간훈련길에 오른 군인들이였다.달려와 안아일으키며 깊은 밤 산중에 왜 홀로 앉아있는가고 다정히 묻는 군인들, 어쩌면 꼭 자기 아들만 같은 그들을 바라보는 김희련동무의 눈굽이 젖어들었다.

(우리 장군님께서 친자식처럼 귀중히 여기시는 군인들을 위해 내 무엇을 아끼랴.)

그는 겨우내 진거름을 모아들이였다.이른새벽, 깊은 밤 구분대들을 찾아다니며 진거름을 날랐고 염소우리의 새초도 자주 갈아주어 두엄더미를 높이 쌓았다.

다음해 봄 목장주변의 산기슭에서는 쩡쩡 메질소리가 드높았다.김희련동무와 군인들이 석비레판을 까내는 소리였다.1㎡를 까내면 한달구지분의 돌과 석비레가 나오고 그만한 량의 거름이 들어갔다.

그렇게 한치한치 피땀을 바쳐 밭을 일구어가던 어느 봄날 함께 일하던 한 군인이 숨이 차서 달려왔다.첫 새끼염소가 태여난것이였다.

한달음에 달려간 김희련동무는 솜뭉치처럼 하얀 귀여운 새끼염소를 꼭 껴안았다.그러며 속삭였다.

(네 이름은 〈기쁨〉이란다.)

첫해에 낳은 수백마리의 새끼염소들에게 김희련동무는 모두 《기쁨》이란 이름을 달아주었다.자기 하나의 기쁨이 아니라 병사들의 기쁨, 우리 장군님의 기쁨이 되라는 진정을 담아.

많은 염소젖을 짜서 부대관하 구분대들에 공급하게 되였을 때의 기쁨은 또 얼마나 컸던가.

할 일이 너무 많아 손이 한 열개였으면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그럴수록 시간을 쪼개고 밤잠을 줄이였다.군인들은 그가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는지 알수 없었다.그에게는 명절날도 휴식일도 없었다.

《어머니, 힘들지 않습니까?》

늘 일손을 잡고 아글타글 뼈심을 바치는 그에게 군인들이 이렇게 물을 때면 그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야 어머니가 아닌가.》

길가에서 만난 군인들한테서 《어머니, 염소젖이 참 좋습니다.》라는 인사를 받을 때마다 쌓였던 피로가 순간에 풀리는 그였다.어느 구분대에 몸이 약한 군인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정성껏 키우던 집짐승으로 밤새워 곰을 해가지고 찾아가군 하였다.그래서 몸이 튼튼해진 병사가 훈련길에 다시 씩씩하게 나선것을 보면 그는 온몸에 기쁨과 힘이 샘솟군 하였다.

그러나 생명체를 다루는 일은 그리 쉬운것이 아니였다.애써 일군 밭에 강냉이며 감자도 심고 고기생산을 더 많이 하기 위해 돼지우리도 새로 지은 어느날 저녁 새끼염소들이 무리로 죽는 일이 벌어졌다.제살붙이처럼 품에 안고 다니며 정을 쏟은 염소들이 가느다란 숨결도 없이 누워있는것을 본 김희련동무는 가슴이 철렁하였다.눈앞이 캄캄했다.

며칠후 휑해진 염소우리를 답답한 마음으로 돌아본 그는 이웃농장의 축산작업반을 찾아갔다.깊은 밤 령길을 넘어다니며 그는 수의학공부를 하였다.사연을 전해들은 대성구역당 책임일군이 인편에 보내여온 염소기르기와 관련한 참고도서를 보풀이 일도록 읽고 또 읽었다.주사를 놓는 법도 배운 그는 염소들의 전염병예방에 필요한 주사약을 구해가지고 미리미리 놓아주었다.

정성이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염소마리수가 또다시 불어나기 시작했다.애써 일군 감자밭, 강냉이밭들의 작황도 마음을 흐뭇하게 하였다.

그가 새로 일군 밭에서 정보당 3t의 강냉이를 수확한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찾아왔다.서해벌방의 옥토처럼 부근부근한 흙을 쥐여보며, 그옆에 집채만큼 쌓아놓은 돌각담들을 보며 저마다 감탄을 금치 못해할 때 김희련동무는 땀으로 온몸을 적시며 방목길에 있었다.

그의 심장속에는 위대한 장군님께 다진 령장없는 군인의 선서, 조국방선초소의 어머니의 맹세가 뜨겁게 맥박치고있었다.

해마다 많은 량의 염소젖과 고기를 생산하여 군인생활에 이바지하고 튼튼한 새끼염소를 공급하여 구분대축산의 활성화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준 김희련동무,

그는 당과 수령께 다진 맹세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를 산모범으로 보여주었다.

사람들이여, 심장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나는 당과 수령앞에, 조국과 인민앞에 어떤 맹세를 지니고있으며 어떻게 실천하고있는가를,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한 아무런 맹세도 없이 사는것이 아닌지 혹은 밥먹듯 맹세만 다지고 또 그만큼 쉽게 저버리지 않았는지 다시금 심각하게 돌이켜보자.

 

또다시 쓴 편지

 

4년세월이 흘렀다.그 나날 김희련동무는 염소 3 075마리, 돼지 250마리에 해당한 고기와 근 100t에 달하는 염소젖을 생산하여 최전연부대 군인들의 생활에 적극 이바지하였다.

주체101(2012)년 8월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그의 소행자료를 보고받으시고 온 나라 군인가족들앞에 높이 내세워주시였다.

크나큰 영광을 받아안은 날 저녁 김희련동무는 아들의 묘소를 찾았다.기쁠 때나 힘들 때나 달려가 이야기를 나누고싶던 사랑하는 아들이였다.

《동철아, 네가 바라던 염소 3 000마리를 이 어머니는 기어이 해냈다.그런데 너무 늦었구나.어버이장군님께서 그렇게 일찌기 우리곁을 떠나실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니.》

염소방목을 하고 돌아오던 길에 뜻밖의 비보를 받은 피눈물의 12월의 일이 다시 떠올라 그는 오열을 터치였다.

하루빨리 부대관하 구분대들이 자리잡은 산기슭마다 염소떼 흐르게 하자고 한해에 두배씩 새끼낳이를 하게 하며 얼마나 아글타글 애썼던가.

조금만 더 하면 위대한 장군님께 결의다진대로 3 000마리를 하게 된다고 하루하루 심혈을 바쳐가고있었는데 청천벽력같은 비보를 받았으니 어찌 억장이 무너져내리지 않으랴.

《장군님, 제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쓰라린 죄책감에 평양의 하늘가를 우러러 피타게 몸부림친 그였다.

그런데 오늘 그 맹세를 기어이 실천하고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 기쁨을 드린것이였다.

그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부대지휘관들은 말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 다진 맹세를 지켰으니 이제는 남편과 정든 집이 있는 평양으로 올라가 행복한 살림을 하라고.

그때 왜서인지 대답이 선뜻 나가지 않았다.

아들의 묘를 어루쓸며 그는 말했다.

《동철아, 너와 약속한 염소 3 000마리는 길러냈다만 이 어머닌 아직 할 일을 다하지 못한것 같구나.여기 계속 남아서 군인들을 위해 더 많은 염소를 기르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서늘한 밤바람에 참나무며 잣나무들이 솨솨 설레였다.그속에서 울려오는듯싶은 아들의 정다운 목소리,

《어머니, 저도 찬성이예요.》…

주체102(2013)년 새해 아침, 온 나라 강산에 신년사를 하시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우렁우렁하신 음성이 울려퍼졌다.

그이의 첫 신년사를 받아안고 방방곡곡의 일군들과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끝없는 기쁨과 감격에 설레이던 그때 김희련동무도 울렁이는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있었다.

군력이자 국력이며 군력을 백방으로 강화하는 길에 강성국가도 있고 인민의 안녕과 행복도 있다고 하신 경애하는 원수님의 신년사를 받들어 올해에 군인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자신의 마음속결의를 위대한 장군님과 꼭같으신 원수님께 삼가 아뢰이고싶었던것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그는 펜을 들었다.

《꿈결에도 뵙고싶은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한몸에 안으시고 선군혁명령도의 멀고먼 험한 길을 이어가고계시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 머나먼 최전연에서 온 나라 어머니들의 충성의 한마음을 담아 새해의 설인사를 삼가 드립니다.…》

정녕 우리 원수님은 위대한 장군님 그대로이시였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이 나라의 평범한 녀인이 삼가 드린 편지에 《2013.2.13 김정은이라는 사랑의 친필을 새겨주시였다.

하늘같은 믿음과 사랑은 김희련동무에게 천백배의 힘을 안겨주었다.

산골생활의 고충도, 뜻밖의 화재로 애지중지 키우던 많은 염소를 잃은 가슴아픔도 그의 신념과 량심의 걸음을 멈출수 없었다.하루에도 백수십리씩 산발을 타느라 보름도 못 가서 신발이 해지면 그는 칡줄을 동이고서라도 방목길에 올랐고 염소우리가 불에 탔을 때에는 군인들과 힘을 합쳐 다시 번듯하게 지어놓았다.집짐승사양관리에 필요한 예방약들과 소금, 비료를 자체로 해결하고 새 축산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여 년간 종자집짐승리용률을 95%이상 보장할수 있게 하였다.그런가하면 매일 200L의 염소젖을 짜서 부대군의소와 구분대들에 보내주고 군인들과 군인가족들에게 염소사양관리경험도 하나하나 배워주어 《우리 어머니》, 《염소박사어머니》로 불리우는 김희련동무.

군인들을 위해 사랑과 정성을 다 바친 그의 10여년 나날에는 이런 일도 있다.

몇해전 그가 평양에서 열리는 조선인민군 제2차 군인가족열성자대회에 참가하게 되였을 때 부대지휘관들과 군인가족들은 제일처럼 기뻐하였다.

그가 돌아온 날 군인가족들은 그를 반갑게 얼싸안으며 무슨 훈장을 탔는가고 물었다.그들은 최전연군인들이 사랑하는 《염소박사어머니》가 의례히 큰 훈장을 탔을것이라고 생각한것이다.

그들에게 김희련동무가 말했다.

《난 정말 큰 표창을 받았어요.》

어서 그 표창을 보자고 졸라대는 군인가족들에게 그는 대회기간에 있은 일을 이야기하였다.

경애하는 원수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군인가족예술소조종합공연을 관람하게 된 대회참가자들의 기쁨은 끝이 없었다.그런데 공연이 끝나자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무대로 향하시는것이 아닌가.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자애로운 눈길로 둘러보시며 꼭 인사말을 전하고싶어 나왔다고 하시였어요.그러시면서 이 자리에 30t의 고기를 생산한 군인가족들도 있다는데 정말 헐치 않았을것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는것이 아니겠나요.그때 난 막 눈물이 나와서…》

김희련동무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울먹이였다.그가 바로 그해에 30t의 고기를 생산하여 군인들에게 보내주었던것이다.

흐르는 눈물을 닦고난 그는 말했다.

《우리 원수님께서 기뻐하신것이 얼마나 큰 표창이예요.난 그이상 더 바랄게 없어요.》

우리 장군님의 기쁨, 우리 원수님의 기쁨!

김희련동무는 애오라지 그 하나의 소원을 안고 10여년을 변심없이 원군의 길, 복무의 길을 걸어왔다.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고마운 당의 품속에서 자라난 그는 조국의 운명이자 자기의 삶이고 행복이라는 투철한 인생관을 간직하고있었다.

하기에 그는 몇해전 일촉즉발의 긴장한 정세가 조성되였을 때에만도 2t의 고기를 1211고지의 초병들에게 보내주었으며 지난 10여년간 염소 5 700여마리, 돼지 980여마리를 비롯한 많은 집짐승을 길러 210여t의 고기와 300여t의 염소젖을 생산하여 군인생활개선에 적극 이바지하였다.

최전연초소의 산기슭에 구름처럼 흐르는 하얀 염소떼와 집짐승이 가득한 축사를 보며 부대의 지휘관들과 군인들, 군인가족들은 한두해도 아니고 10여년세월 가정을 평양에 두고 녀성의 몸으로 외진 산중에서 희생된 아들의 소중한 꿈을 지켜 자기의 온넋을 깡그리 바쳐가고있는 김희련동무야말로 참된 애국자, 영웅이라고, 그의 강의한 모습은 이 나라 모든 어머니들이 따라배워야 할 거울이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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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련동무의 남편은 여러해전에, 둘째아들은 지난해에 제대되였다.

그는 군인가족도 인민군후방가족도 아니다.조선로동당원의 높은 영예도 지니지 못한 녀성이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소박한 가정부인에 불과한 그의 백옥같은 애국적량심을 깊이 헤아려주시였다.

원군사업에서 특출한 소행을 발휘한 그에게 은정어린 선물을 보내주시였으며 평범한 가정부인인 그를 원군미풍의 전형으로, 중앙사회주의애국공로자로 내세우고 온 나라 인민이 그의 고상한 정신세계를 따라배우도록 할데 대한 최상최대의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우리 시대의 참된 애국자는 어떤 사람인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순간순간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으로 심장의 박동이 높뛰는 사람, 당의 사상과 뜻을 받들어 변함없이 한길을 끝까지 가는 사람이다.

글 본사기자 허명숙
사진 본사기자 김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