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8(2019)년 12월 19일 로동신문
영원한 삶의 품, 행복의 요람을 마련해주시여
《우리의 사회주의조국은 우리 인민의 진정한 어머니품이며 참된 삶과 행복의 요람입니다.어머니조국의 품속에서 사람들의 참다운 삶이 시작되고 행복이 꽃펴나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60년전인 주체48(1959)년 12월 16일 새 생명의 고고성마냥 우렁찬 배고동소리를 울리며 재일동포들을 태운 첫 귀국선이 조국의 기슭에 닻을 내리였다. 세계가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민족의 대이동》, 《20세기의 인류사적기적》, 《사회주의의 승리를 다시한번 확증한 력사적사변》으로 격찬한 이 극적인 순간 감격과 흥분의 거세찬 열풍이 온 강산을 휩싸안았다. 마중나온 조국인민들도 울고 그립고그립던 조국땅에 돌아온 귀국동포들도 울었다.삼천리지맥의 남쪽에서는 해외로 팔려가는 동포들을 태운 현대판《노예상선》의 처량한 배고동소리가 구슬프게 울려퍼질 때 우리 공화국에서는 어머니품을 찾아오는 동포들과 그들을 맞이하는 혈육들의 감격의 환호성이 천지를 진감하였다.너무도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이 경이적인 현실은 정녕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동포애가 펼친 대서사시적화폭이였다.피눈물나는 세월 수난과 치욕의 대명사로 불리우면서 온갖 풍상고초속에 몸부림치던 재일동포들이 태양의 품에 안기여 재생의 광명을 받아안던 력사의 그날은 우리 조국청사에 빛나게 아로새겨져있다.
숭고한 덕망, 뜨거운 동포애의 결실
재일동포, 이들은 얼음판에 떨어진 씨앗과도 같이 차디찬 이역의 대지에 뿌려졌던 우리 민족사의 비참한 수난자들이였다. 1945년 일제패망당시 재일동포들의 수는 무려 240만명에 달하였다.그 절대다수가 일제의 총칼에 떠밀리워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이였다.조국이 해방되자 그들은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일본의 항구도시들로 물밀듯이 모여들었다.지난날의 죄과로 보나 인도주의적견지로 보나 일본당국은 그들의 귀국을 보장해주어야 하였으나 오히려 차겁게 외면하고 나중에는 악랄하게 방해하였다.《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으로 조국으로 가려던 수천명의 재일동포들을 수장시킨자들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하여 적지 않은 동포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쪽배로 귀국하다가 풍랑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그러던 주체36(1947)년 3월 5일 못내 반가와하시던 하지만 같은 시기 고향을 찾아 남조선으로 갔던 동포들중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리유는 오직 하나 외세가 주인행세를 하고 매국이 판을 치며 민주가 교살되는 그곳은 《고향이 아니라 타향》이고 《조국이 아니라 이국》이기때문이였다. 재일동포들의 마음은 나라를 빼앗겼을 때에는 민족이 흩어져살아도 어찌할수 없는 일이였지만 오늘 자기 나라가 있고 자기 주권이 있고 자기 당이 있는 이상 동포들이 해외에서 민족적멸시와 천대를 받고있는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수 없다.비록 한그릇의 죽을 나누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해외동포들을 하루빨리 조국으로 데려오자. 이러한 드팀없는 의지와 뜨거운 동포애의 정을 지니신 주체47(1958)년 8월 총련 가나가와현 가와사끼지부 나까도메분회 동포들의 《조국이야기모임》에서 지펴진 귀국운동의 불길은 삽시에 일본 전지역으로 확대되였다.총련중앙본부와 현본부, 지부, 분회들에 귀국대책위원회가 조직되고 일본당국을 대상으로 한 권리쟁취투쟁이 우리 동포들이 사는 모든 지역에서 벌어졌다. 당시 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은 재일조선인들의 귀국이 《자유세계의 일대 수치》라느니, 《공산주의를 강화시킨다.》느니 하면서 필사적으로 가로막았다. 재일동포들을 언제든지 조국에 받아들이며 귀국후 그들의 생활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보장해줄데 대한 외무상성명, 귀국에 필요한 모든 려비와 배를 공화국에서 보장할데 대한 조치, 일본정부가 귀국실현을 위하여 책임적인 조치를 취할것을 강경히 요구하는 공화국정부의 원칙적인 립장… 참으로 그 하나하나에는 재일동포들을 위하시는 《재일동포를 맞아들일데 대한 공화국정부의 동포애적조치의 구체적실례는 가는 곳마다에서 볼수 있었다.평양에는 6층아빠트를 건설하여 방을 비운채 재일동포가 들어오는 날을 기다리고있다.평양에서 멀지 않은 농업협동조합에서는 숙사와 직장들이 결정되여있다. 이것은 당시 우리 공화국을 방문하였던 한 외국인사의 목격담이다. 이역의 부두가에서 해외공민들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에로 집단적으로 이주한 사실은 력사의 그 어느 갈피에도 없다.더우기 재일동포들의 절대다수는 남조선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였다.하지만 그들은 주체의 태양이 찬연히 빛나는 사회주의조국에로의 귀국의 길을 서슴없이 택하였다.그것은 진정한 조국의 참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의 신념과 량심의 선택이였다.재일동포들의 귀국은 조선인민의 참다운 조국은 민족의
《이제는 우리모두 함께 살아갑시다》
백두산절세위인들께서는 조국에 돌아온 10만여명 동포들의 친아버지, 친어머니가 되시여 그들모두가 나라의 어엿한 주인으로서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삶을 마음껏 누려나가도록 크나큰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민족배타주의가 살판치는 불모의 땅 일본에서 재능이 있어도 꽃피울수 없었던 수많은 동포들이 이국살이의 천대속에 얼어들었던 가슴을 녹이며 풍요한 어머니대지에 삶의 뿌리를 내리였다. 꽃다발이야 먼길을 오느라고 수고한 여러분이 받아야지 내가 받아서야 되겠습니까.…울지 마시오.이렇게 조국으로 돌아왔는데 이 기쁜 날에 왜 울겠습니까.조국에 돌아왔으니 이제는 되였습니다.이제는 우리모두 함께 살아갑시다. 한없이 뜨거운 어버이의 정이 귀국동포들의 가슴마다에 젖줄기마냥 나날이 흘러들었다. 찬장과 이불장에 가득찬 그릇과 이불이며 가마에서 뿜어져나오는 후더운 김발… 이 집이 정말 내 집이 옳은가.방금전까지도 단란한 한 가족이 살고있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늑하고 아담한 살림집에 들어서며 귀국동포들 누구나 격정을 금치 못하였다.권세와 돈밖에 모르는 자본주의세상과 너무도 판이한 조국의 현실, 실업과 빈궁을 모르고 착취가 없으며 누구나 화목하게 사는 이 인민의 나라가 바로 내 안겨살 조국의 품이라는 생각으로. 이토록 재일동포들에게 참다운 삶의 길을 열어주시고도 주체53(1964)년 12월 5일 꿈만 같은 소식을 듣고 맨발로 뛰여와 품에 안기며 눈물흘리는 청년들을 대견한 눈길로 둘러보시던 그이께서는 아무 근심걱정없이 생활한다는 대답을 들으시고 아무래도 친부모슬하만 못할것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이르시였다. 무엇이나 곤난한것이 있으면 내게 편지를 하거라.아버지, 어머니에게 하지 말고… 너희들은 당의 품속에서 자라는 아들딸들인데 해결받아야 할 일이 생기면 어려워말고 내게 편지를 써보내라구.… 그 사랑의 말씀에 모두가 목이 메여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만경봉》호에도 가슴뜨거운 이야기가 깃들어있다. 우리자체의 힘으로 현대적인 귀국선을 무을데 대한 과업을 주신 그후 완성된 배의 외형과 내부구조를 찍은 사진들을 보아주시던 재일동포들의 뜻깊은 귀국의 력사에는 조국의 품에 안긴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신 그이의 믿음과 은정은 또 그 얼마나 뜨거웠던가. 주체77(1988)년 8월 어느날 무산광산련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시던 이역땅 철도역의 재무지속에서 타다남은 콕스덩이들을 주어모아 생계에 보태야 하였던 불행한 사람도 또 언제인가는 한 평범한 건축가가 걸어온 애국의 자취를 더듬으시며 《당에 충실한 동무》, 《생의 흔적을 남기고 간 사람》이라고 추억하시였다. 자본주의일본땅에서 민족적멸시와 천대만을 받아온 자기들을 귀중한 혁명동지로, 한집안식솔로 극진히 아끼고 내세워주시는 재일동포들의 귀국실현과 조국래왕으로 그들에게 보람찬 삶의 활무대를 펼쳐주시고 총련애국위업을 힘있게 추동하는 원동력을 마련해주신것은 그리고 대를 두고 길이길이 노래할것이다.은혜로운 태양의 빛발 넘치는 영원한 삶의 품, 행복의 요람을. 본사기자 허영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