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1월 7일 로동신문

 

일본이 과거에 감행한 날강도적인
조선문화재파괴와 략탈범죄(10)

극악무도한 도자기략탈만행

 

일제가 우리 나라에서 략탈해간 문화재들가운데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것의 하나가 바로 여러 시대에 만들어진 각종 도자기이다.

일제는 도자기략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그가운데서 가장 악랄하고 날강도적인것은 우리 선조들이 제일 공경해온 조상의 무덤을 백주에 도굴하여 부장품으로 묻힌 도자기들을 략탈한것이다.

광란적으로 감행된 일제의 도굴략탈만행으로 고려시기의 옛무덤들은 완전히 파헤쳐져 페허로 변하였다.이 과정에 략탈당한 고려자기들은 수십, 수백만점을 헤아렸다.

한 일본인은 《고려도자의 연구》에서 《고려자기, 이것들은 어느것이나 도굴에 의하여 고려시대의 옛무덤에서 드러난것이다.때로는 가마터의 출토품도 있으나 전세품은 거의 없다고 할수 있다.》라고 폭로하였다.

일제시기 고려자기에 대하여 언급한 도서들은 어느것이나 할것없이 고려자기들이 모두 도굴품이라는것을 실토하였다.

고려자기의 최대략탈자는 조선통감이나 조선총독을 비롯한 우두머리들이였다.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는 우리 나라의 도자기를 대대적으로 긁어모아 일본으로 빼돌린 략탈자, 도적무리의 괴수였다.

이에 대하여 《도자여적》의 필자는 《…최초의 골동품수집열은 이또 히로부미가 이것저것 막 긁어가기 시작한 때부터 시작되였다고 보아야 한다.》고 함으로써 이또 히로부미가 다름아닌 고려자기의 최대략탈자라는것을 폭로하였다.

이또는 숱한 고려자기들을 일본으로 반출하였는데 그중 103점의 우수한 명품을 왜왕에게 바쳤다.또한 고려자기들을 《선물》로 대관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그 광경에 대하여 《도자여적》에는 《한번은 이또가 전례대로 고려청자를 한짐 싣고 도꾜역에 도착했다고 한다.역홈에 마중나온 사람들에게 이또가 내려오면서 〈자네들에게 주려고 고려청자를 선물로 가져왔으니 기차에 올라가 꺼내가지라.〉고 했다 한다.그러자 모두들 앞을 다투어 기차에 뛰여올라 깨진 청자병이며 사발 등을 서로 먼저 가지려고 법석을 떨었다고 했다.》고 씌여져있다.

이또가 고려자기략탈에 피눈이 되여 날뛴것은 그가 동방예술의 최고를 이루는 고려자기의 예술적가치나 고고학적가치를 잘 알아서가 아니라 조선의 우수한 민족문화를 파괴략탈하여 조선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말살하려는 체질적인 강도적본성과 식민지의 최고권력자, 조선침략의 원흉으로서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비렬한 목적으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초대조선총독이였던 데라우찌도 이또에게 짝지지 않게 고려자기략탈에 열을 올리였다.

이자는 고향에 《조선관》을 설립하고 우리 나라에서 략탈해간 수천점에 달하는 문화재를 소장하였는데 그중에는 고려시기 무덤들에서 도굴한 고려자기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여있었다.

꼭뒤에 부은 물이 발뒤꿈치로 흐른다고 침략과 략탈의 원흉들의 본을 따서 형형색색의 인간쓰레기들이 우리 나라에 기여들어와 앞을 다투어 도자기략탈에 광분하였다.

어떤자는 박물관설립과 유물구입의 미명하에 도자기를 략탈하여서는 경매를 통해 공개적으로 매도하였으며 어떤자는 도굴품을 가지고 뻐젓이 전람회를 여는 파렴치한짓도 벌리였다.

어느 한 미술구락부의 사장으로 있던 일본인 사사끼의 말에 의하면 경매회는 밤에만 열렸으며 그때 개성출토품이라고 하는 고려자기가 버들고리짝에 담겨진채로 내놓였는데 모두가 흙이 더덕더덕 묻은것이였다.

이것은 일본강도배들이 경쟁적으로 고려시기 무덤들을 도굴하였으며 고려자기들을 손에 쥐자마자 즉시 경매장에 내놓았다는것을 보여준다.

일확천금을 꿈꾼 일본간상배들은 골동가게까지 차려놓고 공공연히 매매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자기들에도 눈독을 들인 략탈자들은 날강도적인 방법으로 민가들까지 샅샅이 뒤져서는 밥그릇이나 접시 할것없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것은 닥치는대로 강탈해갔다.

하기에 일본인 가또는 조선인의 부엌이나 헛간의 구석구석에 있는것까지 모두 없어졌으며 평양부근의 민가에는 기름병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없어져버리고말았다고 증언하였다.

정녕 일제의 도자기략탈만행은 그 방법에서나 수탈량에 있어서 세계에서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극악무도한것이다.

본사기자 정원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