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4월 14일 로동신문

 

우리 수령님의 못 잊을 새벽길

 

아직은 삼라만상이 고요속에 잠든 이른새벽이다.4월의 봄하늘가에 동이 트기 시작한다.밤을 모르고 창조의 동음 높이 울리는 평양종합병원건설장의 불야경이 어둠을 밀어내는 노을빛의 색조를 더해준다.

조국의 평범한 하루의 새벽시간인것이다.뜻깊은 태양절을 앞둔 이즈음에는 누구나 례사롭게 이 새벽을 맞지 않는다.

우리 수령님께서 금수산태양궁전의 정원길을 거니시며 조국의 미래를 설계하고계시는듯, 그이께서 정면돌파전의 새 기적이 창조되는 전투장들에 문득 찾아오실것만 같고 인민들이 어떻게 생활하는가를 보시려 어느 평범한 살림집의 출입문을 두드리시지는 않을가.…

어버이수령님께서 사랑하는 인민을 가슴에 안으시고 조용히 이 새벽길을 걸으시는것만 같다.

인민들속으로…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김일성동지의 한생은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고 사상과 령도에 구현하여 현실로 꽃피우신 인민적수령의 숭고한 한생이였다.》

자애로운 친어버이심정으로 끝없는 요구를 내세우시며 동트기 전의 거리와 출근길도 돌아보시고 문열기 전의 상점에도 들려보시며 인민의 행복을 위해 남먼저 새벽길을 걸으시던 우리 수령님,

어버이수령님의 그 새벽길은 인민들의 평범한 생활의 깊은 곳, 구석진 곳을 다 헤아리시며 그들의 불편과 애로, 생활의 절박한 요구들 지어 사람들이 스치고지나는 사소한 문제까지도 푸시기 위해 사색을 무르익히시던 한없는 사랑의 길이였다.

 

언제나 백두산시절처럼

 

어느해인가 한 일군이 위대한 수령님께 새벽만이라도 편히 쉬셨으면 하는 소망을 말씀드린적이 있었다.

그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백두산시절에 대하여 이야기하시다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것은 오랜 생활과정에 굳어진 습관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결국 생활은 나에게 아침에 편안히 누워있을것을 허락하지 않았소.그렇게 되여 굳어진 습관이요.》

백두산시절부터 굳어진 습관, 세월의 흐름속에 일생을 두고 굳히신 우리 수령님의 새벽일과이다.

세월의 흐름은 낮과 밤으로 이어지고 하루는 새벽으로 시작된다.새벽은 긴긴밤의 어둠을 려명으로 불태우며 대지에 태양의 빛발을 안아온다.

우리 수령님께서는 인민들에게 환희롭고 행복한 생활을 안겨주시려 늘 백두산시절의 습관으로 이 나라의 첫새벽을 남먼저 맞이하군 하시였다.

혁명의 목적도 본질도 인민의 행복을 꽃피우는데 두시였기에 공장과 농촌, 어촌과 림산마을 등 이 땅의 끝에서 끝까지 다 걷고걸으시며 인민을 돌보신 우리 수령님의 하많은 새벽길을 어찌 다 헤아릴수 있으랴.

주체47(1958)년 3월초의 어느날 이른새벽이였다.

동평양지구를 돌아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동강웃쪽 사람들이 불편하게 대동강다리로 에돌아 출근하는것을 보시며 깊은 생각에 잠기시였다.

이날 동평양지구에서 돌아오시자 곧 건설부문의 한 일군을 부르신 그이께서는 더 미룰수 없는 문제가 있어서 불렀다고 하시며 평양시건설계획에 제2대동교(오늘의 옥류교)를 언제부터 건설하기로 되여있는가고 물으시였다.일군은 자금사정으로 5개년계획기간에는 시작하지 못하고 1961년부터 건설에 착수하기로 되여있다고 말씀드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시여 방안을 거니시더니 우수, 경칩에 대동강의 얼음은 풀리고있는데 인민들의 소원은 풀리지 못하고있다고 혼자말씀처럼 뇌이시는것이였다.

그러시더니 아무래도 우리가 힘겨웁지만 제2대동교건설을 앞당겨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제2대동교건설을 5개년계획이 끝난 다음에 시작할것이 아니라 5개년계획기간안에 끝냅시다, 그래서 인민들의 소원을 빨리 풀어줍시다, 혁명도 건설도 인민을 위해서 하는것이요라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이른새벽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을 데리고 배에 오르시여 새벽바람에 옷자락을 날리시며 새로 건설할 다리의 위치를 현지에서 잡아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대동강에는 옥류교라는 행복의 다리가 건설되게 되였다.

어찌 그뿐이랴.오늘 인민들의 교통에 편리하게 생겨난 무궤도전차나 뻐스정류소도 어버이수령님께서 이른새벽 거리를 돌아보시다가 뻐스줄에 서있는 사람들을 보시고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신 그 로고속에 마련된것이다.

우리 수령님의 백두산시절의 습관은 일군들이 현실에서 수없이 목격하면서도 스쳐보낸 사소한 문제도 제때에 포착하여 바로잡혀지게 하였고 당의 로선과 정책에 반영되여 인민들의 생활에 더없이 가치있는것으로 보탬이 되게 해주었다.

어느 봄날 수도의 새벽길을 걸으시며 거리들을 돌아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성한 버드나무들 사이사이에 새로 심은 어린 나무들에서 눈길을 멈추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가슴이 아프신듯 버드나무들을 이윽히 바라보시다가 인민들의 의사를 받아들이시여 평양시의 거리들과 공원, 유원지들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도록 하신 사연에 대하여 일군들에게 들려주시면서 버드나무가 관리하기 좀 힘들고 가로수로서 적당하지 않다 하더라도 인민들이 원하여 심은 나무이니 찍어서는 안되오, 인민들이 원하고 인민들이 좋다고 하면 다 좋은것이요라고 간곡히 교시하시였다.

참으로 어버이수령님의 새벽길의 이야기는 인민을 떠난것이란 하나도 없었다.

우리 수령님께서 전화의 나날 이른새벽 원화리의 한 농가마당가에서 집주인을 깨우려는 일군에게 단잠을 자는 사람을 깨우면 얼마나 곤해하겠는가, 이제 얼마후이면 날이 밝겠으니 주인이 일어날 때까지 우리는 마당에 앉아 쉬자고 하시며 짚단우에 스스럼없이 앉으시여 오랜 시간을 보내신 그 길에서 협동화의 새싹이 움터났다.례년에 없이 눈이 많이 내렸던 1970년대 초엽의 어느 새벽에는 아이들과 녀성들이 눈길을 불편하게 걷는 모습을 스쳐보내지 않으시고 일군들을 부르시여 겨울신의 목을 높여 옆으로 채우게 하고 모달리를 대주면 발도 시리지 않고 보기도 좋을것이라고 이르시였고 어느해 이른새벽에는 현지지도의 길에서 로인들의 편의를 두고 걱정하시며 비탈진 산밑에 살림집들을 규모있게 줄지어 문화적으로 건설하여 늙은 부모들을 모시고있는 가족들에게 줄데 대해 일깨워주신 우리 수령님이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백두산시절의 습관으로 한평생을 새벽시간에 사시며 인민의 행복을 꽃피워주시였다.

 

인민들의 마음의 문을 여시려

 

인민들이 어떻게 생활하며 무엇을 생각할것인가.그들에게 어떤것을 더 해주어 누리는 행복을 크게 해줄것인가.사소하게나마 생활에서 불편을 느끼는 점은 없으며 괴로와하지는 않는지.…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 모든것을 아시려고 남먼저 나라의 새벽문을 열군 하시였다.

전후 평양시에 새로운 살림집들이 건설되여 새집들이소식이 련일 전해지고있던 어느날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이른새벽 오래도록 정원길을 거닐고계시였다.당의 요구대로 살림집을 건설하지 못하다보니 새 거리로 이사한 사람들이 추워하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 그이께서 온밤 잠 못 이루시다가 차거운 새벽이슬을 맞으시며 답답한 가슴을 식히시는것이였다.그러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을 부르시여 가봅시다, 사람들이 일터로 나가기 전에 가봅시다라고 하시며 걸음을 옮기시였다.

가로수의 잎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듯 한 정적, 불빛을 거의 찾아볼수 없는 집집의 창문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금방 불이 켜진 한 집에 이르시여 마침 밖으로 나오는 주인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네시였다.

이른새벽에 찾아오신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을 알아본 그 녀성은 너무도 뜻밖이여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부엌을 보시고 방안에 들어서신 그이께서는 온기가 알리지 않는 벽난로에 손을 대보시면서 방이 춥지 않은가고 물으시였다.집주인이 망설이다가 춥지 않다고 대답올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고개를 가로저으시며 안색을 흐리시더니 왜 춥지 않겠습니까, 벽난로가 이렇게 찬데, 본래 벽난로는 조선사람의 생활에 맞지 않습니다라고 걱정하시였다.

사실 전쟁의 피해로 몇년째 토굴이나 반토굴, 림시주택에서 살다가 처음 아빠트생활을 시작한 주민들은 새 집에서 살게 되였다는 기쁨에 젖어있던 나머지 가을의 선기쯤이야 하고 여기고있었던것이다.

인민들을 위하여 전후의 어려운 조건에서 살림집부터 지어주게 하시고도 집이 좀 추운것이 못내 가슴에 맺히시여 온밤 잠들지 못하시고 이른새벽에 몸소 살림집을 찾아주시였고 인민들이 쓰고살 집을 어떻게 하면 쓸모있고 아담하게 지을것인가를 세세히 깨우쳐주신 어버이수령님,

정녕 이른새벽 인민의 생활이 깃을 편 구석구석을 돌아보시는것은 그이께 있어서 소중한 습관이였고 변함없는 일과였다.

주체51(1962)년 1월초의 어느날, 아직 수도의 거리들이 잠에서 깨여나지 않은 이른새벽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한 책임일군의 집에 전화를 걸어주시였다.

그 일군이 너무도 뜻밖의 일에 미처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있는데 어버이수령님께서 먼저 밤새 편히 쉬였는가고 하시더니 지금 나가면 아침두부 앗는것을 볼수 있는가고 물으시는것이였다.

일군은 가까운 두부공장들을 생각하다가 외성두부공장(당시)에 가시면 보실수 있다고 말씀올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럼 거기 가보겠다고 하시더니 송수화기를 놓으시였다.

창밖에는 대소한의 찬바람이 울부짖고있었다.

일군은 울렁이는 마음을 안고 급히 두부공장으로 나갔다.그가 공장안에 들어서니 위대한 수령님께서 벌써 뽀얗게 김이 서린 두부가마앞에서 밤교대작업을 한 녀성종업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계시였다.

녀성종업원들은 너무도 꿈같은 현실에 자신들을 억제하지 못하며 감격에 흐느끼고있었다.별로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두부공장에 그것도 아침밥을 지을 가정주부들도 아직은 잠을 깨지 않은 그런 시각에 우리 수령님께서 찾아오시였으니 차마 믿기 어려웠던것이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큼직한 두부모가 담긴 접시를 드시고 한 아주머니에게 수저를 청하시여 몸소 두부맛을 보아주시고 두부가 잘되였다고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해주시였다.

인민들이 아직도 단잠에 들어있는 이른새벽에 엄동설한을 무릅쓰시고 일부러 공장에까지 나오시여 인민들의 밥상에 오를 두부맛을 보아주신 그 뜨거운 사랑을 과연 무엇에 비길수 있으랴.

이런분이시기에 우리 수령님께서는 갈매기도 채 잠을 깨지 않은 어느 이른새벽에는 서해의 이름없는 포구를 찾으시여 고기비늘이 묻은 어로공들의 비옷까지 몸소 입어보시며 그들의 생활을 친어버이심정으로 보살펴주시였고 또 언제인가는 30여명의 가족을 원쑤놈들에게 학살당한 한 관리위원장과 온밤 마음속아픔을 함께 나누시고 찬이슬내리는 새벽녘에는 험한 진펄과 산길을 헤치시면서 농장이 잘살 길을 환히 밝혀주기도 하시였다.

인민들의 생활상불편을 없애주시려고 소문없이 이어가신 그 새벽길들은 진정 인민을 찾아가시는 우리 수령님의 출근길이였다.

하루, 한해가 아니라 한평생 이어가신 그 길에서 우리 수령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업하는 일군들마저 모르고있은 감격적인 사실은 얼마나 많았을것인가.

 

마을이름 새벽이라 지었습니다

 

수령님이 다녀가신 그 새벽 못 잊어

마을이름 새벽이라 다시 지었네

어버이수령님 높으신 그 은혜

마을과 더불어 길이 전해가리

 

우리 인민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지는 가요 《수령님 뵈옵던 잊지 못할 그 새벽이여》의 한개 절이다.

실안개도 고요히 감도는 새벽 마을에 찾아오신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감동깊은 이야기를 전하는 가슴뜨거운 사연들이 그 얼마인가.

어버이수령님께서 언제인가 평안북도를 현지지도하실 때였다.

어느 한 기계공장을 찾으시기에 앞서 이른새벽 로동자들의 사택마을부터 찾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평범한 한 로동자의 집에 들리시여 어느 직장에 다니는가, 식구는 몇이며 생활에 부족한것은 없는가를 일일이 알아보시였다.그러시고는 집주위에는 과일나무를 심고 길옆에는 뽀뿌라와 아카시아를 심는것이 좋겠다고 하시며 친히 나무심을 자리까지 잡아주시였다.

그후 이곳 마을사람들은 우리 수령님의 따뜻한 보살피심과 자애로운 사랑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하여 마을이름을 《새벽마을》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새벽마을》, 세상에 마을이름이 많고많아도 인민을 위한 사랑의 새벽길을 걸으시는 자애로운 어버이, 위대한 수령의 거룩한 업적을 전하기 위해 생겨난 이런 사연깊은 마을이름이 언제 또 있었던가.

한평생 포전길을 걸으시며 남먼저 새벽이슬을 맞으시던 어버이수령님의 그 헌신의 자욱과 더불어 이 땅 그 어디에나 《새벽마을》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새겨지게 되였다.

주체43(1954)년 4월 15일, 조국해방전쟁이 끝난 후 처음으로 맞으시는 탄생일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른새벽 중화군 삼정리(당시)에 대한 현지지도의 길을 떠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포전에 나오셨다는것을 알게 된 리의 일군들은 탄생일까지도 새벽길을 걸으시며 인민의 행복을 가꾸시는 그이를 우러르며 뜨거운것을 삼키였다.

우리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한평생 새벽길을 걸으시였다.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에도 이른새벽 연백벌을 찾으시여 탐스러운 벼이삭들의 설레임소리에서 인민의 행복넘친 웃음소리를 들으시는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던 어버이수령님이시였다.

인민을 위해 바치신 심혈의 무한한 세계를 말해주고 인민을 위한 헌신적복무란 어떤것인가를 심장깊이 새겨주는 위대한 수령님의 새벽길!

우리 수령님께 있어서 그 새벽시간은 인민을 위한 길에서 크나큰 기쁨을 느끼시는 행복의 시간이였다.

그래서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리도 새벽시간을 귀중히 여기시고 날마다 더더욱 앞당겨 맞이하시였으며 끊임없는 새벽길을 걸으신것 아니던가.

어버이수령님께서 한평생 걷고걸으신 새벽길들이 있어 이 땅우에는 행복의 새 아침을 부르는 붉은 노을이 그리도 아름답게 피여오른것이리라.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어버이수령님의 그 모습으로 인민의 행복을 꽃피우는 새벽길을 련련히 이어가시기에 수령님의 사랑의 력사는 끝없이 흐르고 천하제일강국의 아침노을은 찬연히 밝아올것이다.

글 본사기자 김준혁
사진 본사기자 리경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