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4월 14일 로동신문
우리
아직은 삼라만상이 고요속에 잠든 이른새벽이다.4월의 봄하늘가에 동이 트기 시작한다.밤을 모르고 창조의 동음 높이 울리는 평양종합병원건설장의 불야경이 어둠을 밀어내는 노을빛의 색조를 더해준다. 조국의 평범한 하루의 새벽시간인것이다.뜻깊은 태양절을 앞둔 이즈음에는 누구나 례사롭게 이 새벽을 맞지 않는다.
우리
인민들속으로…
자애로운 친어버이심정으로 끝없는 요구를 내세우시며 동트기 전의 거리와 출근길도 돌아보시고 문열기 전의 상점에도 들려보시며 인민의 행복을 위해 남먼저 새벽길을 걸으시던 우리
언제나 백두산시절처럼
어느해인가 한 일군이
그때
《결국 생활은 나에게 아침에 편안히 누워있을것을 허락하지 않았소.그렇게 되여 굳어진 습관이요.》
백두산시절부터 굳어진 습관, 세월의 흐름속에 일생을 두고 굳히신 우리
세월의 흐름은 낮과 밤으로 이어지고 하루는 새벽으로 시작된다.새벽은 긴긴밤의 어둠을 려명으로 불태우며 대지에 태양의 빛발을 안아온다.
우리
혁명의 목적도 본질도 인민의 행복을 꽃피우는데 두시였기에 공장과 농촌, 어촌과 림산마을 등 이 땅의 끝에서 끝까지 다 걷고걸으시며 인민을 돌보신 우리
주체47(1958)년 3월초의 어느날 이른새벽이였다.
동평양지구를 돌아보시던
이날 동평양지구에서 돌아오시자 곧 건설부문의 한 일군을 부르신 그이께서는 더 미룰수 없는 문제가 있어서 불렀다고 하시며 평양시건설계획에 제2대동교(오늘의 옥류교)를 언제부터 건설하기로 되여있는가고 물으시였다.일군은 자금사정으로 5개년계획기간에는 시작하지 못하고 1961년부터 건설에 착수하기로 되여있다고 말씀드리였다.
그러시더니 아무래도 우리가 힘겨웁지만 제2대동교건설을 앞당겨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제2대동교건설을 5개년계획이 끝난 다음에 시작할것이 아니라 5개년계획기간안에 끝냅시다, 그래서 인민들의 소원을 빨리 풀어줍시다, 혁명도 건설도 인민을 위해서 하는것이요라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이른새벽
이렇게 되여 대동강에는 옥류교라는 행복의 다리가 건설되게 되였다.
어찌 그뿐이랴.오늘 인민들의 교통에 편리하게 생겨난 무궤도전차나 뻐스정류소도
우리
어느 봄날 수도의 새벽길을 걸으시며 거리들을 돌아보시던
참으로
우리
인민들의 마음의 문을 여시려
인민들이 어떻게 생활하며 무엇을 생각할것인가.그들에게 어떤것을 더 해주어 누리는 행복을 크게 해줄것인가.사소하게나마 생활에서 불편을 느끼는 점은 없으며 괴로와하지는 않는지.…
전후 평양시에 새로운 살림집들이 건설되여 새집들이소식이 련일 전해지고있던 어느날이였다.
가로수의 잎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듯 한 정적, 불빛을 거의 찾아볼수 없는 집집의 창문들…
이른새벽에 찾아오신
부엌을 보시고 방안에 들어서신 그이께서는 온기가 알리지 않는 벽난로에 손을 대보시면서 방이 춥지 않은가고 물으시였다.집주인이 망설이다가 춥지 않다고 대답올리였다.
사실 전쟁의 피해로 몇년째 토굴이나 반토굴, 림시주택에서 살다가 처음 아빠트생활을 시작한 주민들은 새 집에서 살게 되였다는 기쁨에 젖어있던 나머지 가을의 선기쯤이야 하고 여기고있었던것이다.
인민들을 위하여 전후의 어려운 조건에서 살림집부터 지어주게 하시고도 집이 좀 추운것이 못내 가슴에 맺히시여 온밤 잠들지 못하시고 이른새벽에 몸소 살림집을 찾아주시였고 인민들이 쓰고살 집을 어떻게 하면 쓸모있고 아담하게 지을것인가를 세세히 깨우쳐주신
정녕 이른새벽 인민의 생활이 깃을 편 구석구석을 돌아보시는것은 그이께 있어서 소중한 습관이였고 변함없는 일과였다. 주체51(1962)년 1월초의 어느날, 아직 수도의 거리들이 잠에서 깨여나지 않은 이른새벽이였다.
그 일군이 너무도 뜻밖의 일에 미처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있는데
일군은 가까운 두부공장들을 생각하다가 외성두부공장(당시)에 가시면 보실수 있다고 말씀올리였다.
창밖에는 대소한의 찬바람이 울부짖고있었다.
일군은 울렁이는 마음을 안고 급히 두부공장으로 나갔다.그가 공장안에 들어서니
녀성종업원들은 너무도 꿈같은 현실에 자신들을 억제하지 못하며 감격에 흐느끼고있었다.별로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두부공장에 그것도 아침밥을 지을 가정주부들도 아직은 잠을 깨지 않은 그런 시각에 우리
인민들이 아직도 단잠에 들어있는 이른새벽에 엄동설한을 무릅쓰시고 일부러 공장에까지 나오시여 인민들의 밥상에 오를 두부맛을 보아주신 그 뜨거운 사랑을 과연 무엇에 비길수 있으랴.
이런분이시기에 우리
인민들의 생활상불편을 없애주시려고 소문없이 이어가신 그 새벽길들은 진정 인민을 찾아가시는 우리
하루, 한해가 아니라 한평생 이어가신 그 길에서 우리
마을이름 새벽이라 지었습니다
…
마을이름 새벽이라 다시 지었네
마을과 더불어 길이 전해가리
우리 인민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지는 가요
실안개도 고요히 감도는 새벽 마을에 찾아오신
어느 한 기계공장을 찾으시기에 앞서 이른새벽 로동자들의 사택마을부터 찾으신
그후 이곳 마을사람들은 우리
《새벽마을》, 세상에 마을이름이 많고많아도 인민을 위한 사랑의 새벽길을 걸으시는 자애로운 어버이,
한평생 포전길을 걸으시며 남먼저 새벽이슬을 맞으시던
주체43(1954)년 4월 15일, 조국해방전쟁이 끝난 후 처음으로 맞으시는 탄생일에도
우리
인민을 위해 바치신 심혈의 무한한 세계를 말해주고 인민을 위한 헌신적복무란 어떤것인가를 심장깊이 새겨주는
우리
그래서
글 본사기자 김준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