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4월 28일 로동신문
충실성의 전통, 혁명의 피줄기는 이렇게 꿋꿋이 이어진다 각지의 렬사유자녀들속에서 발현되고있는 숭고한 사상정신적풍모
《우리는 백두에서 개척된 주체혁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 전국각지의 수많은 렬사유자녀들은 당과
천세만세 영원히 받들어모시리
한계단 또 한계단…
아직은 삼라만상이 어둠속에 잠긴 때이지만 함흥시 동흥산언덕의 층계를 오르는 발자욱소리가 고요한 새벽대기를 흔든다.지난 기간 하루의 번짐도 없이 동흥산언덕에 높이 모신
오로지 조국의 부강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해 나라의 새벽문을 제일먼저 여시고 저녁문도 제일 늦게 닫으시며 불면불휴의 로고와 심혈을 바쳐오신
우러를수록 한평생을 두고 사랑하신 천만자식들을 어서 오라 손저어 부르시는것 같고 광명한 미래에로 손잡아 이끌어주시는것만 같아 저도모르게 눈굽이 젖어드는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함흥시의 13명 렬사유자녀들은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에 대한 답사길에 올랐다.혁명의 성산 백두산에 올라 련면히 뻗은 령봉들과 천리수해를 바라보는 안금선녀성의 귀전에
백두산에서 다진 맹세를 지켜 그들은 지난 10여년세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동흥산언덕에 높이 모신
오늘 함흥시의 13명 렬사유자녀할머니들은 일흔, 여든의 고령이다.과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한두해도 아닌 10여년세월 충성과 보답의 한길만을 꿋꿋이 걸어올수 있게 하였는가.
몇해전
《…경애하는
바로 이것이였다.
어찌 그들뿐이랴. 만경대구역 선내동 55인민반에서 살고있는 김순옥녀성과 평원군 읍 27인민반에서 살고있는 황효산동무를 비롯한 각지의 수많은 렬사유자녀들이 백두의 혈통, 만경대의 혈통을 굳건히 이어갈 신념과 맹세를 안고 오늘도 충성과 의리의 길, 애국의 길을 변함없이 걷고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 김순옥녀성의 남편은 군사임무수행중 뜻밖의 일로 영영 일어설수 없는 몸이 되였다.한생토록 혁명의 군복을 입고 당의 령도를 충직하게 받들어갈 열의에 불타던 그가 특류영예군인이 되여 침상에 눕게 되였을 때 김순옥녀성은 잠을 이룰수 없었다. 그의 몫까지 합쳐 절세위인을 더 잘 받들어모실 불타는 마음을 안고 하루와 같이 10여리 새벽길을 오가며 만경대혁명사적지 주변관리사업을 진행하던 나날 김순옥녀성은 남편의 건강이 걱정되여 선뜻 문고리를 쥐지 못할 때도 있었다.그런 순간이면 남편은 늘 이렇게 당부하군 했다. 《자신이 반일애국렬사의 후손이라는걸 잊지 마오.》 반일애국렬사의 후손, 이것은 남편이 혁명의 꽃을 계속 피워가도록 온갖 지성을 다하는 속에서도 그가 하루의 드팀도 없이 만경대혁명사적지를 더 훌륭히 꾸리기 위한 사업에 헌신해올수 있게 한 힘의 원천이고 자양분이였다. 황효산동무와 그의 가정도 반일애국렬사의 자손답게 혁명의 성지를 더 아름답게 꾸릴 일념을 안고 지난 16년간 수십차에 걸쳐 만경대혁명사적지 주변관리사업에 필요한 많은 물자를 보내주었다.
나의 일터도 혁명의 전구이다
지금으로부터 16년전 가을 동대원구역에서 살고있는 여러명의 렬사유자녀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았다.그날 구역에서 있은 어느 한 모임에서 받은 충격이 커서였다.모임에서는 고난의 시기 스스로 도로관리공이 되여 성실하게 일해온 한 녀성의 소행이 소개되였다. 그들은 부끄러웠다.그리고 조국과 인민앞에, 사회와 집단앞에 어떻게 사는것이 참된 삶으로 되는가를 깊이 자각했다. 《우리모두 렬사유자녀들답게 어렵고 힘든 일의 앞장에 서자요.이제부터 저 도로를 우리가 관리합시다.》
김연옥동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는 모두의 눈가에 숭엄한 빛이 어렸다.
얼마후 주체사상탑이 솟아있는 대동강기슭의 드넓은 도로에 나선 그들의 마음속에서 이런 맹세가 불타올랐다.
이렇게 되여 그들은 도로관리공이 되였다.
크나큰 영광과 행복을 받아안은 때로부터 도로관리에 바쳐가는 그들의 헌신과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힘들 때도, 지칠 때도 많았다.하지만 조국과 혁명을 위해 한생을 참되게 산 혁명선렬들의 숭고한 넋을 되새기며 16년세월을 하루와 같이 도로에 깨끗한 량심을 묻었다. 어느해 뜻깊은 명절날 아침 일터로 나온 작업반장 김연옥동무는 남먼저 출근하여 도로를 쓸고있는 조영숙동무를 보게 되였다.하루전까지만 해도 몸이 불덩이같던 그에게서 김연옥동무가 비자루를 빼앗다싶이 했을 때였다. 《하루라도 이 도로를 떠나서는 못살것 같습니다.》 김연옥동무는 저도모르게 조영숙동무의 두손을 꼭 잡으며 속삭였다. 《옳아요.우리야 달리는 살수 없는 렬사유자녀들이 아니나요.》 남들이 단잠에 든 이른새벽이나 깊은 밤에도, 눈보라일고 비바람 휘몰아치는 궂은날에도 자기가 맡은 구간의 도로를 관리하며 애국의 삶을 꽃피워가는 나날 김연옥, 조영숙, 김성옥, 리분녀동무를 비롯한 동대원구역도로시설관리소의 렬사유자녀들은 자체의 힘으로 도로보수에 필요한 10여t의 자재를 마련하고 해당 단위 교원, 연구사들과의 긴밀한 련계밑에 도로청소차를 제작함으로써 수도의 거리를 더 밝고 아름답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10여년전 년로보장을 받았던 리련화녀성도 그들과 마음과 뜻을 합치였다. 자기의 일터를 가장 성스러운 혁명초소로 여기고 조국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 애국헌신의 값높은 자욱을 새겨가는 렬사유자녀들가운데는 당의 크나큰 믿음속에 시대의 전형의 값높은 영예를 지닌 김책공업종합대학 금속공학부 강좌장 김인규동무도 있다. 로력영웅이며 박사, 부교수인 그는 대학교단에 선 때로부터 오늘까지 후대교육사업과 과학연구사업에 모든것을 바쳐오고있으며 강좌장으로 사업하는 지난 8년간 강좌를 권위있고 실력이 높은 학술연구집단으로 만들고 과학연구사업을 꾸준히 벌려 나라의 금속공업발전에 적극 이바지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수십년전 중학교졸업을 앞둔 김인규동무는 함경북도안의 혁명전적지들을 답사하던 길에 김책제철련합기업소를 참관하게 되였다.압연강재가 쏟아져나오는 광경은 그의 가슴을 쇠물처럼 끓게 하였다.그날
과학기술을 배워
《대학에 가서 공부를 잘해라.우리 가정에 돌려주신
항일혁명투쟁에 참가하였다가 희생된 외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에게 친아버지가 되여주신분은 우리
대를 이어 더해가는 그 사랑, 그 은정에 보답할 일념 안고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교단에 서게 된 김인규동무는 지난 30여년간 교육자로서 실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하지만 그는 만족을 몰랐다.
두해전 9월 김책공업종합대학을 찾으신
그날
(당의 크나큰 믿음과 기대속에서 사는 혁명가유자녀답게 나라의 교육과학발전을 위한 길에 한생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치겠습니다.) 그만이 아니다. 북창지구청년탄광련합기업소 인포청년탄광 중대장 정일세동무와 염주군산림경영소 로동자 김순희, 김순애동무도 자기의 일터를 적대세력들의 온갖 도전과 책동을 짓부셔버리기 위한 혁명의 준엄한 전구로 여기고 부닥치는 난관과 애로를 과감히 뚫고헤치며 맡겨진 혁명과업을 훌륭히 수행함으로써 조국해방을 위한 반일성전에 더운 피를 바친 애국렬사의 넋을 꿋꿋이 이어가고있다.
그들은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수많은 영농물자와 수백t의 거름을 마련하여 시안의 협동농장들에 보내줌으로써 올해농사차비에 떨쳐나선 농업근로자들을 적극 고무해주었다. 자강도와 안주시, 신원군, 남포시 강서구역의 렬사유자녀들과 혁명학원졸업생들도 절세위인들의 불멸의 자욱이 어린 령도업적단위를 비롯한 농업전선을 성의껏 지원하는 소행을 발휘하였다. 혁명선렬들의 숭고한 정신세계를 따라배워 충실성의 전통, 혁명의 피줄기를 꿋꿋이 이어가려는것은 렬사유자녀들의 드팀없는 신념이고 의지이다.
오늘도 그들은
본사기자 리남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