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5월 21일 로동신문
성스러운 주체혁명사와 더불어 영생하는 충신들 불굴의 혁명신념으로 삶을 빛내인 녀성중대의 첫 중대장 혁명투사 박록금동지의 한생에서
주체25(1936)년 4월 만강부근의 수림속에서는
《녀성중대의 첫 중대장 박록금은 중대를 잘 통솔하였다.많은 전우들은 박록금의 특징을 단마디로 녀장부라고 규정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첫 녀성중대장이였던 박록금동지, 그는
박록금동지는 왕청에서 이불 한채도 없이 누데기차림으로 혼례를 치른 후 남편과 함께 한날한시에 유격대에 입대하였다.그후 그가 해산을 하였지만 가난한 살림에 애기포단 하나 만들 천조차 없다는 사실을 아신
후날 박록금동지는 사연깊은 그 이불보따리를 이고
《이불보따리》로부터 녀성중대의 첫 중대장으로. 너무도 꿈만 같은 신임에 몸둘바를 몰라하는 박록금동지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걸어온 길이 되새겨졌다.
한뉘 천덕꾸러기로 살아야 했던 인생에 봄을 주시고 혁명의 꽃으로 피워주시는
당시 일제가 작성한 비밀자료에는 이런 내용들이 있었다.
박록금동지는 원쑤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용감무쌍한 유격대지휘관이였지만 인민들속에서는 인정많고 마음씨고운 유능한 정치공작원으로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주체26(1937)년초 박록금동지는
박록금동지는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이면 부녀회조직을 꾸리는 사업에 정력을 기울였다. 어느날 박록금동지는 밤늦도록 동이를 이는 법과 걸음걷는 련습을 하느라고 무척 애를 쓰고있었다.그 모습을 보고 같이 사는 녀인이 밤도 깊었는데 그만 쉬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터놓았다.
그러나 박록금동지는 이것도 혁명과업이다,
그의 이런 꾸준한 노력과 능숙한 군중정치사업에 의하여 신흥촌일대의 부녀회조직은 급속히 확대되였다. 보천보전투가 있은 후 국내진공작전의 승리를 경축하는 지양개군민련환대회에 전달된 축기도 박록금동지가 여러날동안 부녀회원들과 함께 온갖 성의를 다하여 만든것이였다. 신흥촌일대를 혁명화하기 위해 헌신분투하던 박록금동지는 주체26(1937)년 가을 일제가 조작한 《혜산사건》당시 변절자의 밀고로 적들에게 체포되게 되였다. 박록금동지를 혜산경찰서로 압송한 놈들은 그에게서 혁명조직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야수적인 고문을 들이대였다.그러나 그 무엇으로써도 죽음을 각오한 그의 신념을 꺾을수 없었다.
그는 고문장에서도 《똑똑히 들어두라.나는
이듬해 5월 박록금동지는 혜산경찰서로부터 함흥형무소로 이송되여갔다.놈들은 저들도 접근하기 꺼려하는 결핵환자가 있는 감방에 그를 밀어넣었다. 박록금동지는 일신의 건강같은것은 생각지도 않고 결핵성복막염으로 중태에 놓인 환자를 친혈육의 심정으로 간호해주었다.그것이 너무 고마워 그 녀성은 병보석되는 날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였다.그로부터 얼마후에는 그의 가족들이 은혜를 갚기 위해 옷과 떡을 싸들고 찾아와 면회를 요청했지만 악착한 놈들은 박록금동지를 면회실이 아니라 고문실로 끌어냈다. 야만적인 고문으로 쇠약해진 몸에 전염병까지 침습하여 그는 사경에 처하게 되였다. 의식이 몽롱해진 속에서도 박록금동지는 오히려 벽을 두드리면서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병과 싸워이긴다, 적들과도 싸워이길것이라는 신호를 보내여 동지들을 고무해주었다. 어느날 박록금동지는 옆감방에 노래를 함께 부르자는 통방신호를 보내였다.그리고 있는 힘을 다하여 《유격대행진곡》을 불렀다.이렇게 온 감방으로 울려가던 그의 노래소리는 다음절에로 더 이어지지 못하였다. 박록금동지는 이렇게 최후를 마치였다.그러나 그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투사가 부르던 신념의 노래는 오늘도 천만의 심장속에 끝없이 울리며 총진군대오에 혁명열, 투쟁열을 백배해주고있다. 본사기자 박철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