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6월 2일 로동신문
성스러운 주체혁명사와 더불어 영생하는 충신들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태양을 옹위한 불굴의 전사 혁명투사 박달동지의 한생에서
불속에서도,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금과 같은 불변성, 바로 여기에 혁명가의 진가가 있고 생명이 있다.
《박달은 원쑤와의 싸움에서 날개를 잃었지만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혁명을 위해 굴함없이 싸운 투사였다.》 단 한번도 군복을 입은적이 없지만 오늘도 붉은 기폭에 휩싸여 대성산혁명렬사릉에서 항일빨찌산대오와 함께 영생하는 박달동지, 그는 혁명의 폭풍이 휘몰아치던 시기 망국노의 설음에 몸부림치며 헤매이다가 태양의 품에 안겨 능숙한 지하정치공작원으로 맹활약한 열혈혁명가이다.
항일혁명의 길에서 세운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시여 먼 후날
박문상, 이것이 박달동지의 본래이름이였다. 박달나무와 같이 단단한 사람이라고 하여 이웃들이 《박달》, 《박달》 하고 불렀는데 그것이 별명이 되고 나중에는 이름으로까지 고착되게 되였다. 그 이름그대로 그는 생명의 마지막호흡까지 혁명에 깡그리 바친 불굴의 투사이다. 그가 변절자의 밀고로 원쑤들에게 체포된것은 주체27(1938)년 가을이였다. 사령부의 위치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조직성원명단을 대라고 교형리들은 그에게 인간으로서는 상상할수 없는 중세기적인 고문을 악착하게 들이대였다. 살인귀들의 계속되는 고문으로 하여 박달동지는 척추가 부러지고 다리뼈가 쪼각났다.그것도 부족하여 원쑤들은 박달동지에게 젖은 고문용소가죽조끼를 입히고 종일 뙤약볕이 내려쪼이는 형무소마당에 앉아있게 하는 짐승도 낯을 붉힐 야만적인 고문을 들이대였다.
그러나 그 어떤 모진 고문도 오직
하반신마비, 뼈만 앙상한 얼굴…
이것이 조국의 해방과 함께 들것에 실리여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박달동지의 모습이였다.하지만 마지막피 한방울까지 바쳐
해방후 어느 한 휴양소에서 료양생활을 하고있던 박달동지는 주변농촌의 과수원들에서 사과에 봉투를 씌우지 않아 병충해를 입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그는 즉시 휴양생들과 휴양소종업원들을 발동하여 사과봉투를 만드는 일을 조직하고 자신도 침상에 누워 가슴에 널판자를 올려놓고 봉투를 만들었다. 전후 어느 한 료양소에서 치료받을 때의 일이다.안해의 도움으로 세바퀴차를 타고 주변농촌에 나갔던 박달동지는 당에서 심으라는 벼종자를 심지 않아 벼이삭에 쭉정이가 많이 생긴것을 알게 되였다.그는 쭉정이가 많은 벼이삭을 봉투에 넣어보내면서 당의 농업정책이 정확히 집행되지 않고있는 현상에 대하여 당에 보고하였다.
숨이 붙어있는 한
그의 보고를 받으신
당의 사상과 로선을 관철할 일념으로 심장은 높뛰였으나 야속하게도 그의 병세는 날을 따라 악화되여만 갔다.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깨닫게 된 때로부터 박달동지는 침상에서나마 청소년교양에 이바지할수 있는 글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이 사실을 아신
《오스뜨롭스끼는 눈먼 장님이 되여가지고도 혁명을 위해 장편소설을 쓰지 않았습니까.나는 그래도 밝은 눈을 가지고있는데 글이야 왜 못 쓰겠습니까.…》 그후 박달동지는 안해와 의료일군들의 아낌없는 방조를 받으며 수기 《조국은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와 항일혁명투쟁시기 갑산지방 혁명가들의 투쟁을 반영한 자서전적장편소설 《서광》을 비롯하여 여러편의 글을 내놓았다. 투사는 자기의 소설이 후대들속에서 읽히우는것을 보지 못한채 눈을 감았다.
그가 남기고간 장편소설 《서광》이 출판되였을 때
심장의 피를 기울여 한자한자 쪼아박듯이 쓴 그의 글줄들은 그속에 담긴 혁명에 대한 열화같은 충실성으로 하여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어주었다. 페인이 되여 감옥문을 나선 박달동지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15년동안이나 삶을 이어갈수 있은것은 오직 태양을 옹위하려는 신념으로 그의 심장이 불탔기때문이다. 그의 빛나는 생을 뜨겁게 추억하며 사람들은 가다듬고있다.
혁명가의 심장은 순간순간 오직
본사기자 량 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