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6월 5일 로동신문

 

성스러운 주체혁명사와 더불어 영생하는 충신들

대중혁명화의 유능한 조직자, 선전자

혁명투사 오중화동지의 한생에서

 

오중화동지는 일찌기 위대한 수령님의 지도밑에 혁명투쟁에 참가하여 자신과 가정을 혁명화하고 광범한 인민대중을 각성시켜 반일투쟁에로 불러일으킨 유능한 지하정치공작원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오중화동무는 동만일대에 혁명조직을 꾸리고 그것을 확대강화하는데서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오중화동무는 일가친척들을 혁명적으로 교양하는 사업도 잘하였습니다.》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태여난 오중화동지는 서울에서 고학으로 중학교를 다니면서 로동계급의 선진사상을 연구하였다.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화룡에 있는 사립화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오중화동지가 위대한 수령님을 처음으로 만나뵈온것은 주체19(1930)년 가을이였다.오매에도 그리던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게 된 오중화동지의 감격과 기쁨은 형언할수 없이 컸다.그럴수록 위대한 수령님의 신변안전이 걱정되였다.그는 믿음직한 청년들로 물샐틈없는 경비를 조직하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중화동지와 여러 시간 담화하시면서 왕청지구와 국내 륙읍일대의 형편을 구체적으로 료해하시고 그에게 혁명투쟁의 지침으로 되는 강령적인 교시를 주시였다.

오중화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대중혁명화방침을 높이 받들고 그 관철을 위하여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였다.

그의 사업능력과 혁명가다운 수완은 군중을 이끄는데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오중화동지는 자기가 사는 마을을 혁명화하기 위하여 리발기를 하나 갖추어놓고 가위계라는 조직부터 먼저 내온 다음 거기에 동네에 있는 주민들을 다 망라시키였다.

그는 가위계를 통하여 마을사람들을 초보적으로 계몽시킨 다음 이전날의 동창회, 학우회, 친목회 등 계몽단체들을 통합하여 령동친목회를 조직하였다.

오중화동지는 마을을 혁명화하기 위하여 연극공연도 자주 조직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군중을 혁명적으로 교양하였으며 결과 모든 마을사람들을 다 조직성원으로 흡수하였다.

겨울명월구회의를 전후한 시기에는 유격대결성준비작업의 중요고리의 하나인 무기획득공작에 참가하였다.

오중화동지는 적통치구역에 활동거점을 꾸리는 과업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도문의 천일인쇄소는 그가 꾸려놓은 중요한 활동거점으로서 혁명군의 귀와 눈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주체20(1931)년 일제놈들에게 체포된 오중화동지는 갖은 악형을 받았으나 놈들과 꿋꿋이 맞서싸웠다.

감옥살이를 끝내고 왕청으로 돌아온 그는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기 바쁘게 큼직한 과업을 하나 맡겨달라고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병색이 짙은 그의 얼굴을 보시고 마음에 걸리시였으나 그의 절절한 간청을 막을수 없으시여 가야허주변의 일부 지역들을 반유격구로 꾸려보라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오중화동지에게 그 과업을 주신것은 가야허주변의 일부 지역들이 적의 군사요충지들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또 적의 공격목표로 지목되고있는 사정과 관련되여있었다.

오중화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반유격구창설을 위한 투쟁에 모든것을 다 바치였다.

적들은 오중화동지와 그의 가문을 눈에 든 가시처럼 보고 그 일가친척을 멸살시킬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였다.

주체22(1933)년 봄 유격대의 한 소조가 룡정령사관에서 석현경찰서에 보내는 비밀문건을 압수하였는데 그것은 오씨일가를 전멸시키라는 살인지령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정보를 받은 즉시에 오씨일가에 대한 구출작전을 펼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을 받은 유격대원들은 31명이나 되는 오중화동지의 일가친척을 눈깜짝할 사이에 십리평으로 소개시키였다.

지칠줄 모르는 정열과 투지를 가지고 혁명조직을 확대해나가던 오중화동지는 주체22(1933)년 여름에 북봉오동의 비밀아지트에서 불행하게도 놈들에게 체포되였다.적들은 오중화동지를 현장에서 무참히 살해하였다.

오중화동지가 최후의 순간을 어떻게 마쳤고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받아들이였는지 그것을 목격한 증견자는 없다.

그러나 유격구의 푸른 하늘이 비껴있는 그의 눈동자와 생시보다 더 굳게 다물려있는 입매는 조직의 비밀과 생명을 바꾸지 않았다는것을 말해주고있었다.

오중화동지는 한마디의 유언도 남기지 못한채 대지우에 쓰러졌다.그때 그의 나이는 34살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중화동지의 희생을 가슴아프게 추억하시며 회고록에 이렇게 쓰시였다.

《우리 혁명은 간도일각에서 만사람의 총애를 받던 또 한명의 유능한 조직자, 선전자, 인민에게는 긍지를 주고 적들에게는 공포를 주는 성실하고 강직한 동량지재를 잃었다.그것은 동만땅에서 노도치며 전진해가는 우리 혁명의 앙양을 위해 정녕 가슴아픈 손실이였다.

그러나 오중화는 그 장렬한 죽음으로써 군중을 각성시키고 궐기시키였다.그는 희생되였지만 그가 피로 적시고 간 반유격구들에서는 항일대전의 새로운 전성기를 떠메고나갈 주인공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나고있었다.》

참으로 오중화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을 민족의 태양으로 우러러따르며 그이의 혁명로선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 청춘도 생명도 다 바쳐 영용하게 싸운 견결한 혁명투사였다.

오중화동지가 보여준 수령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과 고결한 혁명정신은 조국과 인민의 기억속에 살아있으며 그가 세운 투쟁업적과 위훈은 오늘 수령결사옹위의 고귀한 귀감으로 길이 빛나고있다.

본사기자 심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