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6월 14일 로동신문
성스러운 주체혁명사와 더불어 영생하는 충신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혁명투사 리광동지의 한생에서
자기
《항일혁명투사 리광동지도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성스러운 혁명위업실현에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 싸웠으며
리광동지는 항일전의 피어린 첫 기슭에서
그는 혁명의 길에 나서며 이런 맹세를 다지였다. 《나는 만주벌판과 조선8도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진정한 애국자를 찾고야말겠다.이 소망이 10년후에 이루어질지 20년후에 이루어질지 그것은 누구도 모른다.그렇지만 이 일을 성사시키기 전에는 부모님의 슬하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것을 맹약하는바이다.》
혁명의 탁월한
참다운 혁명의 길을 찾아 모진 고초를 다 겪은 리광동지의 애국심과 혁명열을 귀중히 여기신
주체21(1932)년 4월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을 앞둔 어느날 그가
당시 리광동지는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애국적청년들에 대한 반일부대의 적대적행동으로 커다란 고충을 겪고있었다.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방도를 찾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찾아온 리광동지에게
리광동지는 절세의 위인을 혁명의 진두에 높이 모신 전사의 행복감을 가슴뿌듯이 절감하며 한목숨 바쳐서라도
그로부터 얼마후 별동대대원 40여명과 함께 반일인민유격대에 입대한 리광동지는 별동대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는 석현자위단습격전투를 조직하여 놈들의 보총을 빼앗아냈고 왕청현 남하마탕 마록구에서의 매복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무기와 군수물자를 로획함으로써 부대의 무장장비를 개선하는데 이바지하였다. 리광동지는 소왕청방어전투를 비롯한 여러차례의 대소전투들에서도 지휘관으로서의 높은 수완과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발휘한 실천적모범은 구국군병사들을 감화시키였으며 군사정치일군으로서의 그의 명성은 동만의 광범한 대중속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그리하여 많은 반일부대들이
리광동지가 이룩한 성과를 두고 누구보다 기뻐하신분은
주체22(1933)년 3월초
마촌에서 돌아온 후 리광동지는 조선혁명가들을 제일 적대시하는 동산호부대에 들어가 별동대활동을 벌릴 결심을 하였다. 당조직에서는 동산호와 같은 무지막지한 토비대장과 접촉하는것은 위험한 일이니 심사숙고하라고 만류하였다.
하지만 리광동지는
동산호는 초기에는 반일을 한다고 하면서 무장을 들었지만 점차 토비로 전락되여 일제에게 리용되고있었다.리광동지가 무엇을 지향하고있는가를 잘 알고있던 그자는 반일련합전선을 파탄시키려는 일제의 모략에 넘어가 놈들이 짜준 각본대로 그에게 련합작전문제를 토의하자고 하였다. 이렇게 떠나간 리광동지는 그 길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리광동지일행에게 연회까지 차려 대접한 동산호는 그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비렬한 만행을 감행하였다.
리광동지는 최후의 순간에도 총부리를 겨누고 선 반일부대병사들에게
《리광이 만일 살아서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왔더라면 무슨 일을 하였을가?나는 지금도 종종 이런 가설을 세워보군 한다.리광의 사회활동은 물론 교육으로부터 시작되였고 그가 겨울명월구회의때 리청산이네 집에서 표명한 리상도 교단에 서는것이였다.그러나 나는 그가 해방된 조국에 살아서 개선하였더라면 강건이나 최현이처럼 군복을 입었을것이라고 생각한다.그는 어려운 초소를 골라가며 일생을 산 헌신적인 공산주의자였다.》
리광동지의 생은 길지 않았다.그러나 성스러운 조선혁명사에 아로새겨진 그의 위훈은 우리 인민의 가슴마다에
고철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