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6월 14일 로동신문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자력갱생으로 흥하는 길을 열어나가자

척박한 고장이 산과 강을
잘 리용하여 부흥의 지름길을 찾았다

위원군 고보리를 돌아보고

 

강계정신이 창조된 자강땅에는 자력갱생, 자급자족의 기풍을 높이 발휘하여 자기 손으로 흥하는 길을 열어나가는 단위들이 많다.

자강도사람들의 화제에 자주 오르군 하는 위원군 고보리, 궁벽하던 산골이 몰라보게 전변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전 우리는 취재길에 올랐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자력갱생, 자급자족의 기풍은 우리가 가장 빨리 발전할수 있는 원동력이며 제일 값비싼 재부이고 자원입니다.》

고보리에 들어서면서 받은 첫인상은 우중충 험준한 산발들이 병풍처럼 빙 둘러막혀있는 심심산골이라는것이였다.논이 얼마 없는데다가 적지 않은 밭도 산골짜기마다에 널려있어 농사조건이 불리하였다.이런 척박한 고장이 흥하는 고장으로 전변된것이 놀랍게만 여겨졌다.

소재지입구에서 우리는 관리위원장 김창걸동무를 만났다.

찾아온 사연을 알게 된 그는 별로 자랑할것이 못된다며 손사래부터 치는것이였다.

《예술영화 〈도라지꽃〉의 주인공들처럼 제힘으로 제고장을 살기 좋은 곳으로 꾸리기 위해 모두가 떨쳐나섰을뿐입니다.》

알고보니 이곳에서는 산골지방의 특성을 잘 리용하는것을 단위발전의 기본전략으로 삼고있었다.

일군의 말에 의하면 고보리에서는 산을 낀 곳에서는 산을 잘 리용할데 대한 당정책을 생명선으로 틀어쥐고 우선 축산업을 추켜세우는데 힘을 집중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먼저 찾은 곳은 축산작업반이였다.

구색이 맞게 꾸린 건물들만 보아도 이 농장에서 축산이 활성화되고있다는것이 대번에 알리였다.축산호동에 들어서니 영양상태가 좋은 종자돼지들이 꿀꿀거렸다.그런가 하면 한쪽에서는 수백마리의 토끼와 닭, 다른쪽에서는 수십마리의 꿩, 오리, 게사니들이 욱실거리고있었다.

당연히 우리가 제일 관심한것은 먹이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것이였다.

축산을 대대적으로 내밀자면 뭐니뭐니해도 먹이가 풍부해야 하지 않는가.

작업반에서는 지난 시기 축산을 통이 크게 할 목표밑에 콩짚과 강냉이짚도 분쇄하여 리용하고 비경지를 찾아 비름을 비롯한 먹이작물을 심었다.하지만 워낙 궁벽한 산골이다나니 먹이밭을 조성할 땅이 제한되여있었다.그래서 작업반원들은 주변산들에 관심을 돌리게 되였고 이악하게 달라붙어 수십정보의 칡산을 조성하게 되였다.

해마다 많은 칡을 거두어들여 말리웠다가 먹이로 리용하는데 칡의 자라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그 원천이 마를줄 몰랐다.게다가 칡은 영양학적가치가 높은 먹이였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먹이창고에는 산에서 거두어들인 칡이 그득하였다.산에서 나는 칡을 먹이로 많이 리용하여 알곡먹이소비기준을 최대로 낮추니 말그대로 풀과 고기를 바꾸고있는셈이 되였다.

한편 청년염소작업반에서는 수백마리의 종자염소를 확보해놓고 염소를 대대적으로 기르고있었다.여기서 많은 우유와 고기가 생산되고있는것도 물론이였다.

농장일군은 웃으며 말하였다.

《사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가 염소를 처음 기를 때만 해도 야산을 가지고있는 다른 고장을 은근히 부러워했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뗀 그는 자기 고장은 염소를 대대적으로 기를수 없는 곳으로 생각하였다고, 그런데 실지 달라붙어 해보니 오히려 염소기르기에 적합한 지대라는것을 알게 되였고 그때부터 주변산에 풀판을 조성하여 오늘과 같이 염소떼가 흐르게 되였다고 말하는것이였다.

결국 아무리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볼줄 모르면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는것이였다.

우리는 주변산에 조성해놓은 풀판들도 돌아보았다.골짜기들이 좁아 무연하게 펼쳐진 풀판은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제힘을 믿고 달라붙어 수백정보의 자연풀판과 인공풀판을 조성하였다니 그들의 이악한 일본새에 절로 감탄이 나갔다.

흰구름이 내려앉은듯 풀판마다 염소떼가 흐르고 방목공들이 부르는 노래가락이 귀맛좋게 들려왔다.

그 풍경에 취해 서있는 우리에게 동행한 일군은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축산자랑만이 아니지요.》

축산이 잘되니 많은 거름이 나오고있는데 비육분조들과 농장원세대들에서 생산되는 거름까지 합치면 농장적으로 근 2만t에 달한다는것이였다.

이 고장의 강냉이밭들은 대부분이 토심이 얕아 농사가 잘 안되였다.그런데 이처럼 많은 거름을 내니 지력이 높아지고 가물도 타지 않아 수확량이 껑충 뛰여오르게 되였다며 농장일군은 축사앞의 포전에로 우리를 이끌었다.거름을 얼마나 많이 냈는지 땅색이 거무스름하였다.

몇해전까지만 하여도 정보당 3t밖에 내지 못하던 포전이였는데 이제는 10t이상의 소출을 낸다고 한다.

농장일군은 모든 작업반들에서 축산을 잘하여 그 덕을 크게 보고있다고, 이렇게 축산과 농산의 고리형순환생산체계가 확립되니 지난해에도 다수확작업반들이 늘어나 강냉이는 정보당 12t, 벼는 8t이상 생산하였다고 긍지높이 말하였다.

산을 효과적으로 리용해서 축산을 활성화하고 알곡생산을 늘여가니 농장살림이 나날이 윤택해지고있었다.

농장에서는 해마다 농촌문화주택들을 짓고있는데 이제는 살림집이 남아돌아가는 정도라는것이였다.

《저기 보이는 여러동의 살림집들도 지난해에 지었는데 아직 입사를 하지 않은 새 문화주택들입니다.》

그뿐이 아니였다.

농장에서는 리문화회관과 리인민병원, 종합편의봉사기지, 10일유치원을 비롯한 공공건물을 새로 건설하거나 번듯하게 개건하였다.여기에 필요한 기와도 주변에 흔한 진흙을 리용해서 자체로 생산보장하고있었다.

우리는 리문화회관에 들려보았다.넓고 시원한 무대며 수백개의 관람석을 가지고있어 농장원들이 문화정서생활을 마음껏 누려간다니 우리의 마음도 흥그러워졌다.

《우리 농장원들이 즐겨찾는 편의봉사기지에도 들려봅시다.》

편의봉사기지에는 농장원들을 위한 봉사조건이 충분히 갖추어져있었다.농장원들이 이곳에서 여러가지 봉사를 받고있었다.

일군은 고보청년발전소에서 생산하는 전기로 수백세대 살림집의 조명을 보장하고 편의봉사기지와 기계화작업반, 보수작업반의 설비들은 물론 식료가공설비들과 집짐승먹이가공설비도 마음껏 돌린다고 하면서 우리를 발전소로 이끌었다.

리에서 자체의 힘으로 건설한 발전소, 바로 여기에도 자기 지방의 특성에 맞는 발전전략을 세우고 통이 크게 사업을 전개한 이 고장 사람들의 자력갱생정신이 진하게 비껴있었다.

기운차게 돌아가는 발전소를 바라보며 그는 고보리사람들이 덧없이 흘러가던 위원강을 다스린 덕에 생겨난것이라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전에는 고보리에서도 전기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나라의 전기사정이 긴장한데 팔짱을 끼고앉아 밝은 빛을 기다릴것이 아니라 자체의 힘으로 전력문제를 풀어 발전의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물이 흐르는 곳마다 중소형발전소를 건설할데 대한 당정책을 우리가 과연 어떻게 접수하고 관철했던가.

자신들을 질책하며 농장일군들은 수십리 떨어진 곳에 있는 강기슭에 발전소를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대담한 작전을 펼치였다.

처음엔 어떻게 수백m의 물길굴을 뚫으며 무슨 힘으로 언제를 쌓아올리겠는가고 머리를 젓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농장살림이 아직 넉넉치 못하고 모든것이 부족한 조건에서 자체의 힘으로 발전소를 일떠세운다는것이 아름찬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기문제를 푸는데 농장이 제발로 걸어나갈수 있는 지름길이 있다는 일군들의 절절한 호소에 모두가 호응해나섰다.

곧 청년돌격대가 조직되였다.하루일을 마친 저녁이면 농장원모두가 떨쳐나 건설에 합세해나섰다.그 과정에 험한 령 지름길의 뾰족뾰족한 돌들도 닳아없어져 유리알처럼 반들반들해졌다는 일화도 생겨나게 되였다.

건설자재를 해결하느라 일군들이 걸은 길, 지새운 밤은 또 얼마인지 모른다.그 모든 애로와 난관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오늘은 그 전기덕을 톡톡히 보고있었다.

자기 고장의 모든것을 귀중히 여기고 제힘으로 가꾼 행복의 열매여서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는 이 고장의 전기자랑이였다.

양지쪽 산기슭에 태양열온실을 일떠세우고 버섯재배장과 양어장을 실리있게 건설하여 덕을 본다는 농장일군의 자랑도 우리는 무심히 들을수 없었다.

모든것을 산골지방의 특성에 맞게 자기식의 발전전략을 가지고 당정책을 끝까지 관철하기 위해 이악하게 노력한 이 고장 사람들의 남다른 일본새에 숙연한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남의 집 금덩이보다 자기 집의 쇠덩어리가 더 낫다는 말이 있듯이 자기 고장의 모든것을 귀중히 여기고 그것을 밑천으로 하여 제손으로 행복을 창조하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만이 돌우에도 꽃을 피울수 있는것이 아니랴.

취재를 마치고 농장을 떠나는 길에 우리는 소원령에 올랐다.

위대한 장군님을 고향땅에 모시고싶은 간절한 소원을 안고 고보리사람들이 10여년전 칼벼랑을 깎아 번듯하게 령길을 닦아놓고 그 이름을 《소원령》이라 지어부른 곳이였다.

소원령의 전망대에 나서니 장자강의 맑은 물이 감돌아흐르는 산기슭을 따라 규모있게 들어앉은 아담한 농촌문화주택들이며 공공건물들, 우짖는 산새소리, 소들의 영각소리가 함께 어울려 유정한 정취를 자아내는 산골마을의 풍경이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안겨왔다.

보면볼수록 우리의 가슴속에는 이런 확신이 차넘쳤다.

궁벽한 산골이라고 자기 고장을 탓하며 벌방을 쳐다보지 말라.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자체의 발전동력을 찾아 당정책을 끝장을 볼 때까지 근기있게 관철한다면 심심산골에서도 얼마든지 흥하는 길, 행복의 길을 열어나갈수 있다는것을.

우리의 눈앞에서 고보리의 풍경은 점점 사라져가도 더 좋은 래일을 마중해가는 이 고장 사람들의 신심에 넘친 미더운 모습은 더더욱 또렷하게 뇌리에 새겨졌다.

글 및 사진 특파기자 전명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