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6월 22일 로동신문
빨찌산녀투사로 한생을 빛내여준 항일혁명투사 황순희동지가 받아안은 고귀한 사랑과 믿음
백두에서 시작된 우리 혁명은 세기를 이어온 장구한 려정에서 수많은 열혈투사들을 배출하였다. 살아서는 혁명위해 한몸을 불같이 바치고 떠나갔어도 고귀한 생의 메아리로 우리의 붉은기에 세찬 퍼덕임을 더해주는 참된 애국자, 혁명가들이 그 얼마인가.
그 불멸할 군상의 전렬에는
영원히 백두산시절처럼
따스한 봄빛이 대지를 감싸안던 세해전 3월 27일이였다.
이날
혁명전통교양의 대전당으로 훌륭히 꾸려진 박물관의 여러곳을 돌아보시면서 강령적인 가르치심을 주시던
열화같은 그리움속에 사는 로투사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시며 영광의 자리에 불러주시는
그들을 둘러보시며
《항일의 로투사들이 혁명전통의 전초기지를 굳건히 지켜주고있기때문에 우리 혁명의 명맥이 꿋꿋이 이어지고있습니다.》
그날 황순희동지는 그토록 소원하던대로
백두산을 형상한 벽화를 배경으로 찍은 그 뜻깊은 사진을 바라볼 때마다 황순희동지는 혁명의 첫걸음을 떼여주시고 백두산시절의 그 정신으로 한생을 빛내여나가도록 걸음걸음 이끌어주시던
황순희동지가
그때 그는 미혼진밀영에서 몇명의 녀대원들과 함께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고있었다.처창즈유격구가 해산되자 자기를 데려가지 않을바엔 아예 총으로 쏘아달라고 강떼를 써서 겨우 입대승인을 받고 부대를 따라온 그였다.
낮에 밤을 이어 환자치료에 전념하던 어느날 뜻밖에도
아동단시절부터 오매불망 그려온
하도 키가 작고 체소하여 처음에는 나어린 소녀로 보시였었다.그가 유격대원이라는것을 아신
황순희동지는 가슴속에 응어리진 피눈물나는 사연들을 죄다 아뢰였다.이국땅에서 태여나 일제놈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유격구에서 싸우던 언니마저 희생된데 대하여 들으신
이윽고 그이께서는 최현동지를 바라보시며 저렇게 키도 작고 연약한 동무가 꽤 험한 산발을 넘으며 싸움을 할수 있겠는가고 하시였다.
순간 황순희동지는 긴장해졌다.후날 총을 잡게 하라고 하실것만 같아 《극복할수 있습니다.
그러는 그의 어깨를 다정히 쓸어주시며
이렇듯
산에서 싸운다는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엄혹한 겨울에는 더욱 힘겨웠다.생눈을 삼키며 배고픔을 달래야 했고 사나운 눈보라를 헤치며 강행군을 해야 했다.눈섭에 드리운 고드름을 혼자서는 도저히 떼낼수가 없어 서로들 마주앉아 한참이나 신고했고 휴식시간에 눈판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일어나면 살이 얼어붙어 바지에 피가 내배군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고초는 이를 악물고 견디여낼수 있었다.황순희동지에게 있어서 제일 달래기 힘든것은
그처럼 바라던대로
황순희동지가 그처럼 체소한 몸으로 끝까지 혁명을 할수 있은것은 신념이 강하고 의리가 강했기때문이였다.
황순희동지는 자주
그럴 때면 황순희동지는 챙챙한 목소리로 아뢰였다.
그것은 자그마한 꾸밈도 없는 그의 진심이였다. 주체29(1940)년 8월에 있은 일이다.
맞은편쪽에서 불빛이 번쩍하는것을 보신
후날
생사를 판가름하는 시각에 그 자그마한 몸으로 주저없이 탄막을 막아나서던 황순희동지의 모습을
황순희동지는 체소하고 보잘것없는 자기가 강의한 인간이 될수 있은것은
무수한 사선의 고비를 넘으면서 언제 한번 나약한 모습을 보인적 없는 황순희동지였건만 남편인 류경수동지를 잃었을 때에는 도저히 일어설념을 못했다.눈물로 베개잇을 적실수록
류경수동지의 곁에 황순희동지를 나란히 세워주시며 혁명의 길에서 이렇게 서로 결합하니 얼마나 좋은가고 못내 기뻐하시던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처음으로 새해를 맞던 주체48(1959)년 1월 1일 황순희동지는
항일의 불길속에서 품들여 키우신 녀전사가 주저앉을세라 념려하시며
몇해후 중앙당학교(당시)를 졸업한 황순희동지는 조선혁명박물관에서 당사업을 맡아보게 되였다.
빨찌산때처럼 이악하게 달라붙으면 다 할수 있다고, 자신께서 도와줄테니 걱정말고 잘해보라고 황순희동지를 고무해주신
한해두해 세월이 흐를수록 황순희동지는 자기를 다름아닌 조선혁명박물관에 세워주신
생애의 마지막시기인 주체82(1993)년 7월 조선혁명박물관을 또다시 찾으신
그것은 황순희동지가 영원히 백두산에 마음을 얹고 빨찌산시절의 그 정신으로 우리 당의 혁명전통, 우리 혁명의 명맥을 굳건히 지켜나가기를 바라시는
그 품 떠나 못살아
만발한 꽃밑에 자양분을 주는 기름진 토양이 있듯이 우리 혁명전사들의 보람찬 삶에는 쉼없이 박동을 더해주고 활력을 부어주는 귀중한 원천이 있다. 황순희동지가 로당익장하며 혁명의 먼길을 꿋꿋이 걸어올수 있은것은 대를 이어 더욱더 뜨거워만지는 절세위인들의 각별한 사랑과 믿음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주체98(2009)년 4월말
《황순희관장은
그러시면서 조선혁명박물관에 있는
누구나 쉽게 누릴수 없는 영광을 또다시 받아안은 황순희동지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산같이 덧쌓여지는 절세위인들의 한없는 은정의 세계가 되새겨져 눈시울을 적시였다. 주체78(1989)년 5월 3일이였다.
황순희동지는
그런데 그날 저녁 황순희동지는 또다시 큰 충격에 휩싸였다.
여기에는 이런 사연이 깃들어있었다.
그날 한 일군이
그러자
이렇게 되여 황순희동지는 백두산절세위인들께서 보내주신 생일상을 하루에 두번이나 받아안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던것이다. 남달리 발이 작았던 황순희동지의 신발과 관련한 가슴뜨거운 일화도 있다.
그때마다 황순희동지의 추억은 깊어졌다.
가렬한 항일의 전장에서
그가 산에서 싸울 때 얻은 병으로 하여 자식을 보지 못하는것이 마음에 걸리시여 새 조국건설을 이끄시는 분망하신 속에서도 몸소 병치료를 위한 수소문을 하시고 양덕온천이 좋다는데 가서 병을 고치라고, 정숙동무랑 같이 가라고 이르시며 그의 등을 떠밀어주신
드디여 황순희동지의 첫아기가 태여나게 되였을 때에는 김정숙동지에게 류경수동무가 철도경비대를 강화하느라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수고하는데 우리가 돌봐주어야 하겠다고, 아이가 태여나면 남부럽지 않게 제일 좋은 천으로 옷과 포단을 해주어야겠다고 당부하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 손수 한뜸두뜸 정성다해 만든 포단을 안겨주시며 딸을 낳겠는지, 아들을 낳겠는지 몰라 량면을 다 겉이 되게 만들었는데 딸이니 분홍색을 겉으로 하라고 다정히 이르실 때 황순희동지는 그이의 품에 와락 안기며 참고참았던 오열을 터치였다.
일찌기 부모를 잃고 고아의 설음이 가득찼던 황순희동지의 가슴속에 육친의 따뜻한 정을 부어주신
때없이 귀한 약재와 산꿀도 보내주시고 몇차례나 외국에서 치료도 받게 하여주시며 황순희동지의 건강을 위해 우리
주체79(1990)년 6월에 진행된 전국경공업대회의 토론자들속에는 황순희동지도 있었다. 종주먹을 쥐고 《유격대행진곡》을 힘차게 불러 온 대회장에 백두의 숨결이 고동치게 하는 녀투사의 기백과 정신세계에 대회참가자들 누구나 감동을 금치 못하였다.
경공업부문의 일군도 아닌 황순희동지가 이 연단에 나서게 된데도
10여년전 어느 한 대회에 참가한 황순희동지는 참가자들과 함께 금수산기념궁전(당시)광장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그 사진을 보아주신
이 사진에서 무엇이 잘못되였는지 모르겠는가고 격하신 어조로 물으시는
이어
어쩌면 황순희어머니를 맨끝에 모실수 있는가, 그가 얼마나 섭섭해하였겠는가고 하실 때에야 일군은 비로소 관직에 따라 일률적으로 좌석을 배치한 실책을 깨달았다.일군은
혁명의 전렬에!
우리
예나 지금이나 빨찌산군복을 벗지 않고 백두의 행군길을 달리는 투사로 시대앞에 높이 내세워주고싶으시여 년로한 그가 조선혁명박물관 관장의 중책을 계속 맡아보도록 하여주신 우리
은혜로운 그 품속에서 고령에 이르도록 혁명가의 넋과 열정을 이어온 황순희동지였기에 산천초목도 비분에 떨던 피눈물의 12월 그 누구보다 크나큰 상실의 아픔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로투사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신
금수산기념궁전(당시)에 생전의 모습으로 계시는
눈덮인 백두밀림에서 탄생하신 그날로부터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으신 우리
그날의 광경에 대한 보고를 들으신
어버이 그 품 떠나 저는 못삽니다!
영생의 삶이 새겨주는 진리
쓰다가는 다시 옮겨쓰고 또 몇글자 쓰다가는 새 종이를 찾고… 이렇게 신고하기를 벌써 며칠째였다.
그래도
그런데 그 소박한 편지에 우리
《황순희동지에게! 할머니! 편지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몇번씩이나 읽어보았습니다.
믿어주시는데 어긋남없이 언제나 굳은 마음으로
할머니!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항상 건강에 주의를 돌려주십시오. 항상 건강하시기를 바라면서
2012년 6월 13일》
정녕 그 한자한자는
가야 할 머나먼 앞길을 내다보시는
력사의 갈피에 새겨진 이야기가 있다. 수십년전 어느 한 회의장에서는 빨찌산의 피어린 력사를 모독하는 망발이 튀여나왔다. 이때 책상을 치며 일어선 황순희동지는 그 작은 손을 칼날처럼 휘두르며 장내가 쩡쩡 울리도록 추상같이 웨쳤다. 《똑똑히 알아두라! 우리 혁명의 전통이 어떻게 마련되였는가를.
항일의 불바다속에서
어중이떠중이들이 우리 당의 혁명전통에 오가잡탕을 끌어들이려고 음으로 양으로 책동할 때에도 우리의 혁명전통은 오직
백두의 흰눈처럼 순결한 마음으로
《사람은 의리가 있어야 한다.의리를 저버리면 짐승 한가지이니라.》
우리 조국이 력사에 류례없는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던 나날 황순희동지의 가슴속에는
조국과 인민의 운명을 지키시려 쉬임없이 전선길을 이어가시는
황순희동지는
그의 강한 원칙성과 투철한 신념, 담대한 배짱은 단순히 성격상기질에 기인된것이 아니였다.
몇해전 어느날 인민군지휘성원이 황순희동지를 찾아왔다.
만나자바람으로 무작정 붙들고
더 큰 충격을 받은것은 황순희동지가 그 년세에 아직까지도 책을 읽고있는것이였다.다름아닌
혁명가의 신념과 배짱은
조선혁명박물관증축공사가 빨리 진척되지 못하는것을 두고 황순희동지는 늘 죄책감에 모대겼다.
《우리
드디여 개관식을 하게 되였을 때 침상에 누워있던 황순희동지는 늦게나마
총대처럼 변함을 모르는 빨찌산정신으로 생을 빛내여가는 항일의 로투사들에게 베푸신
주체104(2015)년 7월 어느날이였다.
제4차 전국로병대회에 참석하시기 위하여
대회가 한창 진행될 때였다.
황순희동지가 갑자기 몸이 불편해하는것을 헤아려보신
력사상 있어본적 없는 눈물겨운 화폭이 펼쳐진 그 시각 황순희동지는
력사적인 당 제7차대회를 앞둔 어느날
병원에 입원한 황순희동지의 건강상태를 알아보신 그이께서는 한시간만이라도 앉아계실수 없겠는가고 안타까운 어조로 다시금 물으시였다. 한시간만이라도!
바로 이것이 우리
지난 1월 17일 황순희동지의 심장이 고동을 멈추었다는 비보를 받으신
10대의 나이에 혁명의 길에 나선 때로부터 세대가 몇번이나 바뀐 기나긴 세월
영생이란 무엇인가. 정녕 그것은 절세위인들을 대를 이어 높이 모신 이 땅의 혁명전사들만이 받아안을수 있는 특전이며 태양의 빛발따라 이 세상 끝까지 가고갈 맹세로 온넋을 불태워온 충신들에게 안겨지는 가장 값높은 영광인것이다. 황순희동지의 생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투사의 심장은 오늘도 쉬임없이 고동치며 우리에게 소리높이 웨친다. 은혜로운 태양의 품에 안긴 혁명전사의 삶은 영원하다고, 그 품에 운명의 피줄을 잇고 변함없이, 끝까지 충성의 한길을 가고가라고. 본사기자 김순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