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6월 22일 로동신문

 

빨찌산녀투사로 한생을 빛내여준 위대한

항일혁명투사 황순희동지가 받아안은 고귀한 사랑과 믿음

 

백두에서 시작된 우리 혁명은 세기를 이어온 장구한 려정에서 수많은 열혈투사들을 배출하였다.

살아서는 혁명위해 한몸을 불같이 바치고 떠나갔어도 고귀한 생의 메아리로 우리의 붉은기에 세찬 퍼덕임을 더해주는 참된 애국자, 혁명가들이 그 얼마인가.

그 불멸할 군상의 전렬에는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잊지 못해하시고 온 나라 인민이 뜨겁게 추억하는 항일혁명투사 황순희동지도 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수령은 인민대중을 승리와 영광의 길로 이끌어주는 령도자인 동시에 그들을 혁명가로 키워주는 스승이며 어버이입니다.》

위대한 수령님을 따라 손에 총을 잡고 항일의 혈전만리를 헤치던 빨찌산시절의 그 모습으로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혁명전통의 전초기지를 굳건히 지켜온 투사, 대를 이어 더해지는 절세위인들의 사랑과 믿음속에 보람차고 영광넘친 길을 걸어온 로혁명가의 값높은 삶이 우리에게 새겨주는것은 무엇인가.

 

영원히 백두산시절처럼

 

따스한 봄빛이 대지를 감싸안던 세해전 3월 27일이였다.

이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 105돐을 앞두고 새로 개건된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으시였다.

혁명전통교양의 대전당으로 훌륭히 꾸려진 박물관의 여러곳을 돌아보시면서 강령적인 가르치심을 주시던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일군들에게 황순희동지가 조선혁명박물관이 개건된 다음 자신을 몹시 기다렸을것이라고 하시면서 오늘 박물관 일군들과 강사들을 비롯한 종업원들과 기념사진을 찍을 때 황순희동지를 모셔와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열화같은 그리움속에 사는 로투사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시며 영광의 자리에 불러주시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다심하신 은정에 일군들은 가슴이 쩌릿해졌다.

그들을 둘러보시며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이으시였다.

《항일의 로투사들이 혁명전통의 전초기지를 굳건히 지켜주고있기때문에 우리 혁명의 명맥이 꿋꿋이 이어지고있습니다.》

그날 황순희동지는 그토록 소원하던대로 경애하는 원수님을 또다시 몸가까이 모시고 영광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위대한 수령님들의 동상앞에서 경애하는 원수님의 손을 꼭 잡고 무한한 행복감에 잠겨있던 로투사,

백두산을 형상한 벽화를 배경으로 찍은 그 뜻깊은 사진을 바라볼 때마다 황순희동지는 혁명의 첫걸음을 떼여주시고 백두산시절의 그 정신으로 한생을 빛내여나가도록 걸음걸음 이끌어주시던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지군 하였다.

황순희동지가 위대한 수령님을 처음으로 만나뵈온것은 주체25(1936)년 봄이였다.

그때 그는 미혼진밀영에서 몇명의 녀대원들과 함께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고있었다.처창즈유격구가 해산되자 자기를 데려가지 않을바엔 아예 총으로 쏘아달라고 강떼를 써서 겨우 입대승인을 받고 부대를 따라온 그였다.

낮에 밤을 이어 환자치료에 전념하던 어느날 뜻밖에도 사령관동지께서 밀영에 찾아오시였다.

아동단시절부터 오매불망 그려온 김일성장군님을 몸가까이 뵙게 된 황순희동지의 격정과 흥분은 이루 형언할수 없었다.쌍태머리를 달싹이며 부지런히 환자들의 뒤거둠을 해주면서도 온몸이 눈과 귀가 되여 위대한 수령님께로 쏠리고있는데 최현동지와 이야기를 나누시던 수령님께서 문득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시였다.

하도 키가 작고 체소하여 처음에는 나어린 소녀로 보시였었다.그가 유격대원이라는것을 아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저으기 놀라와하시며 키도 작은데 어째서 벌써 유격대에 들어왔는가고 물으시였다.

황순희동지는 가슴속에 응어리진 피눈물나는 사연들을 죄다 아뢰였다.이국땅에서 태여나 일제놈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유격구에서 싸우던 언니마저 희생된데 대하여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비분을 금치 못해하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최현동지를 바라보시며 저렇게 키도 작고 연약한 동무가 꽤 험한 산발을 넘으며 싸움을 할수 있겠는가고 하시였다.

순간 황순희동지는 긴장해졌다.후날 총을 잡게 하라고 하실것만 같아 《극복할수 있습니다. 사령관동지.》라고 서둘러 대답을 올리였다.

그러는 그의 어깨를 다정히 쓸어주시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무는 꼭 훌륭한 유격대원이 되여야 하오.》 라고 뜨겁게 고무해주시였다.

이렇듯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속에 황순희동지는 10대의 나이에 빨찌산생활을 시작하였다.

산에서 싸운다는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엄혹한 겨울에는 더욱 힘겨웠다.생눈을 삼키며 배고픔을 달래야 했고 사나운 눈보라를 헤치며 강행군을 해야 했다.눈섭에 드리운 고드름을 혼자서는 도저히 떼낼수가 없어 서로들 마주앉아 한참이나 신고했고 휴식시간에 눈판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일어나면 살이 얼어붙어 바지에 피가 내배군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고초는 이를 악물고 견디여낼수 있었다.황순희동지에게 있어서 제일 달래기 힘든것은 김일성장군님을 뵙고싶은 마음이였다.미혼진에서 만나뵈온 그이의 모습을 순간도 잊은적 없었고 자나깨나 그이의 곁에서 싸우고싶은 생각뿐이였다.

그처럼 바라던대로 위대한 수령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간고한 혈로를 헤쳐오는 나날 황순희동지의 가슴속에는 수령님에 대한 흠모심이 더욱 깊이 간직되였다.풀죽 한그릇도 대원들과 꼭같이 나누시는 사령관동지를 우러르며 혁명적동지애와 의리가 어떤것인가를 깨달았고 수령님으로부터 참나물김치를 담그는 법도 배우면서 막히는데 없는 빨찌산의 녀장부로 성장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항일전의 그 나날을 회고하시면서 《나는 황순희를 만날 때마다 저렇게도 체소하고 섬약한 녀자가 백두산의 설한풍속에서 어떻게 10년동안이나 무장투쟁을 해왔을가 하는 생각을 하군 한다.》라고 쓰시였다.

황순희동지가 그처럼 체소한 몸으로 끝까지 혁명을 할수 있은것은 신념이 강하고 의리가 강했기때문이였다.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길에 우리 혁명의 승리가 있다는 절대불변의 신념, 사령관동지의 품을 떠나서는 순간도 살수 없고 그이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바치겠다는 투철한 인생관이 그를 강의하고 억센 투사로 키운것이다.

황순희동지는 자주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신 통신련락임무를 수행하군 하였는데 일단 길을 떠나면 아동단시절처럼 신발뒤축에 먼지가 폭폭 일도록 암팡지게 걸음발을 옮겼다.그렇게 길을 다그쳐 예정일보다 훨씬 앞당겨 사령부에 도착하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믿어지지 않으시여 정말 가긴 갔댔는가고, 어느 길로 갔댔고 누구를 만났는가고 재삼 물으시였다.

그럴 때면 황순희동지는 챙챙한 목소리로 아뢰였다.

《사령관동지께서 혹시 나를 남겨두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시면 어쩌나 해서 낮이고 밤이고 죽기내기로 달려왔습니다.》

그것은 자그마한 꾸밈도 없는 그의 진심이였다.

주체29(1940)년 8월에 있은 일이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대오가 한창 밀림속을 행군하는데 사득판이 나졌다.

맞은편쪽에서 불빛이 번쩍하는것을 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적들이 눈치채기 전에 감쪽같이 외나무다리를 건늘것을 명령하시였다.대원들을 한명한명 손잡아 건너보내시고 맨 나중에 다리를 건느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풀숲에 들어서시였을 때 갑자기 적들의 기관총이 불을 뿜기 시작하였다.총탄이 우박치듯 날아와 그이의 주위에 박히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팔에 이끌려 수림속을 향해 달리는 긴박한 정황속에서 황순희동지의 뇌리를 친것은 혁명의 사령부를 보위해야 한다는 비상한 사명감이였다.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총탄이 날아오는쪽에 서서 사령관동지의 한팔을 붙잡고 달리였다.뒤미처 달려온 전문섭동지가 그이의 다른 한켠에 붙어섰다.

후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 전문섭이와 황순희가 나를 결사적으로 보호해주었습니다.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였습니다.》라고 감회깊이 추억하시였다.

생사를 판가름하는 시각에 그 자그마한 몸으로 주저없이 탄막을 막아나서던 황순희동지의 모습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생 잊지 못해하시였다.

황순희동지는 체소하고 보잘것없는 자기가 강의한 인간이 될수 있은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덕이라고 입버릇처럼 외우군 하였다.

무수한 사선의 고비를 넘으면서 언제 한번 나약한 모습을 보인적 없는 황순희동지였건만 남편인 류경수동지를 잃었을 때에는 도저히 일어설념을 못했다.눈물로 베개잇을 적실수록 위대한 수령님과 김정숙어머님께서 류경수동지와 배필을 무어주시던 주체34(1945)년 여름의 그날이 돌이켜졌다.

류경수동지의 곁에 황순희동지를 나란히 세워주시며 혁명의 길에서 이렇게 서로 결합하니 얼마나 좋은가고 못내 기뻐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정숙동지의 성의가 어린 음식상앞으로 두 전사를 이끄시며 남녀간에 백년가약을 맺는것은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뜻깊은 일인데 나라가 없다보니 큰상도 받지 못하고 성례를 이룬다고 갈리신 음성으로 교시하시였다.그이를 우러르며 황순희동지는 뜨거운 눈물을 쏟고야말았다.백두산위인들께서 친부모의 심정으로 맺어주신 인연이여서 더더욱 소중했던 류경수동지였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처음으로 새해를 맞던 주체48(1959)년 1월 1일 황순희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슬픔을 금치 못해하는 황순희동지를 따뜻이 위로해주시며 혁명하는 과정에는 모진 고난과 애로가 앞을 가로막아나서며 참기 어려운 비통한 일도 생길수 있다고, 혁명가들은 이 모든것을 이겨내야 하며 혁명의 최후승리를 위하여 락천적으로 살며 용감하게 싸워야 한다고 절절히 교시하시였다.

항일의 불길속에서 품들여 키우신 녀전사가 주저앉을세라 념려하시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듬해 양력설에도 침상에 누워있던 그를 저택으로 부르시여 동무는 산에서 빨찌산투쟁을 했는데 혁명가는 계속 혁명을 해야 한다고 간곡히 이르시였다.

몇해후 중앙당학교(당시)를 졸업한 황순희동지는 조선혁명박물관에서 당사업을 맡아보게 되였다.

빨찌산때처럼 이악하게 달라붙으면 다 할수 있다고, 자신께서 도와줄테니 걱정말고 잘해보라고 황순희동지를 고무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여러차례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으시여 자료전시에서 나서는 원칙적문제들을 밝혀주시였다.때로는 그의 무랍없는 청도 탓하지 않으시고 자신께서 사용하시던 외투며 장화도 보내주시여 사적물로 전시할수 있게 하여주시였다.

한해두해 세월이 흐를수록 황순희동지는 자기를 다름아닌 조선혁명박물관에 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더욱 깊이 새기게 되였다.

생애의 마지막시기인 주체82(1993)년 7월 조선혁명박물관을 또다시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황순희동지와 함께 백두산을 형상한 청사앞면의 벽화를 배경으로 뜻깊은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

그것은 황순희동지가 영원히 백두산에 마음을 얹고 빨찌산시절의 그 정신으로 우리 당의 혁명전통, 우리 혁명의 명맥을 굳건히 지켜나가기를 바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기대였고 뜨거운 당부였다.

 

그 품 떠나 못살아

 

만발한 꽃밑에 자양분을 주는 기름진 토양이 있듯이 우리 혁명전사들의 보람찬 삶에는 쉼없이 박동을 더해주고 활력을 부어주는 귀중한 원천이 있다.

황순희동지가 로당익장하며 혁명의 먼길을 꿋꿋이 걸어올수 있은것은 대를 이어 더욱더 뜨거워만지는 절세위인들의 각별한 사랑과 믿음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주체98(2009)년 4월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에게 다가오는 황순희동지의 생일 90돐을 잘 쇠줄데 대한 과업을 주시면서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황순희관장은 수령님을 모시고 오래동안 투쟁한 로혁명투사입니다.그는 지금도 고령의 불편한 몸이지만 일을 잘하고있습니다. 수령님을 모시고 투쟁한 항일혁명투사들가운데서 아직 현직에서 일하는 사람은 황순희관장밖에 없습니다.》

그러시면서 조선혁명박물관에 있는 《수령님과 전우관》(당시)에 황순희동지의 자료를 전시하도록 크나큰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누구나 쉽게 누릴수 없는 영광을 또다시 받아안은 황순희동지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산같이 덧쌓여지는 절세위인들의 한없는 은정의 세계가 되새겨져 눈시울을 적시였다.

주체78(1989)년 5월 3일이였다.

황순희동지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뜻깊은 생일상을 받아안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따라 혈전만리길을 헤쳐온 항일의 로투사들을 끝없이 아끼고 내세워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은덕에 천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는것이 안타까운데 이렇듯 뜨거운 사랑을 베풀어주시니 그 고마움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수 있으랴.

그런데 그날 저녁 황순희동지는 또다시 큰 충격에 휩싸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도 생일상을 보내주신것이였다.

여기에는 이런 사연이 깃들어있었다.

그날 한 일군이 어버이수령님께 오늘이 황순희동지의 생일 70돐이라는것과 위대한 장군님께서 그에게 생일상을 배려하여주신데 대하여 보고드리였다.

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놀라와하시며 오늘이 며칠인가고 물으시였다.그러시고는 일이 바쁘다보니 그걸 잊었댔다고 하시면서 늦었지만 이제라도 자신의 명의로 된 상을 보내야겠다고, 자신의 이름으로 꼭 차려주라고 신신당부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황순희동지는 백두산절세위인들께서 보내주신 생일상을 하루에 두번이나 받아안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던것이다.

남달리 발이 작았던 황순희동지의 신발과 관련한 가슴뜨거운 일화도 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에서 좋은 신발이 생산될 때마다 황순희동지를 제일먼저 생각하시며 키가 작은 그의 특성까지 헤아려 마음에 꼭 드는 신발을 안겨주군 하시였다.

그때마다 황순희동지의 추억은 깊어졌다.

가렬한 항일의 전장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황순희동지를 위해 깊이 마음쓰신것중의 하나가 바로 신발문제였다.그래서 전투가 끝나면 전리품중에서 작은 문수의 신발들을 전부 가져오도록 하시였다.어느 전투끝에는 그런 신발이 거의 한 배낭이나 생겼는데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였는지 모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백두산시절에 베풀어주시던 어버이사랑으로 해방후에도 황순희동지를 위해 참으로 많은 심혈을 기울이시였다.

그가 산에서 싸울 때 얻은 병으로 하여 자식을 보지 못하는것이 마음에 걸리시여 새 조국건설을 이끄시는 분망하신 속에서도 몸소 병치료를 위한 수소문을 하시고 양덕온천이 좋다는데 가서 병을 고치라고, 정숙동무랑 같이 가라고 이르시며 그의 등을 떠밀어주신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드디여 황순희동지의 첫아기가 태여나게 되였을 때에는 김정숙동지에게 류경수동무가 철도경비대를 강화하느라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수고하는데 우리가 돌봐주어야 하겠다고, 아이가 태여나면 남부럽지 않게 제일 좋은 천으로 옷과 포단을 해주어야겠다고 당부하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 손수 한뜸두뜸 정성다해 만든 포단을 안겨주시며 딸을 낳겠는지, 아들을 낳겠는지 몰라 량면을 다 겉이 되게 만들었는데 딸이니 분홍색을 겉으로 하라고 다정히 이르실 때 황순희동지는 그이의 품에 와락 안기며 참고참았던 오열을 터치였다.

일찌기 부모를 잃고 고아의 설음이 가득찼던 황순희동지의 가슴속에 육친의 따뜻한 정을 부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과 김정숙동지의 그 마음으로 로투사를 극진히 보살펴주신분이 위대한 장군님이시였다.

때없이 귀한 약재와 산꿀도 보내주시고 몇차례나 외국에서 치료도 받게 하여주시며 황순희동지의 건강을 위해 우리 장군님께서 기울이신 진정은 끝이 없었으니 정녕 그는 백두산절세위인들과 뗄래야 뗄수 없는 혈연의 정을 맺고 산 참으로 행복한 전사였다.

주체79(1990)년 6월에 진행된 전국경공업대회의 토론자들속에는 황순희동지도 있었다.

종주먹을 쥐고 《유격대행진곡》을 힘차게 불러 온 대회장에 백두의 숨결이 고동치게 하는 녀투사의 기백과 정신세계에 대회참가자들 누구나 감동을 금치 못하였다.

경공업부문의 일군도 아닌 황순희동지가 이 연단에 나서게 된데도 위대한 장군님의 사려깊은 은정이 깃들어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황순희동지가 전국경공업대회에서 토론하도록 한 일군에게 과업을 주시던 날 그는 작년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딸을 잃었다고, 자신께서도 가슴이 아픈데 어머니인 그로서는 얼마나 가슴이 터지겠는가고, 그래서 황순희동지가 빨리 마음속상처를 가시고 만난을 이겨내며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억세게 싸우던 그 정신으로 사업해나가도록 하려는것이라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10여년전 어느 한 대회에 참가한 황순희동지는 참가자들과 함께 금수산기념궁전(당시)광장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그 사진을 보아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즉시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을 부르시였다.

이 사진에서 무엇이 잘못되였는지 모르겠는가고 격하신 어조로 물으시는 위대한 장군님께 일군은 선뜻 대답을 드리지 못하였다.

이어 위대한 장군님의 노하신 음성이 쩡쩡 울리였다.

어쩌면 황순희어머니를 맨끝에 모실수 있는가, 그가 얼마나 섭섭해하였겠는가고 하실 때에야 일군은 비로소 관직에 따라 일률적으로 좌석을 배치한 실책을 깨달았다.일군은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대로 곧 황순희동지를 찾아가 사죄를 하였다.

혁명의 전렬에!

우리 장군님의 마음속에 황순희동지는 언제나 이렇게 자리잡고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빨찌산군복을 벗지 않고 백두의 행군길을 달리는 투사로 시대앞에 높이 내세워주고싶으시여 년로한 그가 조선혁명박물관 관장의 중책을 계속 맡아보도록 하여주신 우리 장군님이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당의 신임에 보답하기 위해 불편한 몸으로 아글타글 애쓰고있는 황순희동지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였을 때에는 귀중한 설비들도 보내주시고 그가 조선혁명박물관사업과 관련하여 제기하는 문제들을 다 풀어주도록 하시였다.

은혜로운 그 품속에서 고령에 이르도록 혁명가의 넋과 열정을 이어온 황순희동지였기에 산천초목도 비분에 떨던 피눈물의 12월 그 누구보다 크나큰 상실의 아픔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로투사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항일혁명투사 황순희동지는 위대한 장군님과 연고관계가 제일 깊은분이라고, 때문에 위대한 장군님을 뜻밖에 잃은 슬픔이 누구보다도 클것이라고, 고령의 할머니가 이 슬픔을 이겨내겠는지 근심된다고 하시면서 그는 늘 지난 기간에 위대한 장군님을 뵙고싶어했는데 그의 소원을 풀어주고 슬픔을 덜어주어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금수산기념궁전(당시)에 생전의 모습으로 계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령구를 찾은 황순희동지는 비통함을 누를길 없어 삼륜차를 두드리며 몸부림쳤다.

눈덮인 백두밀림에서 탄생하신 그날로부터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으신 우리 장군님, 끊을래야 끊을수 없는 정을 가슴이 넘치도록 안겨주시고 너무도 뜻밖에 곁을 떠나신 장군님을 목메여 부르며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였다.

그날의 광경에 대한 보고를 들으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황순희관장이 장군님을 그리워하는 감정은 끝이 없을것입니다.무슨 수로 그 감정을 달랠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시며 그가 위대한 장군님을 다시 뵈올수 있도록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들의 사랑을 생의 젖줄기로 간직해온 황순희동지였다.꿈결에서조차 떠난적 없는 자애로운 그 손길이 오늘도 자기를 보살펴주고있다는 생각, 은혜로운 태양의 빛발이 있어 위대한 수령님들과 맺은 혈연의 정은 끝없이 이어지리라는 확신으로 불타는 투사의 가슴속에서는 이런 절절한 웨침이 터져나왔다.

어버이 그 품 떠나 저는 못삽니다!

 

영생의 삶이 새겨주는 진리

 

쓰다가는 다시 옮겨쓰고 또 몇글자 쓰다가는 새 종이를 찾고…

이렇게 신고하기를 벌써 며칠째였다.

경애하는 원수님께 삼가 올리는 편지인데 아무리 애써도 글획이 자꾸만 삐뚤어지는것이 안타까왔다.이제는 아흔고개를 넘긴데다가 산에서 싸울 때 언 손이 도무지 마음처럼 놀지 않았다.

그래도 경애하는 원수님께 자기의 심정을 아뢰이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는 충동으로 하여 황순희동지는 밤을 밝히며 한자한자에 심혼을 쏟았다. 위대한 수령님의 개선연설과도 같이 세상을 깜짝 놀래운 경애하는 원수님의 력사적인 연설을 접하고 내 나라의 창창한 미래를 확신하며 먼저 간 투사들과 마음속대화를 나누던 일도 아뢰였고 원수님을 조선혁명박물관에 꼭 모시고싶은 절절한 소망도 그대로 편지에 담았다.

그런데 그 소박한 편지에 우리 원수님께서 그토록 각별한 정이 넘치는 친필을 새겨주실줄 어찌 알았으랴.

《황순희동지에게!

할머니! 편지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몇번씩이나 읽어보았습니다.

믿어주시는데 어긋남없이 언제나 굳은 마음으로 수령님처럼, 장군님처럼 혁명의 길을 걸어나가겠습니다.

할머니!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항상 건강에 주의를 돌려주십시오.

항상 건강하시기를 바라면서

김정은 올립니다

2012년 6월 13일》

정녕 그 한자한자는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살붙이처럼 아끼시던 로투사에게 우리 원수님께서 그대로 이어주신 사랑의 혈맥이였고 주체혁명위업계승의 력사적전환기에 변함없이 충성의 길을 앞장에서 걷는 로전사에게 보내시는 뜨거운 경례였다.

가야 할 머나먼 앞길을 내다보시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심중에 백발의 황순희동지가 그리도 미덥게 안겨든것은 무엇때문이던가.삼륜차에 몸을 실은 체소한 로투사가 그냥 앉아만 있어도 우리 원수님께 큰 힘이 된것은 정녕 무엇때문이던가.

력사의 갈피에 새겨진 이야기가 있다.

수십년전 어느 한 회의장에서는 빨찌산의 피어린 력사를 모독하는 망발이 튀여나왔다.

이때 책상을 치며 일어선 황순희동지는 그 작은 손을 칼날처럼 휘두르며 장내가 쩡쩡 울리도록 추상같이 웨쳤다.

《똑똑히 알아두라! 우리 혁명의 전통이 어떻게 마련되였는가를.

항일의 불바다속에서 사령관동지를 충직하게 받들어온 김정숙동지와 같은 참된 혁명가들이 없었다면, 빨찌산의 그 정신이 없었다면 어떻게 우리 조국의 오늘을 생각할수 있겠는가!》

어중이떠중이들이 우리 당의 혁명전통에 오가잡탕을 끌어들이려고 음으로 양으로 책동할 때에도 우리의 혁명전통은 오직 위대한 수령님께서 마련하신 전통뿐이라는 절대불변의 원칙을 생명으로 삼고 조선혁명박물관을 명실공히 수령님의 혁명박물관으로 꾸리는데 자기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쳐온 황순희동지였다.

백두의 흰눈처럼 순결한 마음으로 위대한 수령님 한분만을 충직하게 받들어온 투사, 백두의 혈통을 지키고 우리 당의 조직사상적기초를 강화하는데서 혁명의 1세로서의 본분을 다해온 황순희동지였기에 늘 자손들에게 이렇게 이르군 하였다.

《사람은 의리가 있어야 한다.의리를 저버리면 짐승 한가지이니라.》

우리 조국이 력사에 류례없는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던 나날 황순희동지의 가슴속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생의 마지막시기에 김정일동지를 받들어나가는데서 항일혁명투사들이 누구보다 모범이 되여야 한다고 간곡히 당부하시던 그 음성이 자나깨나 메아리쳤다.

조국과 인민의 운명을 지키시려 쉬임없이 전선길을 이어가시는 위대한 장군님께 적은 힘이나마 보태드릴수 없을가 하고 고심하던 황순희동지는 강냉이농사를 지어 인민군대에 보내줄것을 결심하고 넓은 정원을 밭으로 일구었다.고령의 황순희동지로부터 집사람들모두가 새벽어둠이 들리기 시작하면 호미를 쥐고 그리로 나갔고 퇴근하면 불을 켜놓고서라도 밭일을 하는것이 생활화되였다.그렇게 이악하게 농사를 지어 많은 강냉이를 인민군대에 원호하였다.

황순희동지는 수령을 받드는데서 얼렁뚱땅, 어물어물하는 법을 몰랐다.어떤 문제를 처리해도 선이 명백하였고 당의 사상과 어긋나는 현상에 대해서는 칼날우에라도 올라설 기상으로 견결히 투쟁하였다.

그의 강한 원칙성과 투철한 신념, 담대한 배짱은 단순히 성격상기질에 기인된것이 아니였다.

몇해전 어느날 인민군지휘성원이 황순희동지를 찾아왔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황순희동지가 어느 한 료양소에서 치료를 받도록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면서 자신을 대신하여 내려가서 전달해주도록 하시였던것이다.

만나자바람으로 무작정 붙들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건강하신가고 다우쳐묻는 투사를 보며 인민군지휘성원은 가슴이 뭉클하였다.

더 큰 충격을 받은것은 황순희동지가 그 년세에 아직까지도 책을 읽고있는것이였다.다름아닌 위대한 수령님들의 로작이였다.

혁명가의 신념과 배짱은 수령을 잘 아는데서 생긴다. 수령의 뜻을 뼈속까지 체질화한 전사만이 수령과 피와 정이 통할수 있고 어떤 환경속에서도 충성의 한길을 꿋꿋이 걸어갈수 있는것이다.

조선혁명박물관증축공사가 빨리 진척되지 못하는것을 두고 황순희동지는 늘 죄책감에 모대겼다.

《우리 수령님께서 나에게 주신 과업인데, 우리 장군님께서 조선혁명박물관증축공사는 황순희관장이 살아있을 때 끝내야 한다고 그토록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셨는데… 내가 죄를 짓고있어.》 하며 그는 어떻게 하나 박물관증축공사를 앞당기기 위해 삼륜차를 탄 몸으로 낮이나 밤이나 심혈을 기울이였다.

드디여 개관식을 하게 되였을 때 침상에 누워있던 황순희동지는 늦게나마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 도리를 지키게 되였다며 더없이 기뻐했다.

총대처럼 변함을 모르는 빨찌산정신으로 생을 빛내여가는 항일의 로투사들에게 베푸신 경애하는 원수님의 사랑과 정은 우리 혁명사의 갈피갈피를 뜨겁게 수놓고있다.

주체104(2015)년 7월 어느날이였다.

제4차 전국로병대회에 참석하시기 위하여 주석단대기실로 나오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황순희동지를 알아보시고 반색을 지으시며 따뜻이 안부를 물으시였다.그러시고는 자신의 손수건으로 황순희동지의 두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수 닦아주시면서 오늘 대회가 오래 계속될수도 있는데 할머니의 건강상태가 어떤지 근심된다고 말씀하시였다.

대회가 한창 진행될 때였다.

황순희동지가 갑자기 몸이 불편해하는것을 헤아려보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주저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시여 한쪽무릎을 바닥에 대시고 그가 탄 삼륜차를 얼싸안으신채 그의 신고를 덜어드리려 애쓰시였다.

력사상 있어본적 없는 눈물겨운 화폭이 펼쳐진 그 시각 황순희동지는 위대한 수령님들과 꼭같으신 경애하는 원수님의 열화같은 인간애에 깊이 머리숙어짐을 금할수 없었다.

력사적인 당 제7차대회를 앞둔 어느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어느 한 병원의 일군을 전화로 찾으시였다.

병원에 입원한 황순희동지의 건강상태를 알아보신 그이께서는 한시간만이라도 앉아계실수 없겠는가고 안타까운 어조로 다시금 물으시였다.

한시간만이라도!

바로 이것이 우리 원수님의 심정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 그토록 아끼시던 로투사를 영광의 대회장에 잠시라도 앉혀주고싶으신 그 마음, 그렇듯 뜨거운 사랑이 깃든 한시간, 한시간이 합쳐져 남달리 병약했던 황순희동지가 백살의 기적적인 생을 이어온것이 아니던가.

지난 1월 17일 황순희동지의 심장이 고동을 멈추었다는 비보를 받으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못내 가슴아파하시며 장례를 국장으로 하도록 하여주시고 몸소 그의 령구를 찾으시였다.

10대의 나이에 혁명의 길에 나선 때로부터 세대가 몇번이나 바뀐 기나긴 세월 위대한 태양의 품속에서 여한이 없는 한생을 살아온 투사였건만 못다 주신 사랑이 있으신듯 애석함을 금치 못하시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영상을 우러르며 온 나라 인민은 혁명전사들에 대한 그이의 숭고한 도덕의리심에 눈굽을 적시였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정녕 그것은 절세위인들을 대를 이어 높이 모신 이 땅의 혁명전사들만이 받아안을수 있는 특전이며 태양의 빛발따라 이 세상 끝까지 가고갈 맹세로 온넋을 불태워온 충신들에게 안겨지는 가장 값높은 영광인것이다.

황순희동지의 생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투사의 심장은 오늘도 쉬임없이 고동치며 우리에게 소리높이 웨친다.

은혜로운 태양의 품에 안긴 혁명전사의 삶은 영원하다고, 그 품에 운명의 피줄을 잇고 변함없이, 끝까지 충성의 한길을 가고가라고.

본사기자 김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