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6월 27일 로동신문
실력가형의 일군들을 키운
조국청사에 그 이름 긍지높이 새겨진 충신들은 누구나
《영광스러운 우리 혁명의 력사는 동지애의 력사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숭고한 혁명적의리의 절정에서 영생의 모습으로 빛나는 충신들의 값높은 삶을 통하여 사람들은
인간이 오를수 있는 영광과 행복의 절정은 조국과 인민의 사랑속에 충신, 애국자로 영생하는것이다.이런 남다른 영광과 행복은 바란다고 하여 절로 지니게 되는것이 아니다.오로지
높은 실력으로 당과 혁명을 위해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친 정준택동지의 한생이 새겨주는 고귀한 철리가 있다. 그는 해방전 여기저기 방황하면서 선광기사로 일하던 식민지지식인이였다.
해방된 조국에서 그를 만나주시고 조국과 인민을 위해 힘껏 일해보자고 하신 그날로부터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산업국장, 북조선인민위원회 계획국장, 국가계획위원회 초대위원장으로 거듭 중책을 맡겨주신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 불건전한자들이 어떻게 하나 그를 배척하고 당의 품에서 떼여내려고 음으로 양으로 책동할 때에도
건국의 나날 우리 일군들은 언제나 민족적자존심과 자신심을 가지고 대담하게 일을 전개해나가야 한다고 하시며 혁명가적일본새와 사업기풍을 배워주시였으며 조국이 준엄한 시련을 겪던 시기에는 전후 인민경제복구발전계획을 작성할데 대한 과업을 맡겨주신
다심한 그 사랑속에 성장의 보폭을 크게 내짚으며 맹활약한 정준택동지였다.나라의 경제사업을 당과 인민앞에 책임진 일군으로서 그는
1960년대 중엽의 어느해 정초였다.모든 예비를 남김없이 찾아내여 더 많이 증산할데 대한
수자로 타산하고 수자로 총화짓고…
한생의 대부분을 수자와 함께 보낸 정준택동지였다.나라살림살이를 해나가는 과정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정준택동지는 우리 나라 공장, 기업소치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그는 전국의 모든 공장, 기업소들을 손금보듯 장악하고 늘 현지에 내려가있으면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이런 그의 충실성을 뜨겁게 회억하시며
《그전에 정준택동무는 국가계획위원장을 할 때 늘 공장, 기업소들에 내려가 살면서 실태를 알아보고 걸린 문제를 제때에 풀어주군 하였습니다.그가 자주 공장, 기업소들에 내려갔기때문에 내가 길에서 그를 만나는 때가 많았습니다.》
주체62(1973)년 1월초 정준택동지는
그토록 밤낮 분투하던 그는 1월 11일 뜻밖에 심장의 고동을 멈추었다.
사랑하는 전사를 잃으신
잠든듯이 누워있는 그를 이윽토록 굽어보시다가 손수 사랑하는 전사의 가슴에 금별메달을 달아주시고 메달이 가슴한복판에 놓이도록 바로잡아주신
뜨거운 사랑에 목메여 흐느끼는 유가족들에게
그 숭고한 사랑과 의리로 하여 정준택동지의 한생은 당과
자산계급출신의 오랜 지식인이였던 강영창동지의 한생도 그런 값높은 영광과 불타는 헌신의 한생이였다.
새 조국건설에 이바지하려는 그의 애국충정을 귀중히 여기시여 나라의 중요철생산기지의 기사장의 중임을 맡겨주시고 친히 사람까지 보내시여 그의 가족들을 무사히 데려오게 하는 은정깊은 사랑을 베풀어주신
그로부터 얼마후 그가 일하는 공장을 찾으시였을 때 마중나온 사람들속에서 강영창동지를 알아보신
이날 그의 안내를 받으시며 공장의 생산공정들을 돌아보신
강영창동지는 우리 로동계급의 생명과 안전을 가장 귀중히 여기시는
그후 그는 원철로에서 나오는 철이 없이도 제강할수 있는 새로운 제강법연구에 달라붙었다. 순탄한 길이 아니였다.반동들과 결탁한 종파사대주의자들은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그를 모해하면서 내쫓으려고 날뛰였다.
이러한 때에 강영창동지에게 변함없는 믿음과 사랑을 안겨주신분은
나라의 어려운 사정을 툭 털어놓으시고 강선의 로동계급이 강재를 더 생산하여야 우리 손으로 집을 짓고 공장도 복구할수 있으며 나라가 허리를 펼수 있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오직 혁명의 주력부대인 당신들, 로동계급을 믿는다고 절절히 호소하신
그날 밤
참으로 간고한 시련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신심을 잃지 않았다, 이 준엄한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면서 국경지대를 향하여 계속 걸음을 다그쳤다.… 강영창동지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금할수 없었다.아름찬 과제를 두고 걱정을 앞세우는 자기를 위해 생산현장에 함께 데리고나가 로동계급의 신념과 힘을 체험하게 하시고 돌아오시는 길에는 이처럼 우리 혁명이 겪은 력사적사실로 힘과 용기를 안겨주시는 한량없는 헤아리심에 뜨거운 눈물을 흘린 강영창동지였다.
그
언제인가 5.1절전으로 어느 한 제철소의 용광로를 복구할데 대한 문제가 제기되였을 때였다.종파분자들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며 방해하였다.
이때 강영창동지는 5.1절까지 용광로를 일떠세우라는것은
머나먼 현지지도의 길에 그를 데리고다니시며 나라의 금속공업발전과 관련하여 많은 의견을 나누시고 나라의 과학기술을 빨리 발전시키는 문제를 토의하시였으며 그가 사업에서 애로를 느낄세라 앞질러가며 풀어주신
과학원(당시) 원장으로 헌신분투하던 그가 심장마비로 뜻밖에 세상을 떠난 주체54(1965)년 8월 어느날이였다.
머나먼 현지지도의 길에서 강영창동지의 서거에 대한 비보를 받으신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시기 군수품생산을 맡아하던 강영창동지가 적들의 모략이 깔려있는 가짜편지를 받고 번민하고있을 때 당과 혁명에 대한 그의 충실성과 깨끗한 량심을 믿으시고 가짜편지를 불태워버리게 하고 그를 만나시여 우리는 동무를 믿기때문에 상관없다고 하시며 종전대로 일을 계속하도록 하신 사실도 가슴아프게 더듬어보신
그 숭고한 사랑과 의리에 접하여 유가족들은 더는 참지 못하고 오열을 터치였다.
그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언제인가 함흥시 대학교원들앞에서 연설하실 때에도
《나는 지금도 늘 강영창동무에 대하여 회상하는데 그는 당과 인민에게 무한히 충실한 사람이였습니다.강영창동무는 생활을 아주 검박하게 하였으며 당과 인민을 위하여 한가지 일이라도 더 잘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그렇기때문에 나는 그를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17년세월이 흐른 후 기계공업부문 책임일군협의회에서도
《내가 강영창동무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하는것은 그가 나의 의도를 잘 알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기때문입니다.그는 내가 무슨 문제를 제기하면 적극 지지하였으며 그것을 관철하기 위하여 이악하게 노력하였습니다.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을 처음으로 발기하였을 때에도 제일먼저 지지한 사람은 강영창동무였습니다.》
참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야 할 혁명의 길에서 생사운명을 같이할 수천수만의 일군들을 사랑과 믿음의 한품에 안아 우리 당의 훌륭한 동지로 키워주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품에 안겨 태양송가를 격조높이 불렀던가.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주체66(1977)년 12월 어느날이였다.리종옥동지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바로 그날 진행된 최고인민회의 제6기 제1차회의에서 당의 높은 신임에 의하여 정무원총리(당시)의 중책을 맡게 되였던것이다. 경제를 기관차에 비유한다면 그 조종간을 틀어쥔 총리,
이렇듯 어렵고도 중요한 임무를 맡겨주신
절세위인들에 대한 고마움에 이어 밀려드는 걱정, 위구심으로 하여 뒤척이는 밤이였다.
이러한 때 전화종소리가 들려왔다.무심히 송수화기를 들던 그는 후닥닥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그처럼 뵈옵고싶던
총리동지가 무거운 책임을 맡고 수고가 많겠다고 하신
중임을 맡아안고 잠 못들 전사가 걱정되시여 자정이 넘은 깊은 밤 전화를 걸어 신심과 용기를 안겨주시고 방향과 방도를 가르쳐주시는
민족수난의 시기 함경북도의 척박하고 외진 산골에서 태여난 그는 신동으로 동네방네 소문난데다가 배움에 대한 욕망이 불길처럼 타올랐지만 가난이 원쑤라고 밥술이나 뜨는 집 아이들이 학교로 갈 때 부모들을 따라 호미를 들고 비탈밭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였다.이국땅을 방황하며 청운의 뜻을 이루어보려고 고생은 또 얼마나 하였던가.…
이러한 그였기에 리종옥동지에 대한
대소한의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해 1월이였다.
사계절의 영향을 많이 받고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한 서해기슭에 부두나 항구의 위치를 잘못 정하면 막대한 투자를 하고도 제대로 운영할수 없게 된다.
이를 일러주시면서
《경제일군들은 무엇을 하나 설계하거나 건설하여도 당면한 문제와 전망적인 문제를 잘 타산하여야 합니다.특히 당면한 문제를 전망적인 문제에 복종시키는 원칙에서 일을 전개해야 합니다.》
력사적인 지방당 및 경제일군창성련석회의를 앞둔 때에도 그를 만나시여 앞으로 모든 시, 군들에서 10개이상의 지방산업공장들을 돌리게 하자면 전력이 걸릴것 같다고, 그러므로 국가적으로 전력균형을 맞추기 위한 대책을 예견성있게 세워야 한다고 일깨워주신
그를 참다운 애국자로, 나라의 재부를 늘이고 인민의 행복을 창조하는 진짜배기실력가로 키워주시려 50대에 인민경제대학에 보내주신분도
사회가 발전하고 경제건설이 진척될수록 계산과 통계가 가지는 의의를 천리혜안으로 내다보신
그때부터 리종옥동지는 경제건설전반을 조직지휘하는 바쁜 속에서도 자기의 실무적자질을 높이기 위한 학습을 직심스레 하였다.늦은 밤에도 수자들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그의 피타는 노력은 계속되였다.순간도 자만없이, 백날천날을 하루같이. 이렇게 되여 그는 80이 훨씬 넘은 고령에 이르도록 젊은 축들도 부러워하는 뛰여난 계산능력과 기억력을 지니고 경제건설전반을 이끌어나가는 실력가로 존경받게 되였던것이다. 나라의 경제사업을 맡아보는 전기간 언제나 땀에 젖은 《기관사》가 되여 정열적으로 투신한 리종옥동지,
근 60년간을 당과
한 일군을 급히 평양으로 떠나보내시며
그가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되는 해 함경남도 검덕지구의 광산들을 현지지도하실 때에도
혁명전사들에게 육친의 뜨거운 사랑과 정을 기울여 불굴의 혁명가로 키우시였으며 그들에게 죽어서도 영생하는 고귀한 삶을 안겨주신
은혜로운 태양의 품에 안긴 전사의 삶은 영원하다는 성스러운 조선혁명사의 진리를 만사람의 가슴에 새겨주며
본사기자 량 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