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7월 21일 로동신문

 

인민들속에서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으로

김금산

 

전후 자그마한 농기계공장으로 발족한 우리 공장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발기와 지도에 의하여 오늘은 대규모적인 뜨락또르공장으로 발전하였다.

몇년전만 하여도 인력탈곡기와 축력제초기 등 중소농기계들을 소규모적으로 만들고있던 우리 공장에 오늘은 1년에 수천대의 뜨락또르를 생산할수 있는 고성능특수기계들과 현대적인 전문설비들이 갖추어졌으며 뜨락또르의 주요한 생산공정이 자동화, 반자동화되였다.

이리하여 지금에 와서는 75hp대형무한궤도뜨락또르까지 척척 만들어내게 되였다.

나는 이처럼 변모된 우리 공장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전후시기에만 하여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여러차례나 찾아오시여 우리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공장의 발전전망을 밝혀주시던 일을 감회깊이 돌이켜보게 된다.

특히 그이께서 안겨주신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을 간직하고 우리의 기술, 우리의 자재, 우리의 힘으로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처음으로 뜨락또르를 생산하던 때를 영원히 잊을수 없다.

우리가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받들고 첫 뜨락또르생산에 궐기한것은 1958년 10월이였다.

당시 사회주의협동화가 완성된 우리 나라 농촌에서는 농촌경리의 기술적개조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과업이 나서고있었다.

특히 농촌에서 로력이 가장 많이 드는 운반작업과 밭갈이작업을 기계화하기 위하여 뜨락또르와 같은 선진농기계의 대수를 늘일것을 그 어느때보다도 절실히 요구하고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하여도 우리는 강냉이탈곡기와 같은 중소농기계들을 만들어내는데 불과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우리 공장에 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뜨락또르를 만들데 대한 영예롭고도 무거운 임무를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와 자리를 같이하시고 당시 나라의 형편과 앞날의 전망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여주시면서 뜨락또르생산의 필요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여주시였다.

《우리는 이미 농촌에서 사회주의협동화를 완성하였지만 아직도 농업은 급속히 발전하는 공업에 비하여 기술적으로 멀리 뒤떨어져있습니다.우리는 앞으로 농촌에 뜨락또르를 비롯한 현대적농기계를 많이 만들어보내줌으로써 모든 농사일을 기계로 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농촌에 뜨락또르를 많이 만들어 보내주면 농민들을 어렵고 힘든 로동에서 해방할수 있습니다.

지금 농촌에서 농민들이 운반작업을 대부분 등짐으로 하고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농촌에서 락후한 영농방법을 퇴치하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일로부터 제초, 추수, 탈곡에 이르는 모든 영농작업과 운반작업을 뜨락또르로 하게 하려고 합니다.그렇게 되면 우리 농민들이 농사일을 헐하고 흥겹게 하게 될것입니다.

우리가 농촌에 뜨락또르를 많이 보내주자면 자체의 힘으로 뜨락또르를 생산하여야 합니다.자체의 힘으로 뜨락또르를 생산하여야 농촌기술혁명을 성과적으로 수행할수 있으며 외화도 많이 절약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서 뜨락또르를 한해에 3, 000대씩 수입하는것으로 보아도 3만대를 수입하자면 10년은 걸려야 하는데 그동안 처음에 수입한 뜨락또르가 못쓰게 된다는것을 고려하면 10년이 걸려도 농촌경리의 기계화에 필요한 뜨락또르를 보장하기 곤난합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듣고있던 우리들은 나라의 형편이 뜨락또르를 절실히 요구하고 당이 그 길을 가리킨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자체로 뜨락또르를 생산하고야말겠다는 결의를 굳게 다졌다.

믿음에 찬 시선으로 우리를 둘러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제것이 있어야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수 있습니다.우리가 뜨락또르를 제힘으로 만들어야 기술도 발전하지 남의것을 사다쓰기만 하면 우리의 기술을 발전시킬수 없습니다.》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뜨락또르를 만든다는것은 우리 나라 기술혁명에서 큰 발전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와 헤여지면서 확신에 찬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나는 동무들을 믿습니다.나는 동무들이 당이 제시한 뜨락또르를 생산할데 대한 영예로운 과업을 반드시 성과적으로 수행하리라는것을 확신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다녀가신 후 우리들은 그이께서 주신 영예로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회의실에 모여앉았다.

많은 동무들이 서로 앞을 다투며 연단으로 뛰여나가 기어코 자체의 힘으로 뜨락또르시제품을 생산하려는 결의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모든 동무들이 다 그렇게 토론한것은 아니였다.

기술신비주의와 보수주의에 사로잡힌 일부 사람들은 뜨락또르를 생산하겠다는 열의는 좋으나 좀 기술적으로 타산해보고 토론하는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선진국가에서 도면만 그리는데 6개월이상 걸리는데 도면은 언제 그리고 부속품은 언제 깎아서 뜨락또르를 한두달내에 만든다는것인가고 반대하여나섰다.

물론 뜨락또르를 자체의 힘으로 생산한다는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며 또 우리에게는 거기에 필요한 조건이 갖추어져있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보수주의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것처럼 뜨락또르를 만들수 있는 모든 조건이 조성될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수는 없었다.

우리들은 보수주의와 신비주의를 짓부시기 위하여 뜨락또르시제품생산반을 조직하였고 그 이튿날에는 현장에서 공개당세포총회를 가지였다.

회의에서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가슴에 아로새기며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을 발휘하여 뜨락또르부속품을 부분별로 분공하여 가공한다면 능히 만들수 있다는 결론을 짓고 첫 시제품생산에 착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뜨락또르생산에서 제일 곤난한것은 한장의 설계도면도 가지고있지 못한것이였다.

우리는 뜨락또르를 분해해놓고 부속품의 도면을 하나하나 그리였으며 그것을 보면서 부속품을 깎기 시작하였다.

고도의 정밀도를 요구하는 작업이여서 어떤 때는 한개의 부속을 깎는데 몇번씩 실패하군 하였다.

우리가 뜨락또르생산에 착수하려고 할 때에 우리의 전진을 방해하여나선것은 비단 보수주의자들만이 아니였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의 공업발전수준이 뒤떨어지고 기술이 락후하기때문에 뜨락또르생산은 이르다느니, 조금씩 만들어서는 수지가 맞지 않으니 뜨락또르를 수입해다 쓰는것이 낫다고 하면서 우리를 비방하였다.

우리들은 조선로동계급의 혁명적열의와 창조력을 믿으려 하지 않는 이러한 주장을 용납할수 없었다.

우리는 오랜 기간 식민지통치밑에서 가대기를 끌며 농사짓던 농민들의 어깨에 굳어진 피의 멍울을 하루속히 벗겨주시려는 어버이수령님의 위대한 구상을 반드시 실현해야만 하였다.

우리는 먹는것도 잠자는것도 잊어버리고 뜨락또르생산에 온갖 힘과 정열을 쏟아부었다.

2, 000여종의 부속품이 있어야 하는 뜨락또르를 자기 규격에도 맞지 않는 소재를 써가면서 생산한다는것은 실로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우리는 뒤바퀴의 차륜을 프레스로 만든것이 아니라 강판을 주어모아 용접하고 찌그러진 부분을 산소화기에 달구면서 두드려서 그 형태를 만들었다.

의례히 연강판으로 프레스가공하여야 할 반사경케스도 우리는 망치로 두드려가며 36회나 실패를 거듭하였지만 끝내 만들어내고야말았다.

그러니 복잡한 기관본체와 변속함본체를 가공하던 때며 섬세한 기술을 요구하는 유압장치를 가공하던 때의 이야기를 더 해서 무엇하겠는가.

우리는 뜨락또르의 조립을 마치고 가슴을 조이며 첫 발동을 걸어보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좀처럼 발동이 걸리지 않았다.

1주일간의 악전고투끝에 유압계통의 결함을 퇴치하고 우리는 다시 발동을 걸었다.

이번에는 발동이 걸렸다.교체기구를 전진상태에 넣고 발디디개를 힘껏 밟았다.

그런데 뜨락또르는 앞으로 가는것이 아니라 뒤걸음을 치는것이였다.

발동도 더는 걸리지 않았다.

첫 뜨락또르의 완성품을 내놓겠다고 당앞에 맹세한 시간은 다가오고있었다.우리의 가슴은 타는듯 하였다.

뜨락또르를 몽땅 뜯어놓고 아무리 살펴보아도 정확한 설계도면이 없는탓으로 어느 부속이 제대로 안되였는지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이런 때에 우리에게 완성된 단 한조의 뜨락또르조립도면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우리에게는 안타깝게도 그것이 없었다.

뜨락또르를 해체해놓은 부속품무지곁에 앉아있던 한 로동자가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여있었고 입술은 떨리고있었다.

《동무들, 열백번을 다시 깎고 백천번을 뜯었다 맞추는 한이 있어도 우리 힘으로 끝까지 해냅시다.

맨손으로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항일유격대원들이 연길폭탄을 만든것처럼 우리도 자체의 힘으로 끝까지 해내여 슬기롭고 용감한 조선사람의 본때를 보여줍시다.

우리 인민이 다시는 뒤떨어진탓으로 남한테 천대와 멸시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기어코 뜨락또르를 우리의 힘으로 완성합시다.》

우리는 이를 악물고 또다시 망치와 스파나를 틀어쥐고 일떠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신 과업이라면 목숨까지라도 바쳐 그것을 끝까지 수행하고야말겠다는 열의에 충만된 우리들은 30여일간에 걸치는 악전고투끝에 드디여 뜨락또르제작을 완성하고야말았다.

우리의 첫 《무쇠황소》-《천리마》호뜨락또르가 영각을 울리며 공장구내에 나섰을 때 우리 공장 전체 종업원들은 물론 주변협동농장원들과 정무원들 그리고 학생들까지 달려와 뜨락또르를 둘러싸고 감격과 흥분에 싸여 춤을 추며 기뻐하였다.

우리는 뜨락또르생산에서 지친 피곤도 잊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평양을 향하여 뜨락또르를 몰고 달렸다.

우리가 뜨락또르의 발동기소리를 요란히 울리며 청산리벌을 지나고있을 때였다.

관개공사에 여념이 없던 농민들은 질통을 진채 길가에 달려나왔고 가을갈이하던 농민들은 보탑을 놓고 길가에 달려나왔다.

《동무들, 수고했습니다.당신들이 뜨락또르를 만들어 우리 농민들의 뼈에 사무친 소원을 풀어주게 되였으니 정말 고맙습니다.》

《아닙니다.우리에게 고맙다고 할것이 아니라 뜨락또르를 만들게 하여주신 김일성수상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나는 농민들에게 이 한마디 말밖에 하지 못하였다.

하고싶은 말은 가슴에 차고넘쳤으나 이 감격적인 순간에 내가 무슨 말을 더 할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 짤막한 대답의 참뜻을 잘 알고있는 농민들은 소리높이 웨치는것이였다.

김일성동지 만세!》

《조선로동당 만세!》

사실 우리 나라에서 뜨락또르생산의 력사는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원래 우리 공장으로 말하면 광복전에는 자그마한 화학공장이였다.

이 공장마저 미제가 도발한 전쟁에 의하여 말그대로 재더미로 되고말았었다.

망치 한자루, 기계부속 하나 남지 않고 모조리 불에 타버렸고 공장터전은 잡초가 무성하여 기초도 알아보기 어렵게 되였었다.

조국해방전쟁의 포화가 멎은 후 우리 공장 로동자들이 공장을 복구하려고 서두르며 폭격에 흩어진 기계부속을 메여오고 달구지에 파고철을 실어들이고있을 때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들을 찾아오시여 기둥 하나 남지 않고 파괴된 공장의 실태를 료해하신 후 조국의 먼 앞날을 내다보시며 다시 화학공장으로 복구할것이 아니라 새로운 농기계공장을 건설하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때부터 여기에는 그이의 구상에 의하여 장차 협동화된 우리 농촌에 뜨락또르를 비롯한 선진적인 농기계를 생산공급할수 있는 새로운 농기계의 생산기지가 뿌리박고 일떠서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우리 공장에서는 야장간을 지어놓고 낫과 호미를 만들어 농촌에 보내주었다.

그러던 우리 공장이 매해 그이의 지도를 받으면서 인력농기계로부터 축력농기계로, 축력농기계로부터 동력농기계로 한걸음씩 전진하여나갔다.

이처럼 그이께서 어렵던 전후시기부터 내외의 원쑤들의 온갖 방해책동을 물리치고 새로운 농기계공업을 창설할데 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뜨락또르생산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것이다.

세월을 주름잡으며 달려온 조국의 력사와 뜨락또르를 생산하던 격동적인 나날을 생각할수록 나는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감사의 정을 금할수 없었다.

우리의 뜨락또르는 어느덧 평양에 이르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면서 우리들의 손을 굳게 잡아주시였다.그이앞에서 우리는 뜨락또르발동을 걸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뜨락또르를 바라보시였다.

그리고 우리 공장 기사장동무의 어깨를 두드려주시며 기쁨에 찬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됐소, 수고했소.정말 수고했소.신비주의란 없소.》

《수상님! 수상님의 요구라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다할수 있습니다.》라고 기사장동무가 확신에 찬 대답을 올리자 그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의 호소를 높이 받들고 기술에 대한 신비주의와 보수주의를 짓부셔버리고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처음으로 뜨락또르를 만들어낸 …공장 로동자, 기술자, 사무원들에게 당중앙위원회와 내각의 이름으로 감사를 줍니다.》

다시 뜨락또르주위를 돌아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제는 1년에 3, 000대이상의 뜨락또르를 생산하여 농촌에 보내주어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공장으로 돌아온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신 보람차고 영예로운 과업을 실천하기 위하여 일떠섰다.

우리는 기술적준비기간도, 시험생산기간도 그리고 점차적인 장성의 계단도 뛰여넘어 단꺼번에 한대의 시제품생산으로부터 1년에 3, 000대를 생산하는 비약의 길을 줄달음쳐나아갔다.

우리는 《62축볼반》과 《35축다쁘치기》 등을 비롯한 각종 창의고안운동을 전개하여 자체로 기술장비를 갖추어나아갔다.

그리하여 우리는 첫 시제품을 생산한 때로부터 불과 5년이 지난 오늘까지 벌써 근 2만대(15hp으로 환산)의 뜨락또르를 생산하였다.

지금 우리 손으로 만든 《천리마》호뜨락또르는 조국의 전야를 줄기차게 끊임없이 달리며 농장원들의 고된 로동을 대신해주고있다.

《천리마》호뜨락또르가 논밭을 가는것을 보고 할아버지들이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좋은 세상에 태여나 백년을 살아도 등이 굽지 않겠구나.…》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것이 어찌 열두삼천리벌에서만 있은 이야기겠는가.

고된 로동에서 해방되려는 이 나라 농민들의 력사적숙망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령도하시는 우리 로동당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실현된것이다.

가물과 장마를 두려워하지 않는 농촌, 전등불 휘황한 우리 농촌에서 뜨락또르와 화물자동차를 비롯한 선진농기계들이 고된 로동을 흥겨운 일로 만들어주고있으니 흉년이 온 세상을 휩쓸어도 우리 나라에서만은 해마다 만풍년이 드는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7개년계획의 두번째 해인 1962년 계획을 빛나게 초과수행하고 1963년도 계획수행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섰을 때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또다시 우리 공장을 찾아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우리가 만든 75hp대형무한궤도뜨락또르를 보시고 매우 만족해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아주 잘 만들었소.이 공장은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에 의하여 발전하여온 훌륭한 뜨락또르공장이요.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서도 뜨락또르를 생산하자고 한것이 정말 옳았소.》

그러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농촌의 기계화에 있어서나 자연을 개조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대형무한궤도뜨락또르를 대량생산할데 대한 영예로운 과업을 또다시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현지지도가 있은 후 우리들은 공장의 기술장비를 더욱 완성하여 질좋은 뜨락또르를 대량생산하는 한편 대형뜨락또르의 대대적인 생산에 착수하였다.

우리들은 경애하는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사회주의농촌건설의 위대한 강령을 높이 받들고 농촌의 기계화를 더욱 촉진하기 위하여 지금 농민들에게 더 좋은 뜨락또르를 더 많이 보내주고있다.

앞으로도 우리는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을 계속 발휘하여 밭갈이능력이 높은 무한궤도뜨락또르와 최신형의 원격조종뜨락또르, 기중기와 삽 등을 장치한 만능뜨락또르 등 우리 나라 농촌현실에 적응한 성능좋은 선진적농기계들을 생산공급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할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