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7월 2일 로동신문

 

우리 당의 품속에서 영생하는 녀성혁명가

내각부총리였던 김락희동지의
한생에 어린 위대한 사랑과 믿음의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4년전 력사적인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의 높은 연단에서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총결기간 우리곁을 떠나간 혁명동지들을 추모하여 묵상할것을 만장에 엄숙히 제의하시였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 한명한명 그 이름을 부르신 열혈충신들은 우리 혁명의 승리와 조국의 부강발전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서 지울수 없는 공적을 남긴 항일혁명투사들과 애국렬사들, 잊지 못할 우리 당의 혁명전우들과 통일애국인사들이였다.

바로 그들가운데는 평범한 농사군출신으로서 한평생 쌀로써 당을 받들어온 김락희동지도 있었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인민들의 참된 삶과 후손만대의 영원한 행복은 오직 조국과 인민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조국과 인민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 헌신하는 수령에 의해서만 마련되고 꽃펴날수 있습니다.》

나라없던 그 세월 가난한 화전민의 딸로 태여나 한뉘를 천덕꾸러기로 시들번 한 김락희동지,

그러하였던 그가 은혜로운 태양의 품에 안겨 시대의 선구자로, 영웅으로, 나라의 농업전반을 책임진 지도일군으로 생의 자욱을 빛나게 아로새기였으니 김락희동지의 극적인 인생행로는 이 땅의 수천만 아들딸들을 어엿한 혁명가로 안아키워주신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위대한 사랑과 믿음을 전하는 또 하나의 감동깊은 서사시이다.

 

화전민의 딸이 나라의 영웅으로

 

경애하는 원수님을 혁명의 진두에 높이 모시고 새로운 주체100년대의 장엄한 진군길을 열어가던 첫 기슭에서 김락희동지는 누구나 쉽게 누릴수 없는 영광을 또다시 받아안게 되였다.

주체101(2012)년 2월, 뜻깊은 광명성절에 즈음하여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제정된 공화국의 최고훈장인 김정일훈장수훈자의 영예를 지니였던것이다.

위대한 장군님의 불멸의 존함을 모신 김정일훈장을 정중히 수여받던 그 시각 김락희동지의 가슴속에는 뜨거운 진정의 고백이 세차게 울리고있었다.

어버이수령님, 수령님께서 영웅메달을 안겨주신 저의 가슴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김일성훈장이 빛나도록 하여주시였고 오늘은 또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김정일훈장이 빛을 뿌리게 하여주시였습니다.세상에 이처럼 복받은 인생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위대한 수령님들의 슬하에서 인간으로서, 혁명가로서 지닐수 있는 온갖 영예를 다 지니고 복된 삶을 누려온 김락희동지가 80고개를 바라보는 인생말년에 또 한분의 절세위인의 품에 안겨 영광의 최절정에 올랐으니 가슴속에 끓어넘치는 감사의 정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수 있었으랴.

감격에 목메일수록 그의 뇌리에는 걸어온 인생길에 대한 추억이 끝없이 갈마들었다.

일제식민지통치의 암담하던 세월 개천땅의 궁벽한 산골마을에서 가난한 화전민가정의 둘째딸로 태여난 그 시각부터 김락희동지는 기구한 운명의 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생의 고고성을 터치자마자 구차한 살림과 봉건인습에 떠박질려 누데기에 싸인채 버림받았던 피덩이, 어느 선량한 로인이 숨이 멎어가는 갓난애기를 불쌍히 여겨 뜸술로 살려내지 않았던들 그대로 꺼지고말았을 천덕꾸러기의 운명이였다.

허나 간신히 건져낸 그 생명에게 차례진것이란 천대와 굶주림, 참기 어려운 고역뿐이였다.

그러하던 인생에 참다운 삶의 희열을 안겨준것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따사로운 사랑의 빛발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항일의 혈전만리를 헤치시여 찾아주신 해방조국에서 이 땅의 녀성들이 남자들과 꼭같이 당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무지렁이처럼 살아오던 농민들이 땅의 주인, 나라의 주인이 되여 《밭갈이노래》를 기쁨속에 부르는 꿈같은 세월속에 김락희동지도 해빛밝은 교정에 들어서게 되였고 난생처음 인생의 즐거움을 맛보게 되였다.

이 모든 행복을 안겨주신 위대한 은인께 삼가 고마움의 큰절을 올리고싶은 간절한 소망을 안고 살던 김락희동지에게 마침내 영광의 그 시각은 찾아오고야말았다.

주체41(1952)년 1월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이 한창이던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보위성전에 쌀로써 이바지해가는 애국농민들의 성대한 대회합을 마련하여주시였다.그 뜻깊은 자리에 전시식량증산투쟁에서 혁혁한 위훈을 세운 19살의 애어린 처녀 김락희동지도 있었다.

전국농민열성자대회에 참가한 그는 대회장의 높은 연단에 올라 토론까지 하게 되였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고향땅에 기여든 원쑤놈들의 야수적만행으로 참혹하게 학살당한 아버지의 유해를 보고 천백배의 복수를 다짐하던 일, 그후 《파종도 전선이다!》라는 전투적구호를 제시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높은 뜻을 받들고 남자들도 힘에 부쳐하는 보잡이에 솔선 나서 이악하게 투쟁한 결과 전례없는 풍작을 마련하고 햇벼 29가마니를 김일성장군님께 삼가 올린 사실…

나어린 처녀보잡이의 토론은 만장을 격동시켰다.

얼마후 대회휴식시간이였다.

한 일군으로부터 위대한 수령님께서 부르신다는 뜻밖의 소식에 접한 김락희동지의 가슴은 세차게 높뛰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나같은 농촌처녀를 불러주시다니?!

울렁거리는 마음을 걷잡지 못하고 휴계실로 달려갔을 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몸소 문가로 걸어나오시며 김락희동지를 맞아주시였다.

송구스러움에 몸둘바를 몰라하는 그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손이 다 텄다고, 어린 처녀가 농사를 짓느라고 정말 수고했다고 친어버이심정으로 말씀하시였다.

한없이 자애로우신 어버이수령님의 따뜻한 정에 끌려 김락희동지는 아버지가 놈들에게 희생된 사실이며 원쑤를 갚는 마음으로 손에 보탑을 잡던 때의 일을 무랍없이 말씀올리였다.

어린 나이에 불행을 당한 그의 마음속상처가 너무도 가슴저미시여, 그러나 주저앉지 않고 원쑤에 대한 적개심으로 피끓이며 강인하게 일떠선 그의 소행이 참으로 대견하시여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나어린 농촌처녀를 뜨거운 심정으로 여겨보시였다.그 어떤 곤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 인민의 불굴의 기개를 과시한 그가 더없이 기특하고 미더우시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무와 같은 용감한 동무들이 후방을 지키고있기때문에 우리는 전쟁에서 꼭 승리할수 있다고 확신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순간 김락희동지는 목이 꽉 메여올랐다.

어제날 천덕꾸러기로 살아온 그에게 참된 삶을 안겨주시고 오늘은 온 나라가 다 아는 처녀보잡이로 내세워주시며 분에 넘치는 영광을 거듭 안겨주시니 가슴속에 북받치는 행복감을 무엇에 비길수 있으랴.

불같은 보답의 일념안고 그해 가을에 례년에 없는 다수확을 또다시 안아온 김락희동지는 전쟁승리에 다소나마 이바지하고저 량곡 36가마니를 전선원호미로 바치였다.

그리고는 어버이수령님께 삼가 올리는 편지를 한자한자 정히 써나갔다.준엄한 전쟁시기에도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와 공화국정부의 은혜로운 혜택과 시책이 있기에 농사를 잘 짓게 되였다는 고마움의 인사와 함께 전쟁승리를 앞당기는데 기여하고싶어 여유량곡을 모두 전선원호미로 헌납한 사실을 편지에 담았다.

처녀보잡이가 올린 소박한 편지를 친히 보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의 소행을 높이 평가하시고 친히 감사문까지 보내주시였다.

《평안남도 개천군 개천면 중흥리

다수확농민 김락희동지에게

나는 당신이 금년도 농산사업에서 온갖 난관과 애로를 극복하고 많은 수확을 쟁취하였으며 특히 당신이 전선의 승리를 위하여 벼 36가마니를 전선원호미로 보내준데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는바입니다.

당신이 보내준 전선원호미는 우리 인민군무장력강화에 기여될것이며 우리의 인민군장병들에게 더 큰 고무가 될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앞으로도 다수확을 위한 영농사업에서 더욱 커다란 성과를 달성하리라는것을 확신합니다.

1952년 12월 4일

김 일 성

오로지 우리 당만을 변함없이 따르고 지지한 법동농민, 락원의 신포향과 같은 애국적인민의 대오속에 선 또 한명의 새세대농촌핵심, 미더운 처녀보잡이의 모습을 그려보시였을 우리 수령님의 그날의 심중은 얼마나 뜨거우셨으랴.

김락희동지를 마음속에 새겨두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그의 사업과 생활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며 성장의 자욱을 크게 내짚도록 사랑과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락희동지가 고향마을에 조직된 첫 농업협동조합의 관리위원장으로 일할 때에는 몸소 몸가까이에 불러주시여 당의 농업협동화방침을 이악하게 실천해가는 그를 격려해주시고 나아갈 방향과 방도를 세심히 가르쳐주시며 농촌선구자의 영예를 더욱 떨쳐가도록 따뜻이 이끌어주시였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 봄에는 미제를 쳐부신 영웅조선의 기상을 안고 외국방문의 길에 오르는 우리 나라 대표단의 유일한 농민대표, 녀성대표로 김락희동지를 내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주체47(1958)년, 사회주의농업협동화가 빛나게 실현된 뜻깊은 그해의 4월 개천군 봉화농업협동조합(당시) 관리위원장 김락희동지에게 로력영웅칭호를 수여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이 발표되였다.

25살의 영웅관리위원장이 고향마을 동구길로 들어선 날 영웅의 할머니는 주름깊은 두볼을 하염없이 적시며 목메여 말했다.

혈육조차 버리려 했던 천덕꾸러기를 우리 수령님께서 나라의 영웅으로 키워주셨다고, 하늘같은 이 은덕을 눈에 흙이 들어간들 잊을손가고…

어제날의 천덕꾸러기가 나라의 영웅으로!

참으로 이것은 지난날 지지리도 천대받고 멸시받던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을 력사의 주인으로, 어엿한 혁명가로 안아키우신 어버이수령님의 위대한 손길이 낳은 또 하나의 전설같은 인간성장의 이야기였다.

 

고귀한 믿음-녀성혁명가의 전형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건설이 힘있게 벌어지던 1970년대초에 김락희동지는 자강도농촌경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였다.

개천군협동농장경영위원회 위원장이 처녀보잡이출신이기때문에 일을 이악하게 잘할수 있을것이라고 하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더없는 믿음을 안겨주신것이였다.

여기에는 김락희동지가 산간지대의 농사를 추켜세우는데서도 시대의 기수가 될것을 바라시는 그이의 크나큰 기대가 담겨져있었다.

하건만 어머니의 치마자락을 맴도는 철부지런듯 김락희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곁에서 멀어진다는 서운함에 휩싸여 눈물부터 앞세웠다.한 일군으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응석받이자식을 달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자강도에 가있어도 내가 자주 찾아가면 되지 않는가고, 걱정하지 말고 자강도에 가서 일을 잘하라고 자신께서 이야기했다는것을 전해주라고 따뜻이 이르시였다.

이런 각별한 사랑속에 김락희동지가 자강도농촌경리위원회 위원장사업을 시작한 직후에는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날 평양시내를 돌아보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뻐스줄에 서있는 그를 띄여보게 되시였다.이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한 일군에게 전화를 거시여 자강도에 내려간지 얼마 되지 않는 그가 평양에 올라온것을 보면 필경 무슨 문제가 있어서 올라온것 같다고, 내대신 동무가 그를 만나보고 걸린 문제가 있으면 다 풀어주어야 하겠다고 간곡히 당부하시였다.

그러시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여 이듬해에는 자강도에까지 찾아가시여 김락희동지를 만나주시고 걸린 문제도 모두 풀어주신 어버이수령님이시였다.

한개 조합을 책임진 일군으로부터 한개 군, 한개 도의 농사를 돌보는 지도일군으로, 이것은 정녕 아기에게 걸음마를 익혀주는 친부모의 심정으로 성장의 자욱자욱을 다심히 보살피고 이끌어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은혜로운 손길을 떠나 생각할수 없는것이였다.

김락희동지가 늘 격정속에 외우던 이야기가 있다.

주체58(1969)년 2월초 평양에서는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전국농업일군대회가 성대히 진행되였다.

당시 인민경제대학 학생이였던 김락희동지를 몸소 대회에 불러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를 주석단에도 앉혀주시고 토론도 하도록 하여주시였다.

받아안은 은정에 목이 메여오고 보답할 일념이 가슴가득 북받쳐올랐던 김락희동지는 대회휴식시간에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온 자리에서 떼를 쓰다싶이 말씀올리였다.

《이제라도 공부를 그만두고 개천군에 내려가서 농사를 지었으면 합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항상 나라의 쌀독을 먼저 생각하는 김락희동지가 못내 대견스러우시여 무랍없이 올리는 그의 청을 너그럽게 받아주시였다.

그런데 이것이 후날 우리 수령님의 마음속에 큰 아쉬움으로 남게 될줄 어찌 알았으랴.

그후 황해북도의 농업지도일군으로 사업하던 김락희동지는 발전하는 현실에 따라서지 못하고 주관적욕망에 사로잡혀 일하다가 과오를 범하게 되였다.

그의 사업정형을 료해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심중은 몹시 무거우시였다.

단지 그의 결함이 엄중해서만이 아니였다.준엄했던 조국해방전쟁시기 어린 처녀의 몸으로 남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보잡이에 솔선 나서 쌀로써 전쟁승리에 이바지한 미더운 농촌선구자, 시련의 날에나, 평범한 날에나 땅과 같이 성실하게 당을 받들어온 충실한 일군인 그가 범한 과오여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더욱 마음이 아프시였다.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시였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공부시키지 못했다고 조용히 뇌이시였다.

그가 공부를 그만두고 농사를 짓겠다고 말씀올리던 때의 일을 더듬으시는듯 잠시 아무 말씀도 없으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제라도 학교에 보내여 배우도록 하자고 이르시였다.

김락희동지를 그처럼 아끼고 위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진정을 누구보다 깊이 헤아리신분은 위대한 장군님이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그의 과오는 엄중하지만 우리는 그가 지니고있는 당에 대한 의리심을 더 믿어야 한다고, 그는 전화의 그날부터 오늘까지 오직 어버이수령님만을 믿고 모든것을 다 바쳐온 동무이라고, 그런 그가 잘못을 저지르게 된것은 배우지 못한탓으로 정치적식견이 부족한데 있다고 하시면서 김락희동지를 인민경제대학에서 공부시키도록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김락희동지는 또다시 대학으로 가게 되였다.

그 길은 단순한 배움의 길이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님들의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믿음과 기대를 뼈속깊이 쪼아박는 길이였고 백배로 불타오른 보답의 맹세로 가슴끓이는 충성의 길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대학을 졸업하고 크게 성장한 그에게 분계연선지대의 농업지도사업을 맡겨주시였고 그후에는 곡창지대로 소문난 평안남도의 농업부문 사업을 맡아보도록 하여주시면서 나라의 농업생산을 추켜세우는데서 큰 역할을 하도록 떠밀어주시였다.

산같은 믿음이 어깨우에 실릴수록 김락희동지는 우리 인민들에게 보다 유족한 생활을 마련해주시려는 어버이수령님의 절절한 념원이 더욱더 뜨겁게 어려와 격정을 금할수 없었다.

인민의 행복을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명절날, 휴식일이 따로없이 험한 포전길, 농장길을 걷고 또 걸으시는 어버이수령님이시였다.농사일을 두고 얼마나 마음쓰시였으면 위대한 수령님께서 저택시험포전에서 농작물도 손수 가꾸시고 인민들을 배불리 먹일수만 있다면 국가주석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도하는 고문을 하였으면 좋겠다는 말씀까지 하시였으랴.

(내 한줌의 흙이 되고 거름이 되여서라도 어버이수령님의 념원을 풀어드리리라!)

이것이 김락희동지의 불같은 지향이고 인생의 목표였다.

그는 영농전투로 들끓는 협동벌에서 살다싶이 하며 삶의 자욱자욱에 티없는 량심과 충성의 열정을 고이였다.어떤 광풍에도 드놀지 않는 거목과도 같이 오직 한마음 쌀로써 당을 받들어갈 일념으로 온넋을 불태웠다.

나라의 농업발전을 위해 바치신 어버이수령님의 심혈과 로고는 이 땅에 풍년가을만을 펼친것이 아니였다.그것은 어제날 천대받고 억압받던 김락희동지와 같은 평범한 농민들을 진정한 땅의 주인, 나라의 참된 역군으로 키운 인간육성의 귀중한 자양분이였다.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는것이 혁명전사들에 대한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사랑과 믿음이다.

주체94(2005)년 5월 김락희동지는 꿈만같은 사실에 접하게 되였다.

선군혁명령도의 그 바쁘신 속에서도 김락희동지의 사업과 생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돌려오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70살을 넘긴 그에게 한개 도의 당사업을 맡겨주신것이였다.

어느날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지난 시기 김락희동지가 세운 공로를 높이 평가해주시면서 이제는 나이도 많지만 아직도 도농촌경리위원회 고문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순직할 각오를 가지고 당의 선군령도를 받들어나가고있다, 이런 동무에게 의거하지 않으면 우리가 누구에게 의거하여 혁명을 하겠는가, 나는 사회주의건설을 직접 해본 오랜 일군들에게 의거하여 혁명과 건설을 하려고 한다, 때문에 나는 이 동무에게 농업도의 당사업을 맡기려고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나이가 들수록 눈물이 마른다지만 김락희동지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빛내주신 그의 삶을 격동의 선군시대와 더불어 더 활짝 꽃피워주시려는 위대한 장군님의 열화같은 믿음과 사랑의 세계가 가슴사무치게 어려왔던것이다.

고목에도 꽃을 피워주는 은혜로운 그 사랑은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한 김락희동지에게 처녀보잡이시절의 그 정신, 그 기백을 북돋아주었다.

전사의 심장에 끓어넘치는 충성의 열정이 아무리 뜨겁다한들 절세위인들의 믿음에 어이 비길수 있으랴.

김락희동지가 한개 도의 당사업을 맡겨준 당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하여 불편한 몸임에도 애써 일한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황해남도당 책임비서인 김락희동무는 수령님께서 내세워주신 녀성일군의 한사람인데 지금도 변함없이 당을 받들어 일을 잘하고있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그러시면서 그에게 진짜혁명가, 검열된 일군, 우리 시대 녀성혁명가의 전형이라는 최상최대의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우리 시대 녀성혁명가의 전형!

혁명전사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값높은 평가, 고귀한 영예가 어디에 있겠는가.

조국이 알고 인민이 기억하는 참된 혁명가들의 빛나는 삶은 이렇듯 위대한 수령이 안겨주는 사랑과 믿음의 결정체인것이다.

 

영원한 삶의 품

 

생의 말년에 김락희동지는 자식들앞에서 자기야말로 행운아라고 자주 외웠다고 한다.

행운아, 이 한마디에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슬하에서 끝없는 행복만을 누려온 김락희동지의 남다른 심정, 복받은 삶에 대한 총화가 그대로 응축되여있다.

김락희동지가 경애하는 원수님의 따사로운 품속에 안겨산 나날은 길지 않다.그러나 그 하루하루는 또 한분의 희세의 천출위인을 령도자로 높이 모신 무한한 행복감으로 충만된 감격과 환희의 세월이였다.

아직은 민족대국상의 비보가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던 9년전 12월 17일이였다.

당시 내각부총리로 사업하고있던 김락희동지는 어느 한 행사에 참가하기 위하여 지방에 나갔다가 뜻밖에 당중앙위원회의 부름을 받게 되였다.

평양으로 향하는 김락희동지의 마음은 몹시 설레였다.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뵙기라도 하면 무슨 말씀부터 올릴지 생각을 고르고고르며 마음속으로 뇌이기는 또 그 몇번…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민족대국상의 비보에 접하게 될줄 어이 알았으랴.

비통한 심정을 안으시고 위대한 장군님께서 서거하시였다는 비보를 전해주시는 경애하는 원수님, 믿을래야 믿을수 없는 사실앞에서 너무도 억이 막혀 어깨만 들먹이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성원들…

피눈물이 흐르는 가슴을 부여잡은채 김락희동지는 위대한 장군님의 령구앞에 섰다.

(아, 이제 더는 위대한 장군님의 봄빛같은 그 미소를 영영 뵈올수 없단 말인가.하늘도 무정쿠나!)

몸도 마음도 지탱점을 잃은 그가 잠시 휴계실의 의자에 앉아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다듬고있을 때였다.

문득 그의 눈가에 비분에 잠기신 경애하는 원수님의 숙연하신 모습이 안겨들었다.성급히 자세를 바로하며 일어서려고 했지만 심하게 강직된 팔과 다리가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바로 이때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한달음에 김락희동지에게로 다가오시여 그를 두손으로 부축해주시였다.그러시고는 근심어린 어조로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몸을 돌보라고 따뜻이 이르시는것이였다.

그 누구보다 상실의 아픔이 크시건만 오히려 로전사가 쓰러질세라 세심히 보살펴주시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다심하신 손길, 사려깊으신 눈길에서 김락희동지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사랑을 느꼈고 온몸을 포근히 감싸안는 불같은 인정미를 절감하였다.

이것이 어찌 김락희동지 한사람의 심정만이였으랴.

인민을 하늘처럼 떠받드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뜻을 정히 받들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열화같은 사랑과 정으로 피눈물의 언덕에서 인민을 안아일으켜주신 경애하는 원수님,

이 세상 그 무엇에도 비길수 없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숭고한 인민관에 머리가 숙어질 때마다 김락희동지는 우리 인민이야말로 수령복, 장군복을 타고난 복받은 인민이라는 생각, 천하제일위인을 모시여 조국의 앞날은 끝없이 밝고 창창하다는 환희로 하여 가슴뿌듯함을 금치 못하였다.

그럴수록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만은 험한 포전길을 걷지 않으시게 해야 한다는 비상한 자각이 세차게 불타올랐다.

이런 그였기에 어떻게 해서나 농사를 잘 지어야 한다며 폭우가 쏟아지던 날에도, 눈바람치는 날에도 주저없이 농장길을 떠나군 하였다.

《거름더미이자 쌀더미라고 하지 않나요.》

김이 문문 오르는 거름을 손에 쥐여보고 냄새도 맡아보는 내각부총리가 보기 민망하여 만류하는 일군들에게 김락희동지가 웃으며 하던 말이다.

오늘도 사람들은 영농사업에서 제기되는 긴박한 문제를 풀기 위해 하루밤에 수백리길을 달리기도 하고 찬바람부는 포전머리에서 격동적인 선동연설로 농장원들의 심금을 울려주기도 하던 그의 모습을 잊지 못해하고있다.

늘 포전에서 사는 일군, 승용차의 연유소비량이 제일 많은 부총리,

이것이 그때 내각 일군들의 화제에 덕담처럼 오르군 하던 김락희동지에 대한 평판이였다.

사실 80고개를 앞둔 고령의 나이에 그처럼 비상한 정력을 발휘한다는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더우기 오래전에 심하게 다친 다리가 말썽을 부려 김락희동지는 늘 곁사람들의 부축을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지만 지치고 힘들 때마다, 병으로 쓰러졌을 때에조차 김락희동지는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농사일을 두고 마음쓰지 않으시게 해야 한다며 강잉히 일어서군 하였다.

몸은 비록 로쇠했어도 충신의 심장은 령도자에 대한 충성의 열의로 고동치고있었다.

당에서는 김락희동지의 건강을 념려하여 여러차례의 입원치료기간 수시로 치료정형을 알아보며 온갖 대책을 다 세워주었고 내각 명예참사로 일하도록 은정어린 조치도 취해주었다.그리고 그가 불편없이 생활할수 있도록 경치좋은 대동강반에 새로 일떠선 현대적인 아빠트에 사랑의 보금자리도 마련해주었다.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동상을 모신 만수대언덕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새 살림집으로 자리를 옮기던 날 김락희동지는 어버이수령님들의 품속에 다시 안긴것만 같아 행복감에 젖어드는 심정을 금치 못하였다.

악화되는 병세로 하여 다시 입원치료를 받을것을 권고하였을 때 그는 이를 굳이 마다하였다.

당에서 마련해준 따스한 보금자리에서, 위대한 수령님들의 자애로운 손길이 몸가까이 느껴지는 만수대언덕아래에서 삶의 마지막숨결까지 다하고싶은것이 그의 소원이였던것이다.

어느날 저녁 김락희동지는 조용히 맏며느리를 불러앉히였다.

그리고는 위대한 수령님의 거룩한 존함을 모신 금시계를 손목에 채워주며 절절히 당부하였다.

《자식들을 이 금시계처럼 우리 당을 받드는 길에 변색도 드틸줄도 모르는 충신으로 키워야 한다.…》

한생의 유산과도 같은 당부를 남긴 김락희동지는 깊어가는 그밤과 더불어 지나온 인생에서 가장 뜻깊고 행복했던 나날을 끝없이 떠올리였다.

수십년전 머나먼 현지지도의 길에서 자기를 몸가까이 불러주시고 상한 다리를 념려하시며 어디 한번 걸어보라고 이르시던 어버이수령님의 자애로운 영상이 우렷이 안겨왔다.

지방출장중에 있는 전사를 부르시며 자신께서 찾는다고 하면 급히 오다가 사고를 칠수 있으니 절대로 그런 내색을 보이지 말고 차를 조심히 몰고 오게 하라고 신신당부하시던 위대한 장군님의 사려깊으신 음성도 들려오는듯…

혁명전사 한사람한사람을 금옥처럼 귀중히 여기시던 위대한 수령님들처럼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또 얼마나 극진한 손길로 그의 신상을 보살펴주시였던가.

영원한 추억을 안고 김락희동지는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로전사의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으나 충신의 고결한 넋은 오늘도 생생히 살아숨쉬고있다.


* *


가장 숭고한 도덕의리심으로 전사들의 삶을 영원히 빛내여주시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김락희동지의 서거에 애석함을 금치 못해하시며 그의 령전에 화환을 보내주시고 그가 애국렬사릉에서 영생의 삶을 누리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주체102(2013)년 2월 19일 애국렬사릉에 안치된 김락희동지의 묘소앞에는 수많은 훈장과 메달들이 눈부시게 빛을 뿌리고있었다.

공화국의 최고훈장인 김일성훈장과 김정일훈장 그리고 로력영웅메달…

유난히도 령롱하게 빛나는 훈장, 메달들은 정녕 전화의 처녀보잡이를 품에 안아 참된 애국자로, 영웅으로, 열혈충신으로 키워주신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위대한 사랑과 믿음의 고귀한 증표가 아니랴.

김락희동지의 한생은 우리에게 가르치고있다.

대를 이어 누리는 수령복속에 우리의 운명도 미래도, 후손만대의 행복도 있음을, 영원한 충성의 한길에 별처럼 빛나는 전사의 삶도, 값높은 영광도 있음을.

본사기자 장정철
본사기자 강원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