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7월 2일 로동신문
우리 당의 품속에서 영생하는 녀성혁명가 내각부총리였던 김락희동지의
지금으로부터 4년전 력사적인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의 높은 연단에서
바로 그들가운데는 평범한 농사군출신으로서 한평생 쌀로써 당을 받들어온 김락희동지도 있었다.
《인민들의 참된 삶과 후손만대의 영원한 행복은 오직 조국과 인민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조국과 인민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 헌신하는
나라없던 그 세월 가난한 화전민의 딸로 태여나 한뉘를 천덕꾸러기로 시들번 한 김락희동지,
그러하였던 그가 은혜로운 태양의 품에 안겨 시대의 선구자로, 영웅으로, 나라의 농업전반을 책임진 지도일군으로 생의 자욱을 빛나게 아로새기였으니 김락희동지의 극적인 인생행로는 이 땅의 수천만 아들딸들을 어엿한 혁명가로 안아키워주신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화전민의 딸이 나라의 영웅으로
주체101(2012)년 2월, 뜻깊은 광명성절에 즈음하여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제정된 공화국의 최고훈장인
감격에 목메일수록 그의 뇌리에는 걸어온 인생길에 대한 추억이 끝없이 갈마들었다. 일제식민지통치의 암담하던 세월 개천땅의 궁벽한 산골마을에서 가난한 화전민가정의 둘째딸로 태여난 그 시각부터 김락희동지는 기구한 운명의 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생의 고고성을 터치자마자 구차한 살림과 봉건인습에 떠박질려 누데기에 싸인채 버림받았던 피덩이, 어느 선량한 로인이 숨이 멎어가는 갓난애기를 불쌍히 여겨 뜸술로 살려내지 않았던들 그대로 꺼지고말았을 천덕꾸러기의 운명이였다. 허나 간신히 건져낸 그 생명에게 차례진것이란 천대와 굶주림, 참기 어려운 고역뿐이였다.
그러하던 인생에 참다운 삶의 희열을 안겨준것은 우리 민족의
이 모든 행복을 안겨주신
주체41(1952)년 1월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이 한창이던 그때
전국농민열성자대회에 참가한 그는 대회장의 높은 연단에 올라 토론까지 하게 되였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고향땅에 기여든 원쑤놈들의 야수적만행으로 참혹하게 학살당한 아버지의 유해를 보고 천백배의 복수를 다짐하던 일, 그후
《파종도 전선이다!》라는 전투적구호를 제시하신
나어린 처녀보잡이의 토론은 만장을 격동시켰다. 얼마후 대회휴식시간이였다.
한 일군으로부터
울렁거리는 마음을 걷잡지 못하고 휴계실로 달려갔을 때
송구스러움에 몸둘바를 몰라하는 그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신
한없이 자애로우신
어린 나이에 불행을 당한 그의 마음속상처가 너무도 가슴저미시여, 그러나 주저앉지 않고 원쑤에 대한 적개심으로 피끓이며 강인하게 일떠선 그의 소행이 참으로 대견하시여
순간 김락희동지는 목이 꽉 메여올랐다. 어제날 천덕꾸러기로 살아온 그에게 참된 삶을 안겨주시고 오늘은 온 나라가 다 아는 처녀보잡이로 내세워주시며 분에 넘치는 영광을 거듭 안겨주시니 가슴속에 북받치는 행복감을 무엇에 비길수 있으랴. 불같은 보답의 일념안고 그해 가을에 례년에 없는 다수확을 또다시 안아온 김락희동지는 전쟁승리에 다소나마 이바지하고저 량곡 36가마니를 전선원호미로 바치였다.
그리고는
처녀보잡이가 올린 소박한 편지를 친히 보아주신
《평안남도 개천군 개천면 중흥리 다수확농민 김락희동지에게 나는 당신이 금년도 농산사업에서 온갖 난관과 애로를 극복하고 많은 수확을 쟁취하였으며 특히 당신이 전선의 승리를 위하여 벼 36가마니를 전선원호미로 보내준데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는바입니다. 당신이 보내준 전선원호미는 우리 인민군무장력강화에 기여될것이며 우리의 인민군장병들에게 더 큰 고무가 될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앞으로도 다수확을 위한 영농사업에서 더욱 커다란 성과를 달성하리라는것을 확신합니다. 1952년 12월 4일
오로지 우리 당만을 변함없이 따르고 지지한 법동농민, 락원의 신포향과 같은 애국적인민의 대오속에 선 또 한명의 새세대농촌핵심, 미더운 처녀보잡이의 모습을 그려보시였을 우리
김락희동지를 마음속에 새겨두신
전쟁이 끝난 이듬해 봄에는 미제를 쳐부신 영웅조선의 기상을 안고 외국방문의 길에 오르는 우리 나라 대표단의 유일한 농민대표, 녀성대표로 김락희동지를 내세워주신
주체47(1958)년, 사회주의농업협동화가 빛나게 실현된 뜻깊은 그해의 4월 개천군 봉화농업협동조합(당시) 관리위원장 김락희동지에게 로력영웅칭호를 수여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이 발표되였다. 25살의 영웅관리위원장이 고향마을 동구길로 들어선 날 영웅의 할머니는 주름깊은 두볼을 하염없이 적시며 목메여 말했다.
혈육조차 버리려 했던 천덕꾸러기를 우리
어제날의 천덕꾸러기가 나라의 영웅으로!
참으로 이것은 지난날 지지리도 천대받고 멸시받던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을 력사의 주인으로, 어엿한 혁명가로 안아키우신
고귀한 믿음-녀성혁명가의 전형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건설이 힘있게 벌어지던 1970년대초에 김락희동지는 자강도농촌경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였다.
개천군협동농장경영위원회 위원장이 처녀보잡이출신이기때문에 일을 이악하게 잘할수 있을것이라고 하시면서
여기에는 김락희동지가 산간지대의 농사를 추켜세우는데서도 시대의 기수가 될것을 바라시는 그이의 크나큰 기대가 담겨져있었다.
하건만 어머니의 치마자락을 맴도는 철부지런듯 김락희동지는
이런 각별한 사랑속에 김락희동지가 자강도농촌경리위원회 위원장사업을 시작한 직후에는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날 평양시내를 돌아보시던
그러시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여 이듬해에는 자강도에까지 찾아가시여 김락희동지를 만나주시고 걸린 문제도 모두 풀어주신
한개 조합을 책임진 일군으로부터 한개 군, 한개 도의 농사를 돌보는 지도일군으로, 이것은 정녕 아기에게 걸음마를 익혀주는 친부모의 심정으로 성장의 자욱자욱을 다심히 보살피고 이끌어주신
김락희동지가 늘 격정속에 외우던 이야기가 있다.
주체58(1969)년 2월초 평양에서는
당시 인민경제대학 학생이였던 김락희동지를 몸소 대회에 불러주신
받아안은 은정에 목이 메여오고 보답할 일념이 가슴가득 북받쳐올랐던 김락희동지는 대회휴식시간에
《이제라도 공부를 그만두고 개천군에 내려가서 농사를 지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후날 우리
그후 황해북도의 농업지도일군으로 사업하던 김락희동지는 발전하는 현실에 따라서지 못하고 주관적욕망에 사로잡혀 일하다가 과오를 범하게 되였다.
그의 사업정형을 료해하시는
단지 그의 결함이 엄중해서만이 아니였다.준엄했던 조국해방전쟁시기 어린 처녀의 몸으로 남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보잡이에 솔선 나서 쌀로써 전쟁승리에 이바지한 미더운 농촌선구자, 시련의 날에나, 평범한 날에나 땅과 같이 성실하게 당을 받들어온 충실한 일군인 그가 범한 과오여서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시였던
그가 공부를 그만두고 농사를 짓겠다고 말씀올리던 때의 일을 더듬으시는듯 잠시 아무 말씀도 없으시던
김락희동지를 그처럼 아끼고 위하시는
이렇게 되여 김락희동지는 또다시 대학으로 가게 되였다.
그 길은 단순한 배움의 길이 아니였다.
산같은 믿음이 어깨우에 실릴수록 김락희동지는 우리 인민들에게 보다 유족한 생활을 마련해주시려는
인민의 행복을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명절날, 휴식일이 따로없이 험한 포전길, 농장길을 걷고 또 걸으시는
(내 한줌의 흙이 되고 거름이 되여서라도
이것이 김락희동지의 불같은 지향이고 인생의 목표였다. 그는 영농전투로 들끓는 협동벌에서 살다싶이 하며 삶의 자욱자욱에 티없는 량심과 충성의 열정을 고이였다.어떤 광풍에도 드놀지 않는 거목과도 같이 오직 한마음 쌀로써 당을 받들어갈 일념으로 온넋을 불태웠다.
나라의 농업발전을 위해 바치신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는것이 혁명전사들에 대한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사랑과 믿음이다. 주체94(2005)년 5월 김락희동지는 꿈만같은 사실에 접하게 되였다.
선군혁명령도의 그 바쁘신 속에서도 김락희동지의 사업과 생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돌려오신
어느날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신
나이가 들수록 눈물이 마른다지만 김락희동지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고목에도 꽃을 피워주는 은혜로운 그 사랑은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한 김락희동지에게 처녀보잡이시절의 그 정신, 그 기백을 북돋아주었다. 전사의 심장에 끓어넘치는 충성의 열정이 아무리 뜨겁다한들 절세위인들의 믿음에 어이 비길수 있으랴.
김락희동지가 한개 도의 당사업을 맡겨준 당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하여 불편한 몸임에도 애써 일한다는 보고를 받으신
우리 시대 녀성혁명가의 전형! 혁명전사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값높은 평가, 고귀한 영예가 어디에 있겠는가.
조국이 알고 인민이 기억하는 참된 혁명가들의 빛나는 삶은 이렇듯
영원한 삶의 품
생의 말년에 김락희동지는 자식들앞에서 자기야말로 행운아라고 자주 외웠다고 한다. 행운아, 이 한마디에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슬하에서 끝없는 행복만을 누려온 김락희동지의 남다른 심정, 복받은 삶에 대한 총화가 그대로 응축되여있다.
김락희동지가
아직은 민족대국상의 비보가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던 9년전 12월 17일이였다. 당시 내각부총리로 사업하고있던 김락희동지는 어느 한 행사에 참가하기 위하여 지방에 나갔다가 뜻밖에 당중앙위원회의 부름을 받게 되였다. 평양으로 향하는 김락희동지의 마음은 몹시 설레였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민족대국상의 비보에 접하게 될줄 어이 알았으랴.
비통한 심정을 안으시고
피눈물이 흐르는 가슴을 부여잡은채 김락희동지는
(아, 이제 더는
몸도 마음도 지탱점을 잃은 그가 잠시 휴계실의 의자에 앉아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다듬고있을 때였다.
문득 그의 눈가에 비분에 잠기신
바로 이때
그 누구보다 상실의 아픔이 크시건만 오히려 로전사가 쓰러질세라 세심히 보살펴주시는
이것이 어찌 김락희동지 한사람의 심정만이였으랴.
인민을 하늘처럼 떠받드신
이 세상 그 무엇에도 비길수 없는
그럴수록
이런 그였기에 어떻게 해서나 농사를 잘 지어야 한다며 폭우가 쏟아지던 날에도, 눈바람치는 날에도 주저없이 농장길을 떠나군 하였다. 《거름더미이자 쌀더미라고 하지 않나요.》 김이 문문 오르는 거름을 손에 쥐여보고 냄새도 맡아보는 내각부총리가 보기 민망하여 만류하는 일군들에게 김락희동지가 웃으며 하던 말이다. 오늘도 사람들은 영농사업에서 제기되는 긴박한 문제를 풀기 위해 하루밤에 수백리길을 달리기도 하고 찬바람부는 포전머리에서 격동적인 선동연설로 농장원들의 심금을 울려주기도 하던 그의 모습을 잊지 못해하고있다. 늘 포전에서 사는 일군, 승용차의 연유소비량이 제일 많은 부총리, 이것이 그때 내각 일군들의 화제에 덕담처럼 오르군 하던 김락희동지에 대한 평판이였다. 사실 80고개를 앞둔 고령의 나이에 그처럼 비상한 정력을 발휘한다는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더우기 오래전에 심하게 다친 다리가 말썽을 부려 김락희동지는 늘 곁사람들의 부축을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지만 지치고 힘들 때마다, 병으로 쓰러졌을 때에조차 김락희동지는
몸은 비록 로쇠했어도 충신의 심장은
당에서는 김락희동지의 건강을 념려하여 여러차례의 입원치료기간 수시로 치료정형을 알아보며 온갖 대책을 다 세워주었고 내각 명예참사로 일하도록 은정어린 조치도 취해주었다.그리고 그가 불편없이 생활할수 있도록 경치좋은 대동강반에 새로 일떠선 현대적인 아빠트에 사랑의 보금자리도 마련해주었다.
악화되는 병세로 하여 다시 입원치료를 받을것을 권고하였을 때 그는 이를 굳이 마다하였다.
당에서 마련해준 따스한 보금자리에서,
어느날 저녁 김락희동지는 조용히 맏며느리를 불러앉히였다.
그리고는
《자식들을 이 금시계처럼 우리 당을 받드는 길에 변색도 드틸줄도 모르는 충신으로 키워야 한다.…》 한생의 유산과도 같은 당부를 남긴 김락희동지는 깊어가는 그밤과 더불어 지나온 인생에서 가장 뜻깊고 행복했던 나날을 끝없이 떠올리였다.
수십년전 머나먼 현지지도의 길에서 자기를 몸가까이 불러주시고 상한 다리를 념려하시며 어디 한번 걸어보라고 이르시던
지방출장중에 있는 전사를 부르시며 자신께서 찾는다고 하면 급히 오다가 사고를 칠수 있으니 절대로 그런 내색을 보이지 말고 차를 조심히 몰고 오게 하라고 신신당부하시던
혁명전사 한사람한사람을 금옥처럼 귀중히 여기시던
영원한 추억을 안고 김락희동지는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로전사의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으나 충신의 고결한 넋은 오늘도 생생히 살아숨쉬고있다.
가장 숭고한 도덕의리심으로 전사들의 삶을 영원히 빛내여주시는
주체102(2013)년 2월 19일 애국렬사릉에 안치된 김락희동지의 묘소앞에는 수많은 훈장과 메달들이 눈부시게 빛을 뿌리고있었다.
공화국의 최고훈장인
유난히도 령롱하게 빛나는 훈장, 메달들은 정녕 전화의 처녀보잡이를 품에 안아 참된 애국자로, 영웅으로, 열혈충신으로 키워주신 백두산절세위인들의
김락희동지의 한생은 우리에게 가르치고있다.
대를 이어 누리는
본사기자 장정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