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7월 13일 로동신문
당의 문예정책을 받드는 길에 뚜렷한 국립연극단 배우였던 한진섭선생의 성장과 창조활동을 더듬어
《문학예술부문 일군들과 창작가, 예술인들은 명작창작으로
해방후
배우가 되기 전에 혁명가가 되라
한진섭선생은 자기의 이름보다도 혁명연극 《성황당》에서 황지주, 《혈분만국회》에서 서대감, 예술영화 《조선의 별》에서 우사령, 예술영화 《유격대의 오형제》에서 준혁의 아버지, 예술영화 《군당책임비서》에서 최관배로인으로 우리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져있다. 그는 각이한 시대, 각이한 계층의 각이한 직업을 가진 인물, 다시말하여 긍정인물이건 부정인물이건, 주역이건 단역이건, 또 정극적인 인물이건 희극적인 인물이건 어떤 배역도 능숙하게 형상해내는 만능배우였다. 생활속의 산인간을 진실하고 생동하게 형상한것으로 하여 배우로서 성공하였을뿐아니라 인간으로서도 그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가식을 모르는 고지식하고 성실한 배우, 책임적이고 량심적인 인간, 무뚝뚝한것 같아도 지내보면 정이 푹 드는 다심한 사람… 한진섭선생과 함께 일한 창작가, 예술인들은 그의 인간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있지만 그가 어떻게 되여 연극계에 들어서게 되였으며 어떤 성장과정을 통하여 그와 같은 품격을 갖추게 되였는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것이다. 《명배우까지야 뭘, 나야 본체가 로동자인데.》 사람들이 그의 특출한 연기술을 두고 감탄할 때마다 한진섭선생은 늘 이렇게 말하였다. 로동자, 어이하여 한진섭선생이 이 부름에 그리도 애착을 가지고있었는가. 소년로동자로부터 연극계의 원로로. 한진섭선생의 한생을 한마디로 함축하여 표현한다면 아마도 이 말이 적중할것이다. 망국의 비운이 짙게 드리웠던 1914년 5월 경기도 김포시의 가난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난 한진섭선생은 13살때부터 인천항과 인쇄공장, 양말공장, 양철공장을 떠돌아다니면서 견습공으로, 부두로동으로 고역을 치르었다.하여 10대에 벌써 못해본 일이 없고 어떤 일에나 숙련된 소년로동자가 되였다. 그러한 그가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은데는 눈물겨운 사연이 있었다. 아마 1930년대에 백두산일대에서 타오른 항일무장투쟁의 거세찬 불길이 아니였다면 한진섭선생의 한생은 달리 되였을지도 모른다.
당시
애젊은 나이에 누구도 반기는 사람이 없는 만주의 황량한 들판을 홀로 떠다니던 그의 마음을 달래여주는 희망의 등불이 있었으니 그것은 언제면
하지만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일제놈들의 체포령으로 하여 그는 타향에서도 마음껏 제 얼굴을 드러내고 살수 없었다.출로를 모색하던 그가 피신처로 삼은 곳이 바로 중국 동북지방에 있던 어느 한 류랑극단이였다.여기저기 떠돌아다니기때문에 일제놈들의 눈을 피할수 있었고 일단 불리한 정황이 발생해도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울수 있었으므로 피신처로는 그저그만이였던것이다. 그는 극단에서 처음에는 수레공, 무대잡부로 일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였다.극단에서는 간혹 배우들이 모자라면 무대우를 한번 걸어지나가는것과 같은 단역에 그를 출연시켰는데 그것이 한진섭선생이 연극무대와 맺은 첫 인연이였다. 차츰 무대우에 오르는 회수가 많아지면서 잡부의 인생과 결별하고 연극인은 되였지만 상가집 개만도 못한 수난자의 처지와 더불어 차례진것은 거지같은 광대라는 가혹한 멸시와 천대뿐이였다. 로동속에 잔뼈를 굳히면서 대바른 품성을 소유한 한진섭선생의 가슴속에는 이왕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은바에는 조선말로 된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싶은 충동이 불덩이같이 치밀었다.
(조선말로 연극을 만들어
어찌 보면 당시로서는 한갖 꿈에 불과한 생각이라고 할수 있었지만 한진섭선생은 신심을 잃지 않고 하나하나 준비를 갖추어나갔다.드디여 그는 왜놈들의 눈길을 피해가며 진보적연극인들을 규합한 다음 《동방》이라는 자그마한 극단을 조직하였으며 《아리랑》, 《황금산》 등 많은 연극을 창작하여 공연하였다.
혹시
나라가 해방되자 한진섭선생은 로동생활의 벅찬 흐름에 뛰여들고싶은 충동을 누를길 없었다.어제날에는 온갖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구복이나 채우려고 일하였다면 이제는 나라의 당당한 주인이 되여 새 조국건설에 이바지하는 로동생활의 진맛을 느끼고싶었다.
하지만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자고 하신 애국의 호소에 접한 그는 영명하신
(연극으로 새 조선건설에 이바지하자.) 이렇게 되여 그는 새 조선의 연극무대에 나서게 되였다.해방과 함께 그가 오른 무대는 망국노의 신세가 한에 사무친 가설무대가 아니라 인민들에게 기쁨을 주고 온 나라를 행복한 새 생활창조에로 추동하는 진정한 예술의 활무대였다. 평안북도 선천군예술공작대 대장으로 사업하던 한진섭선생은 중앙예술공작단(국립연극단의 전신) 배우로 소환되여 연극 《백두산》을 비롯한 여러편의 연극에 출연하게 되였다. 새 조선의 첫 세대 연극인이 되여 보람찬 창조활동을 벌리던 그의 간절한 소원이 풀리는 날은 오고야말았다.
해방후에 창작된 어느 한 연극을 보아주신
크나큰 흥분으로 하여 잠 못 들던 그날 밤 한진섭선생은 수기집을 펼쳐들었다. 《오늘 비로소 나의 새 생활이 시작된듯싶다.소년로동자로, 무대잡부로 천대받던 내가 꿈에도 상상이나 할 일인가.영명하신 그이께서 나의 연기를 치하해주시였다.…》
하기에 그는 신념이 판가름되고 참된 혁명가와 너절한 배신자가 갈라져나가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도 추호의 동요를 몰랐다.그가 어중이떠중이들의 궤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20여명의 예술인들과 함께 최고사령부를 찾아 간고한 북행길을 성과적으로 헤쳐올수 있은것은 혁명적신념이 투철했기때문이다.
1960년대에 그가
맡겨진 역형상을 시대와 력사가 부여한 지상의 과제로 받아안은 그는 안온한 방에 앉아 대본이나 연구한것이 아니라 조국해방전쟁시기 최고사령부가 자리잡고있던 곳을 참관하면서
한진섭선생은 다른 배우들처럼 전문적인 예술교육을 받았거나 천성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도 아니였다. 그런데 어떻게 되여 어제날의 소년로동자가 인민의 사랑받는 공훈배우, 인민배우로, 우리 나라 연극계의 원로로 떠받들려왔는가.
한진섭선생자신은 배우생활 전기간 언제한번 자신을 혁명가라고 생각한적은 없다.허나 굶주리고 헐벗고 착취와 억압을 받던 지난날을 언제나 잊지 않고 부평초신세와도 같았던 떠살이운명에서 구원해주시고 참다운 인생의 봄빛을 안겨주신
배우가 성공하자면 재능도 있어야 한다.하지만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온갖 체험을 다 겪으며 뼈저리게 절감한 한진섭선생의 성공은 오늘도 우리 예술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있다. 배우가 되기 전에 혁명가가 되라!
혁명가의 나이는 언제나 청춘이다
우리 혁명력사에서 장엄한 계승의 시대가 열리던 1970년대에 문학예술인들은
그들속에는 영화혁명과 연극혁명수행의 앞장에 선 한진섭선생도 있었다.그는 이 노래를 제일 사랑하고 즐겨불렀다. 노을이 피여나는 이른아침에 인자하신 그 미소를 생각하며 그는 예술창조의 순간순간을 빛내여나갔다.
예술영화 《유격대의 오형제》를 창조하던 시기 그는 촬영소를 찾아주신
해빛같은 미소, 빛나는 안광, 우렁우렁하신 음성, 한없이 소탈하고 인자하신 모습…
언제나 마음속으로 그리고그리던 영명하신분을 이처럼 뜻밖에 뵙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는 흥분으로 몸둘바를 몰라하였다.북받치는 감격을 다잡으며 삼가 인사를 올리는 그에게
그후 그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여버렸다.
하나하나의 역형상과제를
주체60(1971)년
악착한 지주놈에 의하여 눈덮인 깊은 산속에 홀로 내버려진 순희를 발견하고 그를 부둥켜안는 장면 하나를 위해 기울인 그의 노력은 보통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것이였다.반복훈련을 하는것만으로도 성차지 않아 미술박물관을 찾아가 계급교양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보면서 진실한 감정과 행동선을 탐구하였고 어쩌다 집에 들어갔을 때에도 손자를 순희처럼 안아보면서 세부동작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해 12월이였다.다음날이면 현지촬영을 하게 되였는데 한진섭선생은 온밤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에 보고드릴 영화에 자그마한 흠도 있어선 안된다.) 더 누워있을수 없었던 그는 깊은 밤 홀로 현지촬영장으로 향하였다.북방의 기온은 령하 30℃를 오르내리였고 허리치게 쌓인 눈은 바람에 흩날리며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였다. 그는 연기동작을 현지에서 재현해보았다. 한번, 두번…열번…스무번… 눈무지속에서 순희를 부둥켜안는 동작을 몇십번이나 수행하느라 아예 눈사람이 되여버렸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였다.
이렇게 그가 세련시킨 산전막로인역을 보시고
단풍은 지는 순간에 제일로 붉다고 했다.그가 과연 무슨 힘으로 인생말년에도 로쇠와 침체를 모르고 예술창조사업에 온갖 정열을 쏟아부을수 있었는가. 5대혁명연극창조의 서막을 올린 혁명연극 《성황당》에서 황지주역을 수행했던 한진섭선생은 자기의 수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 식의 혁명연극이 태여난 1978년은 나의 인생에서도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뜻깊은 해였다.나는 생의 활력을 되찾고 새로운 연극창조의 세계에 뛰여들게 되였다.…》
과오를 범하고 연극무대를 떠나 로동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그는 나이가 많아 연극무대에 다시는 설수 없다고 생각하고있었다.그러던 그가 뜻밖에도
그의 마음속에서 자나깨나 울리던 심장의 노래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가 눈물과 함께 저절로 흘러나왔다. … 그 은혜 그 사랑에 목이 메여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불타는 마음 충성으로 이 한목숨 바쳐갑니다 … 이 노래야말로 한진섭선생의 마음속심정을 그대로 대변한 심장의 분출이였고 신념의 메아리였다. 64살의 나이에 진할줄 모르는 열정을 내뿜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더 젊어지는것 같다고 놀라와하며 청춘의 혈기가 어디서 샘솟는가고 물었다.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의 품에서 이 한진섭이 세상에 다시 태여났으니 어찌 젊음이 넘치지 않겠소.》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는 화술형상에서 나타나는 부족점을 극복하기 위해 맹훈련을 하였다.국립연극단의 무대옆에는 자그마한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아예 살다싶이 하면서 하루에 40페지이상씩 소설을 랑독하였고 대본 100번읽기를 어길수 없는 일과로 집행하였다.화술기량을 과학적으로 높이기 위해 훈련과정을 록음하여 들으면서 부족점들을 스스로 찾아내여 고치려고 애썼다. 그가 한 유능한 방송원을 찾아가 화술때문에 방조를 받으러 왔다고 하면서 록음기를 내놓았을 때 방송원은 깜짝 놀랐다.
《방송원동무, 좀 도와줄수 없겠소.
로배우의 허심하면서도 정열적인 태도에 감심한 방송원도 적극 도와나섰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어떤 날은 지주놈들의 착취상을 폭로하는 자료학습으로 도서관에서 하루해를 보내였고 어떤 때에는 지난날 지주집머슴으로 살아온 로인들의 체험담을 듣기 위해 먼길을 걷기도 하였다.하루에만도 무려 200여회의 반복훈련을 진행하느라 옷은 온통 물주머니가 되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주체67(1978)년 8월 31일,
혁명연극 《혈분만국회》를 창조할 때 한진섭선생은 70고령의 년로한 몸이였다. 완고하고 보수적인 인물, 당대 사회 원로급의 통치자를 형상하여야 하겠는데 예술영화 《군당책임비서》에서 최관배역을 수행한지 얼마 안된데다가 전형적인 로동계급의 행동거지와 화술투가 배여있는 그로서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였다.그가 서대감형상을 위해 얼마나 자감상태에 깊이 빠져있었으면 그를 찾을 때마다 누구나 《한아바이는 지금 서대감네 집에 있네.》라고 이야기했겠는가. 그때 한진섭선생은 정신육체적과로로 하여 쓰러진적이 있었다.그는 며칠째 훈련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한자한자 적어나갔다. 《1984년 2월 5일, 오늘도 나는 침상에 누워있다.…
그는 작품창조의 나날
그 믿음을 자양분으로 받아안고 그는 혁명연극 《3인1당》 의 연출을 훌륭히 담당수행하였으며 혁명연극 《딸에게서 온 편지》와 《경축대회》창조에서도 로배우로서의 의무를 다하였다. 한진섭선생은 수십년의 배우생활기간 90여편의 연극들과 20여편의 영화들에서 주역을 담당수행하였는데 그중 많은 작품들이 인생의 황혼기라고 할수 있는 60대, 70대에 출연한 작품들이였다.
당과
지도고문의 강의는 오늘도 계속된다
사람의 한생에서 가장 보람있는 일을 꼽으라면 아마도 인재를 키워내는 사업이라고 할것이다. 우리 연극계에 남긴 한진섭선생의 생의 자욱이 그처럼 뚜렷하고 아름다운것은 그 어떤 명예와 보수도 바람이 없이 예술인후비육성에 자신을 깡그리 바쳐온 공적이 남다르기때문이다. 한진섭선생은 우리 나라 연극영화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한 인민배우인 동시에 예술인재육성에 공헌을 한 참된 교육자이기도 하다. 1970년대 국립연극단에는 자체로 배우를 키워내는 양성소가 있었다.한진섭선생은 이 양성소의 비편제교원이 되여 학생들이 재능있는 연극배우로 자라날수 있게 밑거름이 되여주었다. 진실치 못한 연기와는 타협할줄 모르는 그의 엄격한 요구성과 적극적인 지도속에 성장한 학생들이 후날 연극계의 중진들로, 당에 기쁨을 드리고 인민의 사랑을 받는 관록있는 배우로 성장하였다. 당의 믿음에 의하여 혁명연극 《3인1당》 의 연출을 맡았을 때에도 한진섭선생은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연기형상을 위하여 구체적인 방조를 주었다. 도서 《무대분장》 집필자의 한사람인 한진섭선생은 높은 분장술을 겸비하고있었는데 그는 분장에 대하여 모르는 배우는 설익은 배우로 여기였다.대충 나름대로 분장을 하고 무대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창조태도를 엄하게 지적하면서 역인물의 성격을 살리자면 분장부터 진실하게 해야 한다고 차근히 일깨워주었고 걸음걸이를 비롯한 행동과 대사형상은 물론이고 인물의 성격과 정황에 맞는 소도구제작에 이르기까지 솔선 많은 품을 들이였다. 그의 지도에서 특징적인것은 몇마디 말로 어떻게 하라고 한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을 해보이면서 배우가 생동한 형상을 창조하도록 한것이다.그만큼 그는 역형상의 매 세부에 이르기까지 꿰뚫어보고 대번에 명연기를 창조할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높았고 경험이 풍부했다.
진정 그는 연극예술의 래일을 걸머질 인재육성을 위해 자신을 깡그리 바쳐온 혁명선배였다. 평소에 반복공연에 출연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실천이 그대로 배우가 예술을 어떤 관점에서 대해야 하며 삶의 순간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새세대 예술인들에게 가르쳐주는 공정으로 삼았다.보기 드문 애연가였던 그는 《해당화》담배를 즐겨피웠는데 단번에 두대의 담배를 붙여물고 사색하는 습관이 있었다.그러나 일단 자감상태에 들어가면 그처럼 좋아하던 담배생각도 버리고 오직 역형상세계에서 살았다. 신인배우들은 매일 하는 공연이라고 하여 잠시나마 탕개를 풀려 했다가도 그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을 다잡았으며 로배우의 높은 정신세계에 따라서기 위해 노력하였다.년로한 그가 시도 읊고 소설도 읽으면서 화술훈련에 열중할 때면 젊은 배우들은 기량훈련을 게을리하는 자신들을 스스로 채찍질하군 하였다. 그가 심한 병을 앓으면서도 말년에는 여러 도서들과 문학작품까지 집필할수 있은것은 당과 인민앞에 주체연극의 바통을 꿋꿋이 이어나갈 후비들을 키워내기 전에는 죽을 권리가 없다는 비상한 자각을 떠나 생각할수 없다.
한진섭선생은
주체76(1987)년 여름 어느날 연극창조사업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던
그후 당의 크나큰 은정에 의하여 승용차와 살림집까지 받아안은 그는 나날이 더욱 커만 가는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는 길은 끌끌한 예술인재들을 키워
그의 이러한 마음을 누구보다 뜨겁게 헤아려주신분은
이렇게 되여 국립연극단에는 한진섭선생을 위한 배우연기지도고문이라는 새로운 직제가 나오게 되였다. 배우연기지도고문, 이 직제야말로 후비육성을 위해 늘 마음쓰고 실천적모범으로 새세대들을 이끌어온 한진섭선생의 한생에 대한 또 하나의 값높은 평가였다.
그의 주름깊은 두볼로는 뜨거운 눈물이 걷잡을새없이 흘러내렸다.한진섭선생은 심장의 마지막박동까지 깡그리 바칠 충성의 맹세를 다지고 또 다졌다.
예술영화 《군당책임비서》에는 최관배로인이 군당책임일군앞에 무릎을 꿇고 《내 죽는 날까지 보이라앞에서 우리
그는 평소에 늘 《생의 마지막을 무대우에서 장식하고싶다.무대우에서 숨지는것이 나의 소원이다.》라고 외우군 했던것이다. 한진섭선생의 딸 한규선은 아버지에 대하여 이렇게 추억하였다. 《기사장 박우필의 뺨을 때릴 때 아버지는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당의 사랑과 은정속에 부러운것없이 살면서 배은망덕하는 이런 우필이와 같은 녀석을 어떻게 인간이라고 할수 있겠는가.그래서 저도 모르게 진짜로 성이 났고 있는 힘껏 귀뺨을 때렸다고 했습니다.》 그는 새세대 예술인들이 우필이처럼 될가봐 걱정하면서 그들이 재능을 련마하기 전에 당의 문예사상과 령도에 충실한 신념의 인간으로 되게 하려고 애썼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하루전날에도 신인배우들을 한명한명 만나 당이 바라는 훌륭한 연극배우가 되라고 연기형상에서의 부족점도 일깨워주었고 당의 사랑과 은정이 깃들어있고 자기 한생이 흘러간 극장의 여러곳을 깊은 감회속에 돌아보며 오래도록 눈물을 흘리였다.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 자식들에게 《아직 못다한 일이 많은데…》라고 몇번이나 곱씹었다.이것이 한진섭선생의 유언으로 될줄이야. 흔히 생의 마감에는 한생의 추억을 모두 더듬는다고 한다.하지만 그는 눈을 감는 마지막순간까지도 해놓은 일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더 많이 생각한 진짜배기충신이였다. 한진섭선생은 한생토록 쓴 부피두터운 여러권의 수기집과 채 완성하지 못한 도서원고 《배우연기수업》을 남기였다.
로배우의 체취가 슴배여있는 한페지한페지를 읽어가느라면 당과
주체83(1994)년 3월, 우리 당이 아끼고 사랑하는 전사를 잃은데 대하여 못내 가슴아파하시며
그는 오늘도 신미리애국렬사릉의 높은 언덕에서 절절히 당부하고있다.
그 어떤 가식과 변심도 없이, 가장 깨끗하고 순결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당을 받들라고, 심장의 마지막고동까지도 다 바쳐
평양의 중심부에 웅장하게 일떠선 국립연극극장을 바라볼 때면 당의 문예사상과 정책을 받드는 길에 한생을 바친 한진섭선생과 같은 연극계의 원로들의 군상이 우렷이 떠오른다. 그들의 이름을 우리는 추억속에서만 새겨보지 않는다.
당과
전세대 문예전사들의 아름다운 생과 혁명적인 예술창조정신은 우리 시대 예술인들의 귀중한 삶의 거울이 되여 언제나 신심과 용기를 안겨주고있으며 새로운 명작창작투쟁에로 힘있게 고무해주고있다. 본사기자 강효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