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7월 16일 로동신문
성스러운 주체혁명사와 더불어 영생하는 충신들 필승의 신념 안고 붓대포의 위력을 떨친 열혈전사 혁명투사 최경화동지의 한생에서
간고한 항일혁명투쟁이 한창이던 주체27(1938)년 1월 어느날
그 전사가 바로
《최경화는 글재주도 뛰여나고 그림도 썩 잘 그리는 보기 드문 재사였다.〈종소리〉의 삽화는 대부분 그가 직접 그려넣은것이였다.정치상학시간에는 강사로 나섰고 전투장에서는 선참으로 돌격에 나서군 하는 선봉투사였다.》
장백현 17도구 왕가골에서 사립학교 교원을 하면서 그는 주체26(1937)년 1월 조국광복회조직에 들었으며 17도구당지부 조직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최경화동지는 주체26(1937)년 여름 마침내 그토록 소망하던대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였고 얼마후에는 비서처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그 나날 그는 비범한 예지와 탁월한 령도력, 한없이 고매한 풍모를 지니신
그는 신문에
《대학생》이란 별명으로 불리운 최경화동지는 언제나 어려운 일에 누구보다 먼저 나섰고 동지들을 위해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았다.
일제와의 피어린 싸움을 벌려야 하는 속에서 대중을 교양하는 글을 쓴다는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주체27(1938)년 1월 정안툰전투때에도 최경화동지는 자진해서 돌격조에 망라되여 부대의 진격로를 개척하였다. 최경화동지를 비롯한 돌격대원들이 은밀히 담을 넘어 들어가서 보초를 제끼고 성문을 여는 순간이였다. 적순찰병놈들에게 발견된 그들은 집중사격권안에 들게 되였다. 다른 동무들이 성문을 여는것을 엄호하기 위하여 그는 단신으로 적을 향하여 돌격해들어갔다.그러다가 그만 복부에 적의 흉탄을 맞았다. 최경화동지는 부상당한 몸도 돌보지 않고 성문이 활짝 열리고 부대가 성난 사자처럼 성안으로 밀고들어갈 때까지 계속 사격하면서 적들을 견제했다. 전투는 승리로 끝나고 정안툰은 해방되였다.
밀영으로 가는 길에서도 그이께서는 줄곧 최경화동지를 눕힌 담가옆에서 걸으시며 자신의 외투까지 벗어서 그에게 덮어주시였다. 최경화동지는 간신히 눈을 뜨더니 누군가를 찾는듯 둘러보았다.
최경화동지는 이런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날 밤 밀영으로 돌아오신 그이께서는 밤깊도록 고깔불앞에서 손수 추도사를 쓰시였다.한자를 쓰시고는 생각하시고 다시 한자를 쓰시고는 비통한 눈물을 훔치시면서 최경화동지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시였다.어느덧 먼동이 터오고 고깔불도 이미 꺼진지 오랬건만
최경화동지의 추도식은 살을 에이는 혹한속에서 엄숙히 거행되였다.
최경화동지의 한생은 우리 인민과 인민군장병들의 가슴마다에 혁명의
김성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