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8월 3일 로동신문
항일혁명투사 리을설동지가 받아안은
백두에서 시작된 조선혁명의 장구한 로정에는 당과 조국에 무한히 충실한 참된 혁명가들의 자욱이 무수히 새겨져있다. 결코 처음부터 준비된 사람들로 대오를 뭇고 시작한것은 아니지만 우리 혁명이 수천수만의 열혈투사들을 자랑스럽게 배출하게 된것은 그들모두를 품에 안아 키워주신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은혜로운 손길이 있었기때문이다.
항일혁명투사 리을설동지도
햇병아리소년중대원으로 불리우던 항일유격대시절부터 조선인민군 원수로 생을 마무리할 때까지 오로지 충성의 한길만을 걸은 리을설동지, 그의 한생은 평범하였던 인간이
항일의 로투사, 옛 경위대원
따사로운 해빛이 강산에 흘러넘치던 주체101(2012)년 4월이였다.
《리을설동지! 또다시 보내주신 편지를 고맙게 받아보았습니다. 로투사동지들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혁명을 위해 나의 모든것을 다 바쳐 가겠습니다. 을설동지! 항상 건강해주십시오. 로투사동지들이 건강한 몸으로 계셔야
전투적인사를 올립니다. 경례! 2012년 4월 27일
피눈물의 12월에 이어 벌써 두번째로 받아안는 우리
그의 나이는 어느덧 아흔한살, 최고사령부 검열관으로서 군복은 입고있지만 당과 혁명을 위해 이전처럼 일을 꽝꽝 하지 못하는 그였다.하지만
그이의 한없는 믿음과 사랑에 접할수록 리을설동지는
그가
어떤 지휘관들은 키가 총기장보다 더 작은 애숭이들이 어떻게 왜놈들과 싸우겠는가고 하였지만
입대한지 얼마 안 있어 주력부대와 함께 백두산으로 진출하던 어느날 리을설동지는 행군의 휴식참에
리을설동지는 이렇게
소년중대가 첫 전투에 참가하게 되였을 때에는 흥분으로 들먹거리는 리을설동지의 어깨를 다정히 눌러주시며 적을 단방에 쏘아잡을수 있게 정확히 조준하도록 일깨워주시고 눈보라를 헤치는 행군길에서는 그의 총도 친히 메여다주시며 하루빨리 훌륭한 유격대원으로 자라나도록 이끌어주신
주체27(1938)년 12월부터 그 이듬해 3월까지 진행된 고난의 행군은 리을설동지에게 있어서 한생 잊을수 없는 혁명대학과정이였다.
한다하는 구대원들도 지탱하기 어려워했던 간고한 행군길에서 모진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내며 한치한치 걸음을 옮기던 리을설동지는 어느날 극심한 피로로 쓰러지게 되였다.한참만에 그가 정신을 차리고보니
민중의 기 붉은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시체가 식어 굳기 전에 혈조는 기발을 물들인다 …
순간 정신이 번쩍 든 리을설동지는
《이 어려운 고비를 견디여내자. 우리가 여기서 주저앉으면 조국이 영영 일어나지 못한다.》
그때 리을설동지는 얼마나 뜨거운것을 삼키였던가.일제를 쳐부실 열망뿐이였던 소년중대원들에게 적과 싸워 이기는 법,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는 법, 자신을 수양하는 법 등을 하나하나 배워주시고 열렬한 애국심과 혁명적신념, 숭고한 동지애를 깊이 심어주신
리을설동지가 경위대원으로 활동하던 시기 안도현의 한 밀영에서 사령부가 변절자 림수산이 끌고온 적《특수부대》의 포위에 든적이 있었다.당번보초였던 리을설동지가 식사를 하는 동안 친히 보초를 서고계시던
《적들이 포위환을 좁히며 다가들자 리을설은 수류탄을 뽑아들고 우뚝 일어서서 〈이놈들아, 덤빌테면 덤벼들라.너 죽고 나 죽고 해보자!〉고 부르짖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서슬푸르고 도고했던지 적들은 비실비실 뒤로 물러섰다.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강위룡은 나를 탄막속에서 완전히 뽑아내였다.》
리을설동지와 같은 어제날의 품팔이군, 문맹자, 머슴군들이 이렇듯
로투사!
태양을 옹위하는 길에서
주체73(1984)년 2월에 리을설동지는 호위총국장(당시)으로 임명되였다.항일무장투쟁시기에는 경위중대 기관총수로, 해방후와 조국해방전쟁시기, 전후시기에는
리을설동지의 눈가에는 뜨거운것이 고여올랐다.한생 품어주고 키워주신 그 손길로 생의 마지막까지 보살펴주시려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하지만 그는 자기가 어떻게 되여 호위총국장의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되였는지 다 알지 못하였다.
전 호위총국장이 다른 직무에 조동된 후
《리을설이
리을설은 소년중대시절부터 현재까지 나를 위한 호위사업에 한생을 바치면서도 나의 뜻을 어기거나 임무수행에 태공한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자나깨나 오직 자기
내가 1939년에 올기강에서 낚시질을 할 때에도 내뒤에서 기관총을 걸어놓고 호위사업을 한 사람은 경위대원 리을설이였습니다.》
조선인민군 대련합부대장으로 사업하던 시기에도 리을설동지는
1960년대말 직권을 악용하여 안하무인격으로 놀아댄 한 군벌주의자가 있었다.어느날 그자는 부대에 나타나 리을설동지가 자기에게 굽신거리지 않는다고 트집을 걸다못해 군단장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다짜고짜로 령장을 떼려고 덤벼들었다. 그때 리을설동지는 군벌주의자의 손을 단호히 쳐갈기며 꾸짖었다.
《경거망동하지 말라.나는
그의 기상에 질겁한 군벌주의자가 자기에게 신경병이 있어서 그랬으니 리해해달라고 애걸복걸하였으나 리을설동지는 《똑똑히 들으라.이 리을설은
자기자신만이 아니라 호위전사들 누구나 오직
조국해방전쟁이 한창이던 어느날 리승엽이 최고사령부로 찾아온적이 있었다.그때 친위중대 보초병은 호위근무규정대로 그를 단속하고 오늘은
후날 이 일을 알게 되신
리을설동지의 배짱은 나는
주체41(1952)년 봄이였다.어느날
강철의 령장이실뿐아니라 한없이 소탈하고 검박한 위인이신
오랜 기간
하기에 밥술을 뜨거나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가 호위총국장으로 임명된 이듬해 4월 조국해방전쟁사적지를 찾으신
주체41(1952)년 8월 최고사령부를 겨냥한 미제공중비적들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갱도입구로부터 불과 20m 되나마나한 곳에 반t짜리 육중한 폭탄이 떨어졌다.다행히도 불발이였으나 정황은 매우 긴박하였다.폭탄이 언제 터질지 알수 없었던것이였다.리을설동지는 비상회의를 열고 부관들과 호위성원들에게 결사전을 호소하여 목도로 그 시한탄을 메다가 뒤산너머 골짜기에 내던질것을 결정하였다.
위험한 불발탄을 어떻게 그 먼곳까지 날라가겠는가, 그 자리에서 터치는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의 립장은 드팀이 없었다.불발탄을 그 자리에서 터치면
비장한 각오를 품고 위험한 불발탄이 실린 무거운 목도를 앞장에서 메고 한치한치 나아가던 리을설동지의 모습을 정녕 잊을수 없으신 우리
그가 수십년세월 한번도 입밖에 낸적이 없는 그날의 위훈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신
《리을설동무, 우리 같이 그때를 회상하면서 기념사진이나 한장 찍읍시다.》
그날의 기념사진, 그것은 우리
절세위인들의 남다른 믿음속에 충성의 자욱을 새겨가던 리을설동지는 자기 한생에서 가장 가슴아픈 일에 부닥치였다.
피눈물의 7월이 흐르던 어느날 밤 리을설동지는 펜을 들었다.
조의기간 늘
정말 그때 죄많은 이 늙은이는
항일무장투쟁시기부터
하지만 그에 대한
정녕 그것은 한생토록
살아도 영광, 죽어도 영광
주체104(2015)년 11월 7일
《리을설동지는 총을 잡고 혁명의 길에 나선 첫날부터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투철한 신념과 백옥같은 량심을 지니고
리을설동지는 평범한 나날에나 시련의 시기에나 변함없는 자세로 당과
우리 혁명의 원로이며 당과 조국앞에 큰 공적을 세운 항일혁명투사들이 편히 앉아 이 세상 만복을 누리게 하시려는것이 우리
리을설동지는
금수산기념궁전공사가 한창이던 주체85(1996)년 3월 어느날
그러시면서
《이것은
그가 떠나던 날
비행기가 리륙하여 점점 멀어질 때까지도 바람에 옷자락을 날리시며 비행장에 서계신
어찌하여 그이께서 그처럼 바쁜 때에 그를 외국으로 떠밀어보내시고 비행장에까지 나오시여 오래도록 바래워주시였는지 리을설동지가 알게 된것은 얼마후였다.그를 검진한 병원에서는 그가 불치의 병에 걸려있으며 시급히 수술해야 한다고 결론하였던것이다.
리을설동지는 본인도, 안해와 자식들도 모르는 병조를 가려내여 제때에 치료를 받도록 하신
50여일이 지나 조국에 돌아온 리을설동지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바래워주시던 그날처럼 그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신
《호위사령관동무는 일생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어린 나이때부터
그리고 이번에는 페수술을 받느라고 고생을 하였습니다.호위사령관동무의 복부를 보면 성한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순간 로투사의 뇌리에는 수십년전의 못 잊을 사연이 어제런듯 갈마들었다.
해방직후 함흥에 파견되여 사업하던 그가 반동놈들의 흉탄에 심한 부상을 입은적이 있었다.그때
리을설동지가 도착하였을 때
《나는 김책동무로부터 동무가 반동놈들의 총탄에 맞아 사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걱정했습니다.그런데 이렇게 성한 몸으로 돌아왔으니 인젠 발편잠을 자게 되였습니다.》
그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나
열화같은 그 사랑을 그대로 이어주신분은
리을설동지는
한생토록 체험한
우리의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정한 로투사의 묘소에 흙을 얹어야 할 시각이 다가왔을 때 한 일군이 준비한 삽을
그이의 뜨거운 손에 실려 투사의 묘소에 정히 얹혀진 그것이 정녕 무심한 흙이였던가.혁명의 원로들을 무한히 존대하고 귀중히 여기시며 영원한 삶을 안겨주시는
이 숭엄한 화폭앞에서 투사의 유가족들만이 아닌 온 나라 인민들과 인민군장병들이 격정의 눈물을 쏟았다.
숭고한 도덕의리의 화신이신
리을설동지의 값높은 한생은 우리모두에게 새겨준다.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품이야말로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을 열혈혁명가, 불굴의 투사로 키워 가장 고귀한 삶을 안겨주는
그렇다.대를 이어 절세의 위인을 높이 모시여 수천수만의 충신들이 끝없이 자라나고 백두에서 시작된 우리 혁명의 충실성의 전통이 굳건히 이어지며 우리 조국은 그 어떤 풍파속에서도 줄기차게 전진해나가는것이다. 본사기자 허명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