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8월 18일 로동신문
우리 주규창동지의 한생을 빛내여준
일편단심 당과 숨결도 운명도 함께 하는 충신들의 대부대가 주체혁명위업완성의 억척의 의지를 안고 당중앙을 옹위하며 장엄한 진군을 다그치고있다.
해방전 잔뼈가 굵기 전부터 소년로동을 강요당하며 인생의 최하층에서 쓰라린 치욕을 체험한 주규창동지가 어떻게 되여 원사, 교수, 박사로 자라나 인민의 사랑을 받고
여기에 영광스러운 우리 당력사에 아로새겨진 숭고한 동지애의 일단을 정히 펼친다.
《주규창 당중앙위원회 군수공업부 고문은
한없이 숭고한 동지적믿음과 사랑으로 수놓아진 한 평범한 혁명전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사람들은 우리 인민모두의 운명도 미래도 다 맡아안고 혁명의 천만리를 헤쳐나가는
영광과 행복의 절정
우리 조국의 력사에서 새로운 전환기가 펼쳐지던 주체101(2012)년 2월 15일이였다.
이날
그날 주규창동지는 분에 넘치게도
상장의 군복차림으로
한없는 격정에 휩싸여있는 주규창동지를 몸가까이 불러주신
주규창동지는 상상도 할수 없었던 신임을 받아안은 격동된 심정을 담아
그러한 그를 바라보시며
그러시면서
순간 장내는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세차게 일렁이였다.
주규창동지는 영광과 행복의 절정에서 눈시울을 적시였다.
사무실에 돌아와서도 군복을 어루쓸어보는 그의 눈가에는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지극히 평범하던 그를 당에 무한히 충실한 전사로 키워주시고 그의 인생을 끝없는 행복과 영광으로 빛내여주신분이
사랑하는 전사를 늘 곁에 두고싶어하시며
《주규창동무는 나의 충실한 방조자입니다.》라고 정담아, 사랑담아 친근히 말씀하시던
그가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중임을 맡은 때로부터 얼마 안되던 주체90(2001)년 4월 어느날이였다.
주규창동지의 이름을 친근하게 불러주신
그가 맡은 일을 원만히 해내겠는지 걱정된다고 말씀올리자
이렇게 되여 주규창동지는
끓어오르는 흥분을 얼마만이라도 눅잦혀보려고 그는 달리는 차에서 줄곧 창밖을 내다보았다.젖빛안개가 함흥시가의 즐비하게 늘어선 살림집지붕들을 뒤덮으면서 바다멀기마냥 끊임없이 넘실거리였다.
주규창동지의 인생에 깊은 자욱을 남긴 잊지 못할 곳이였다.1960년대 중엽 어느 한 연구소에서 일하던 그가
지난 기간 기업소 로동계급이 생산한 설비들을 보시며 기쁨을 금치 못하신
쪽잠에 줴기밥을 드시면서도 로동계급을 찾아 마음달리시는
절세위인의 하늘같은 믿음에 떠받들린 로동계급이 와와 소리치며 들고일어나는 모습, 그 장엄한 기상이 안겨와 주규창동지의 가슴은 바람안은 돛폭처럼 한껏 부풀어올랐다.
이렇게 그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훌륭한 인민을 알게 해주시고 인민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성장의 걸음걸음에 아낌없는 정과 열을 기울이신
그 많고많은 날들중에는 주규창동지가 늘 잊지 못해한 어느해 가을날의 이야기도 있다. 그날은 주체91(2002)년 10월 23일이였다.
주규창동지를 불러주신
화기에 넘친 담화가 이윽토록 진행되는 행복의 순간이였다.
흔치 않은 기회에 자나깨나 가슴을 불태우는 념원을 아뢰일 충동이 치밀어 그는
그러자
천금보다 귀중한것이 시간이라고 하시는
아, 이런
이름할수 없는 충격, 솟구치는 산악같은 힘으로 하여 그의 심장은 세차게 고동쳤다.
우리
언제인가 먼 출장길에 있던 주규창동지가 뜻밖의 사고로 큰일을 당할번 한적이 있었다.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오랜 시일이 걸려야 하는 치료였다.그지없는 송구스러움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전대미문의 시련의 언덕을 넘고넘으시는
하지만 전사들의 건강상문제와는 타협을 모르시는
동무가 치료를 받느라고 나의 사업을 잘 보좌하지 못하여 안됐다고 하는데 절대로 미안해하지 말고 치료를 받아야 하겠다, 조급해하지 말고 치료를 잘 받아야 하겠다. 이렇게 당부하시기를 몇차례, 그루를 박으시기를 그 몇번…
마침내 그가 완쾌되여
그를 반갑게 맞아주신
언제인가 그가 감기에 걸리였을 때에는 출근하지 말고 며칠동안 집에서 안정하면서 치료를 받아야 하겠다고 곡진한 과업을 주신
이런 각별한 사랑으로 어느해 3월에는 현지지도의 길에서 그에게 간곡히 당부하시였다. 《동무는 나이가 있는것만큼 건강에 각별히 주의하여야 합니다.나는 동무가 앓지 말고 건강하여 일하기를 바랍니다.》
찌는듯 물쿠는 속에서도 끊임없이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던 어느해 8월
고향과 살아온 경력, 일터는 서로 달라도
한사람한사람에게 혈연의 정과 열을 쏟아온 잊지 못할 나날들이 떠오르신듯
그들중에는 전해에
믿음과 사랑이 어린 시선으로 전사를 바라보시며
《주규창 당중앙위원회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도 80살이 넘은 오랜 일군입니다.》 마디마디에 눈물겹도록 뜨거운 정이 넘쳐흐르는 어버이의 사려에 과연 누구인들 심장이 높뛰지 않을수 있으랴.
너무도 황송하여 진정하지 못하고있는 그의 손을 따뜻이 잡으신
사랑하는 전사의 앞길에 영광과 행복의 날이 계속되기를 바라시는
그날 저녁 그의 집에서는
아, 한번 안기면 열백번 안기고싶고 죽어서도 영원히 안겨살
절세의 위인과 영원히 생사운명을 같이하고 그 어떤 풍파가 닥쳐와도 그이를 결사옹위할 신념과 의지가 그의 가슴에 산악처럼 더욱 굳건히 자리잡았다. 주규창동지는 생의 한순간한순간 이날에 다진 충성의 맹세를 실천하기 위해 피타게 사색하고 헌신해왔다.
능력이 딸릴 때에는 안목도 틔워주시고 내밀성이 부족할 때에는 담을 키워주시며 신임을 베푸시고 용기를 안겨주신
어제날 소박하고 순진한 농촌청년이였던 주규창동지,
하지만 그때까지만 하여도 그는 앞으로 자기의 삶을 얼마나
기슭이 없는 사랑의 대하
인간이 오를수 있는 영광과 행복의 절정은 조국과 인민의 추억속에 애국자로, 충신으로 영생하는것이다.
이런 영예와 행복은 누구나 바란다고 하여 지니게 되는것이 아니며
그이의 따뜻한 손길에 이끌리여 주규창동지는 로쇠를 모르고 로당익장하며 생의 마지막까지 당의 위업에 충실할수 있었다. 산과 들이 가을단장을 곱게 하던 몇해전 10월이였다.
우리 조국의 매일, 매 시각이 세계정치사에 거대한 충격과 여운을 남기며 격동적으로 흐르던 그무렵의 어느날
주규창동지는 년로로 하여 어느 한 연구기관에서 고문으로 일하고있었다.
자신께서는 주규창고문의 나이가 88살이지만 그를 중앙당 군수공업부 고문으로 올려오려고 한다고, 그에게 권한을 주어 연구부문이든 공장이든 가고싶은 곳에 다 가보게 하려고 한다고, 그러면 그가 매우 좋아할것이라고 하신
주규창고문과 같은 전세대들을 떠나서 오늘의 군수공업에 대하여 생각할수 없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당과
혁명전사들에 대한 그이의 한없이 숭고한 혁명적의리의 세계는 실로 만사람을 격동시키는것이였다.
이날 당중앙위원회 한 책임일군을 찾으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계시던
사랑하는 전사에 대한
그러한 그에게
그로부터 며칠후
참으로 다심하기 이를데 없는 보살피심이였다. 일군들로부터 이런 감동적인 사연을 전해듣는 그의 심정이 오죽하였으랴.
오열에 흐느끼는 그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일군들도 뜨거운것을 삼키였다. 세상에 다시없을 이런 신임에 떠받들리여 주규창동지는 더 큰 중임을 맡아안게 되였던것이다. 그때로부터 한달이 채 되지 않은 어느날이였다.
당중앙위원회의 한 일군을 찾으신
소박하면서도 민족적풍습과 례법을 갖추어 차린 생일상앞에 정히 앉은 그는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였다.
주규창동지는 지나온 생을 뜨겁게 돌이켜보았고 무슨 말로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할지 할 말을 찾을수 없다고 곱씹기만 하였다.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처럼 오직
그날 그지없는 어버이사랑에 목메여 눈시울적시며 감회깊은 회포를 나누던 오랜 친지들도 다 돌아간 깊은 밤이였다.
주체100(2011)년 9월 어느날도 그런 날중의 하루였다.
련일 정력적인 혁명활동을 벌리시는
비록 나이는 들었어도 당을 받들어 충신의 자세를 변치 않는 그를 더없이 미더워하시는
그의 건강과 사업에 대하여 사려깊이 헤아려주시며
《부장동무는 앞으로도 건강한 몸으로 지금 맡고있는 사업을 계속 잘해주어야 합니다.부장동무가 맡고있는 사업을 대신할 사람이 없습니다.그러므로 부장동무는 건강관리를 잘하여야 합니다.》 그 순간 주규창동지는 뜨거운것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내 생명 다할 때까지 당의 크나큰 신임과 기대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그의 모습에서 이런 불타는 맹세를 읽으신
주규창동지의 심장은
(내가 맡은 직책상임무만이라도 충실히 수행한다면
이런 책임감으로 그의 마음은 늘 큰 연덩어리를 안은듯 무거웠다.
모든 부문에 전문가이상으로 밝고 정통해야
맡은 부문에 대한
어떤 때는 며칠밤을 밝혀가며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였고 또 어떤 때는 적지 않은 시일이 걸려야 할 공장, 기업소들의 실태료해를 단 며칠동안에 진행하고 현지에서 사업을 작전하고 전개하였다.다른 사람들에게 줄 임무도 자기가 발벗고나서 책임적으로 수행하였다. 나이도 많은데 조직사업만 하면 되지 않는가고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일군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그 투지와 기백은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서 류례없이 준엄한 시련의 시기였던 지난 세기 90년대 사탕알이 없이는 살수 있어도 총알이 없이는 살수 없다고 하신
완강한 실천력으로 당정책을 신속정확히 집행한 주규창동지,
하기에
당에 대한 충실성을 체질화한 전사의 훌륭한 성품을 그렇듯 중히 여기시며 높이 내세워주신
그 무한한 믿음과 사랑으로
두해전 1월 1일 주규창동지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실려온 후 그는 병마와 힘겹게 싸웠지만 끝내 이겨낼수 없었다. 그날은 그해 9월 3일이였다.
시련의 나날
비록 숨은 졌어도 내 생명 다할 때까지 당의 크나큰 신임과 기대에 꼭 보답하겠다고 하던 그날의 맹세를 실천하기 위해 지금도 애쓰듯 근엄한 표정으로 전사는 기척없이 누워있었다.
금시라도 찾으면 수줍은 얼굴에 홍조를 띠우던 평시의 모습으로 인사를 할것만 같은 로혁명가의 얼굴을 한참동안 들여다보시는
90살을 가까이한 그에게 주실수 있는 믿음과 사랑을 다 베풀어주시고도 그처럼 비통해하시는
영결의 아픔을 못이겨하시며
《그는 지금까지 당과
형언할수 없는 애석함을 안고계시면서도
유가족들의 흐느낌소리가 고조되였다.
우리 당과 인민이 영원히 잊지 못할 주규창동지의 고결한 생애에 뜨거운 추억을 얹으시고
《주규창 당중앙위원회 군수공업부 고문이 지녔던 당과
주체혁명위업수행에 특출한 공헌을 한 로혁명가에 대한
또한 당과 혁명앞에 무한히 순결하고 고지식하였던 충신의 삶을 새세대들이 고스란히 이어가게 하시려는 그이의 고결한 뜻의 발현이였다.
흐르는 눈물속에 남편에 대한, 아버지에 대한
휘발유를 태우는것이 아깝다고 하면서 어쩌다 집에 들어오는 날에도 교외에서 걸어서 퇴근하여 안해의 속을 태운 주규창동지였다. 제일 어렵고 힘든 곳으로, 이것이 자식들의 전망과 관련한 그의 어길수 없는 기준이였다. 오래동안 한컬레의 신발만 계속 수리하면서 신는 아버지에게 마련해준 새 신발을 끝내 사양하여 사랑하는 딸을 울린 고정한 일군, 먼곳의 대학으로 떠나야 하는 자식을 하루라도 더 끼고있고싶어 왼심을 쓰는 딸에게 《당장 떠나보내야 한다.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 가정은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부모들이 싸고돌면 자식을 그르치게 한다는걸 알지 못한단 말이냐?》라고 벼락을 친 집안의 엄한 가장이였던 주규창동지, 오늘 조선혁명박물관에 정히 보관된 원사, 교수, 박사증서들도 그가 자기 집 벽면에 거는것을 한사코 반대하여 걸지 못하던 증서들이 아니던가.
충신은 우리곁을 떠났어도
주규창동지의 삶을 빛내여준 은혜로운 품, 이 땅의 천만사람모두를 혁명가로 키워 어엿하게 내세워주시는
인간으로서, 혁명가로서
본사기자 량 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