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9월 3일 로동신문
인민의 참된 충복으로 키워준 은혜로운 품 전 전천군상업관리소 소장 정춘실동지가
《일군들은 인민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인민들을 위하여 한몸바쳐 투쟁하는 인민의 참된 충복이 되여야 합니다.》
나라없던 세월 두메산골 처서군의 딸로 태여난 그의 한생에 끝없이 아로새겨진 영광에 대한 이야기는 오직 인민을 하늘처럼 떠받드시는 절세위인들의 품속에서만 엮어질수 있는 전설적인 서사시이며 인민을 위하여 멸사복무하는 조선로동당이 있기에 영원한 메아리로 울려퍼지는 우리 식 사회주의찬가이다.
인민의 충복이 태여난 품
지금으로부터 7년전인 주체102(2013)년 10월 10일 혁명의 수도 평양에서는
이날 공연장소에서는 참으로 가슴뜨거운 화폭이 펼쳐졌다.우렁찬 만세의 환호를 올리는 관람자들속에서 자강도의 녀성공로자들을 알아보신
자나깨나 못 견디게 뵙고싶던
환하게 웃으시며 그들 한사람한사람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는
정춘실동지는 꼭 꿈을 꾸는것만 같았다.너무도 뜻밖에 차례진 영광의 순간이여서 미처 인사말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 그였다.
그날 그는 베개잇을 눈물로 적시며 온밤 잠들지 못하였다.
주체47(1958)년 8월 5일, 한생토록 잊지 못할 영광의 그날도 이렇게 꿈만같이 찾아왔었다.자강도인민들을 잘살게 하시려 로고의 길을 이으시던
지난날 자강도지방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뒤떨어진 산골이였으며 이곳 인민들은 제일 어렵게 살았다.공화국이 창건된 해에
언제나 심중에 저려오는 자강도인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시려
무거운 마음을 안으시고 회의장을 나서신 길로 자강도의 여러 단위를 현지지도하신
바로 그속에 17살 처녀판매원인 정춘실동지도 있었다.나이는 몇인가, 부모는 무슨 일을 하는가, 애로되는것은 없는가 하나하나 물어주시며 인민들에게 더 잘 복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차근차근 일깨워주신
당과 국가의 전반사업을 놓고볼 때 두메산골의 한 처녀판매원이 하는 일이란 사실 반디불같이 작은것에 불과하다.그러나 그 작은 불빛들이 합쳐지고 커져서 자강도인민들의 생활에 윤택을 주고 따뜻한 온기를 보태주기 바라시는 마음이 간절하시여 그날
그때로부터 3년이 지나 수도 평양에서는 전국상업일군열성자대회가 열리였다.
그가 토론을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서려고 할 때였다.
《춘실동무, 이리 오오.여기 와서 앉소.》라고 하시는
대회장에 우뢰같은 박수소리가 울리고 경탄과 부러움에 넘친 모두의 시선이 온몸에 닿을 때까지도 정춘실동지는 눈앞의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이렇게
그해 5.1절을 맞으며 평양시경축대회가 진행될 때 동무와 같은 우리 시대의 혁신자들이
나날이 한계를 모르고 커지면서 그 무엇에도 비길수없이 뜨거워진 정춘실동지에 대한
주체53(1964)년 4월 몸소 그가 일하는 상점에 또다시 찾아오시여 《우리 가정수첩》이 나오게 된 경위와 그 리용실태에 대하여 자세히 들어주신
자신께서는 현지지도를 하다가도 인민들을 더 잘살게 하기 위하여 애쓰는 일군들을 만나면 제일 기쁘다고 하시면서 언제인가 농장원들의 밥사발을 좀 해결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제기하는 한 농촌일군을 두고서도 못내 대견해하신 우리
그로부터 얼마후 자강도에서는 강계청년발전소조업을 경축하는 강계시군중대회가 성대히 진행되였다.몸소 군중대회에 참석하신
주체80(1991)년 9월 26일 고령에 이르신
다심한 어버이사랑을 부어주시며 뜻깊은 기념사진까지 찍어주신
그때 평양에서는 중요한 대회가 곧 열리게 되여있었고 외국대표단들까지
이렇게 전천공업품상점을 또다시 찾아주신
인민이 하늘처럼 귀중하시고 인민에게 기쁨과 행복만을 안겨주고싶은 그 마음이 정녕 끝이 없으시기에 우리
그
조국과 인민을 열렬히 사랑하는 참다운 혁명가의 전형들을 키워 인민이라는 바다에서 영원히 빛을 뿌리도록 하신것은 우리
동무를 전당은 적극 지지할것이라고 하시며
주체80(1991)년 12월 당보에는 정춘실동지가
온 나라를 커다란 감동과
하늘높이 자라 무성한 잎새를 펼친 아름드리거목우에는 사시장철 빛과 열을 주는 태양이 있듯이
인민의 참된 봉사일군답게 계속 일을 잘해서
하지만 하늘도 이루어줄수 없는 그 소원을 헤아려 풀어주신분은 우리
며칠도 아니고 몇달도 아니고 기나긴 한생을 정춘실동지는 이런 사랑과 믿음속에서 살았다.최고인민회의 제6기 제1차회의가 열리게 되였을 때에는 외국에 친선참관단의 한 성원으로 가있는 정춘실동지를 데려오시려 은정어린 특별비행기를 보내주시고 그가 회의에서 읽을 토론문까지 하나하나 보살펴주시며
그로부터 두해가 지나
《…저를 친자식처럼 맡아서 키워주시고 온 나라에 영웅으로 내세워주신
자그마한 가식도 없이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아뢰여올린 소박한 편지였으나 그것은 이 세상의 수백수천마디 아름다운 어휘로써도 대신할수 없는 뜨거운 경의였고 충성의 맹세였으며 축복받은 인생의 아름다운 노래였다.
이렇듯 자애로운 사랑과 하늘같은 믿음속에서 성장한 정춘실동지의 삶은 지난 1990년대초
우리 인민이 민족의 대국상을 당한 피눈물의 해에 정춘실운동선구자대회를 열도록 해주신
《나는 동무를 믿습니다.
1994.12.14
하늘처럼 믿고 살아온
주체96(2007)년 8월
로동당시대가 정춘실동지와 같은 혁명가들이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의 삶을 구가하는 광활한 무대라면 그 아름다운 자욱자욱들을 비쳐주는 눈부신 빛발은 이렇듯 위대하신 어버이의 사랑과 믿음이였다.
충복의 삶은 영원히 빛난다
정춘실동지는
어린시절 제비다리같이 가냘픈 자기의 두다리를 감싸줄 온전한 치마 한벌 줄수 없었던 그 고장에
일생을 같이하여온 남편도 한해전에 세상을 떠나고 당의 배려로 평양에서 대학을 다닌 자식들도 슬하를 떠난지 오래되였지만 그가 마지막까지 기어코 전천을 떠나지 않으려고 한데는 사연이 있다.
주체80(1991)년 9월
전천땅 그 어디에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있었던가.한 손님이 요구하는 상품을 구입하러 하루밤에 산짐승들이 어슬렁거리는 80리길도 서슴없이 다녀오던 처녀시절의 모습이 그 땅에 간직되여있고 판매원들과 함께 집집의 문을 두드리며 주민들의 생활에 부족되는것은 무엇인가, 새로 더 차려줄 살림도구들은 어떤것인가를 《우리 가정수첩》에 또박또박 적어가던 정깊은 얼굴도 그 땅에 속속들이 어려있다.
한번 외우기만 해보아도 우리 식 사회주의의 참모습이 후덥게 안겨오는 《우리 가정수첩》은 정춘실동지가
주체68(1979)년 10월 어느날
애써 마련한 뽕나무모를 화차에 싣고 온 그가 종업원들과 함께 뽕나무밭으로 개간한것이 전천군 읍에서 시오리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장풍덕이다.옛날부터 바람이 잦을새없다 하여 장풍덕이라 불리워온 그곳에 그해따라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상품공급사업밖에 해본것이 없는 상업일군들을 데리고 무릎치는 눈을 헤치며 개간전투를 벌리자니 여간만 어렵지 않았다.새벽부터 밤늦도록 종업원들과 함께 잡관목을 베여버리고 뿌리를 들추어내며 개간작업을 하고 밤에는 또 밤대로 뽕나무기르기, 누에치기와 관련한 기술학습을 하느라 정춘실동지는 이를 악물고 일하였다.그런 간난신고끝에 첫해에 개간한 5정보의 땅이 후에는 수십정보로까지 늘어났다.여기에서 해마다 뽕나무도 키우고 정보당 12t이상씩 강냉이도 생산하여 군내인민들의 생활에 보탬하였으며 나라살림에도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일년내내 수수한 작업복차림으로 거름을 나르고 수십년전 찬비를 맞으시며 자기들의 상점을 찾아주시였던
당정책이 열가지이건, 백가지이건 끝까지 이악하게 관철하면서 정춘실동지가 이렇게 인민들의 생활을 돌보고있다는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계신
어느해 11월 당, 국가, 경제지도일군협의회를 지도하실 때
《나는 그와 같은 인민의 충복이 매개 군에 한명씩만 있어도 정말 좋겠다고 생각합니다.매개 군에 그와 같은 인민의 충복이 한명씩만 있으면 인민생활문제가 적지 않게 풀릴수 있을것입니다.그와 같이 일 잘하는 일군이 한 200명 있으면 나라의 모든 일이 잘될것이며 사회주의건설도 더욱 앞당겨질것입니다.》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정춘실동지는
정춘실동지가 전천군인민들과 영결하고
그에게 있어서 인민은 곧
인민을 하늘처럼 떠받드시는 또 한분의 절세위인을 높이 모신것은 우리 인민과 함께 정춘실동지와 같은 충복들이 받아안은 최상최대의 행운이고 영광이다.
그이께서 높이 추켜드신 인민대중제일주의의 기치는 그대로
인민이라는 성스러운 그 이름과 더불어 조선로동당이 영원하듯이
본사기자 리 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