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9월 28일 로동신문
은혜로운 태양의 품속에서 영생하는 애국의 삶 한 총련일군이 남긴 충성의 자욱을 더듬어
재일조선인운동사의 갈피마다에는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애국위업의 강화발전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친 총련일군들의 값높은 생의 자욱이 수놓아져있다. 총련이 형언할수 없는 시련의 광풍속에서도 좌절을 모르고 지나온 년대들에 승리와 영광만을 수놓을수 있었던것은 바로 조국에 무한히 충실한 이런 일군들이 억척같은 뿌리가 되여 애국위업이라는 거목을 떠받들어왔기때문이다. 그 못 잊을 군상속에는 총련중앙상임위원회 부의장이였던 로재호동지의 모습도 있다.
《우리 공화국의 건국과 수호, 기적과 번영의 성스러운 발전행로속에는 머나먼 이역땅에서 람홍색공화국기를 창공높이 휘날리며 애국애족의 선각자, 애국충정의 모범, 세계해외교포조직의 본보기의 영예를 떨쳐온 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의 고귀한 피와 땀이 뜨겁게 스며있습니다.》 재일조선인운동의 1세로서 한덕수의장과 함께 총련을 결성하는데서 핵심적역할을 한 로재호동지, 그는 한생 신들메를 풀지 않고 애국운동의 강화발전과 조국의 륭성번영을 위한 길을 걷고걸은 해외의 애국충신이였다. 실력과 인격, 일본새에서 로련하고 청렴결백하며 신망있는 일군, 소탈하고 격식이 없으며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군말 한마디없이 남모르게 많은 수고를 한 사람이라는것이 로재호동지에 대한 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의 추억이다. 절세위인들에 대한 열렬한 충성심은 로재호동지가 거치른 이역땅에서 간고하고 시련에 찬 애국의 초행길을 묵묵히, 꿋꿋이 헤쳐올수 있은 비결이였다. 일제식민지통치의 암담한 세월 태를 묻은 정든 고향을 눈물로 하직한 그는 한줄기 해빛조차 그리운 이역의 고역장에서 마소보다도 못하게 무참히 혹사당하는 조선사람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주먹을 부르쥐고 싸웠다. 당시 《동두로조》의 로재호라면 일본감독들도 진저리를 쳤다고 한다.하지만 그런다고 식민지망국노의 처지에서 벗어날수 있었겠는가. 일제의 야수적인 고문으로 페인이 된 한덕수동지를 업어내오는 그의 눈가에는 피눈물이 고였었다.
만고절세의 영웅이신
항일의 총성이 울려퍼지는 백두산으로 가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그는
산설고 물설은 바다건너 이역땅에 끌려가 민족적존엄과 삶의 권리마저 빼앗겼던 로재호동지와 같은 력사의 비참한 수난자들에게 있어서 절세의 영웅
마침내 조국이 해방된 후 동포들과 함께
사기충천한 로재호동지는
마침내 공화국이 창건되였다는 소식이 동해의 파도를 넘어 일본땅에 전해졌다. 재일동포들에게 있어서 공화국의 창건은 말그대로 운명전환의 력사적사변이였다. 하기에 이 기쁜 소식에 접한 그들은 일본땅곳곳에서 오각별 찬란한 공화국기를 휘날리며 경축대회, 예술공연, 운동회와 좌담회 등 다채로운 행사를 진행하였다.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우리도
이끌어줄
환희에 넘쳐 노상 어깨춤을 들썩이며 돌아가던 로재호동지는 오랜 궁리끝에 특색있는 행사를 준비하였다.가나가와현경축대회가 끝난 후 자동차시위행진을 벌리는것이였다. 공화국기를 꽂은 200여대의 자동차시위행렬은 실로 굉장하였다.농악대를 태운 차를 선두로 하여 마지막차가 대회장을 떠날 때까지 거의 한시간이나 걸리였다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로재호동지의 애국열의는 날로 더욱 불타올랐다. 막걸리장사로 겨우 가정의 생계를 유지해가는 안해의 병약한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입술을 깨물고 애국운동의 일선에서 맹활약하였다.
철창속에 갇히웠을 때에도 그는 신념을 저버리지 않았다.후날 그는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시기에도 로재호동지는 재일동포들을 조국수호성전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투쟁의 앞장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때없이 들이닥치는 준엄한 시련의 폭풍우를 헤쳐나가야 하는 총련일군들에게 있어서
주체62(1973)년 9월 15일은 그의 한생에서 가장 뜻깊은 날이였다.
이날 공화국창건 25돐 재일조선인축하단 성원으로
설레이는 바다우에 태양이 솟아오르는듯 눈부신 예지와 사랑의 밝은 미소를 지으신
오랜 시간에 걸쳐 재일조선인운동이 나아갈 앞길을 환히 밝혀주시고 평생을 두고 잊을수 없는 크나큰 은덕을 베풀어주시는
위인의 손길아래 애국사업을 한다는 자부와 격정의 메아리가 흉벽을 세차게 두드렸다. 어버이를 한자리에 모신 단란한 가정적분위기속에서 시간은 꿈같이 흘러갔다.
사실 그날 외국의 친선사절들과의 접견 등 행사일정이 바쁘셨지만
로재호동지는 재일조선인운동의 중요한 고비마다 가장 어려운 모퉁이를 맡군 하였다.그것은 총련결성이후 그가 력임한 귀국대책위원회 부위원장, 조선신보사 사장, 재일본조선인교육회 회장 등의 직무들이 말해준다. 일찌기 가나가와현에서 애국운동의 첫 발자욱을 떼던 시기에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노란자위땅에 조선학교들을 일떠세워 반동들의 눈알이 뒤집히게 만들었던 로재호동지는 재일본조선인교육회 회장으로 사업하던 기간 민족교육의 토대를 강화하기 위해 고심어린 노력을 기울이였다. 재일동포자녀들을 위해 해마다 사랑의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주는 조국의 은혜로운 사랑에 천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애국의 일념으로 가슴 불태우며 그는 늘 동포들속에 들어가 민족교육의 정당성과 우월성을 해설선전하고 학교들의 물질기술적토대를 튼튼히 꾸리기 위한 방도들을 진지하게 토의하면서 그들모두를 민족교육의 강화발전을 위한 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학교와 함께 있었다.민족교육에 대한 그의 사랑과 헌신은 참으로 열렬한것이였다.
조선신보사 사장으로 사업하던 시기에도 그는 《조선신보》의 사명은
조국과 총련이 함께 고난의 언덕을 넘던 시련의 그 나날 재일동포들의 가슴속에 신념의 대들보를 더욱 억척같이 세워주신
총련의 책임일군이였지만 로재호동지는 늘 허물없이 동포들과 마주앉아 흉금을 터놓군 하였다.그때마다 우리
《조국과 총련조직을 받드는 주추돌로 한생을 살겠다.이것이 나의 인생관이다.》 자식들과 친지들앞에서 늘 이런 말을 뇌이던 그는 불치의 병에 걸려 침상에 누운 후에도 총련사업을 걱정하면서 곁을 지키던 딸마저 애국초소로 등을 떠밀어보냈다.
숭고한 도덕의리와 혁명전사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지니신
이렇듯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은혜로운 손길아래 로재호동지는 해외교포운동의 저명한 활동가로 값높은 생의 자욱을 새겨올수 있었다.
태양의 품속에서 영생하고있는 로재호동지, 그의 한생은 참된 애국의 삶은
본사기자 허영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