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9(2020)년 11월 18일 로동신문
태양의 빛발아래 영생하는 이역의 참된 교육자 총련 조선대학교 학장이였던 남시우동지에 대한 이야기
총련의 교육자들은 한생을 묵묵히 애국의 뿌리가 되고 밑거름이 되여 민족교육의 화원을 가꾸어가는 사람들이다. 황금만능의 이역땅에서 누구나 쉽게 선택할수 없는 애국의 한길을 변함없이 걸으며 일신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오로지 민족교육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헌신분투하고있는 이런 미더운 사람들이 있기에 총련애국위업의 바통이 굳건히 이어지고있다. 재일조선인운동사의 갈피마다에는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애국위업의 강화발전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친 참된 교육일군들의 공적이 수놓아져있다.
《우리 공화국의 건국과 수호, 기적과 번영의 성스러운 발전행로속에는 머나먼 이역땅에서 람홍색공화국기를 창공높이 휘날리며 애국애족의 선각자, 애국충정의 모범, 세계해외교포조직의 본보기의 영예를 떨쳐온 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의 고귀한 피와 땀이 뜨겁게 스며있습니다.》 남시우동지의 경력란에는 도꾜조선중학교(당시) 교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재일본조선문화단체총련합회 사무국장, 총련중앙상임위원회 부의장, 총련 조선대학교 학장 등 애국위업의 한길에서 그가 맡았던 많은 직무들이 기재되여있다.그중에서도 총련 조선대학교 학장으로 사업한 20여년간은 남시우동지의 인생행로를 빛나게 장식하고있다.
지난날 식민지망국노의 비참한 운명속에 학교문앞에도 가보지 못하였던 재일동포들이였다.자녀들만이라도 남부럽지 않게 대학공부까지 시키고싶어하는 그들의 간절한 소원을 헤아리신
10여명밖에 안되는 그 첫 교원대렬속에 남시우동지도 있었다.교단에 섰다고는 하지만 남시우동지를 비롯한 교원들에게는 대학교육과 관련한 지식과 경험이 매우 부족하였다.있는것은 오직 끓어넘치는 애국열의뿐이였다. 과목편성은 어떻게 해야 하고 교재는 무슨 내용으로 어떻게 집필하며 대학의 전반적인 교육강령과 과정안은 어떻게 짜야 하는가. 모든것이 초행길이였다.그럭저럭 강의안을 짜보았으나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범벅이 되고말았다.애국인재를 키우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것은 명백하였지만 그 방도는 묘연하였다.
대학형편을 구체적으로 료해하신
은혜로운 손길아래 바다를 건너온 귀중한 참고서들을 오래오래 쓰다듬으며 남시우동지는 격정의 눈물을 흘리였다. 인간에게 있어서 천만금의 재부보다 귀중한것은 믿고 의지할 운명의 품이다.그 품이 있을 때 인간은 외롭지 않고 어떤 고난과 시련속에서도 비관을 모르며 긍지높고 떳떳한 삶을 누릴수 있다. 이역땅에 몰아치는 가혹한 시련과 도전의 광풍이 총련이 헤쳐나가는 애국의 항로를 끈질기게 막아나섰다.
하지만 뿌리깊은 나무가 폭풍에도 끄떡없듯이 남시우동지의 애국의 신념은 굳건하였다.
원격조종기로 자동적으로 문을 여닫을수 있게 한 책장안에 차곡차곡 꽂혀있는
이것은 주체61(1972)년 4월 탄생 60돐을 맞으시는
이 선물제작을 위해 남시우동지는 학생들과 함께 낮이나 밤이나 심혈을 기울였다.책장을 만드는데 쓸 몇백년 자란 희귀한 아름드리나무를 구하는데도 많은 품이 들었지만 그보다 난문제로 된것은 텔레비죤수상기로 볼수 있는 록화편집물제작이였다.정보산업시대인 오늘에는 별로 큰일이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남시우동지는 민족의 어버이이신
뜻깊은 그해 봄 조국을 방문한 재일조선인축하단 성원들과 함께 이 선물을 보아주신
온 대학이 감격과 환희로 끓어번지던 그때 남시우동지의 눈가에는 뜨거운것이 맺히였다. 우수한 교육자이면서 재능있는 시인이였던 그는 재일동포들속에 우리 당의 주체적문예사상을 널리 해설선전하고 애국운동에 활력을 주는 도서들과 시작품들도 수많이 창작하였다.《조국의 품안에로》, 《조국에 드리는 송가》, 《봄노래》 등 그의 시집들은 오늘도 동포들속에서 널리 애독되고있다. … 조국에 비운이 덮였던 암담한 시기 민족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시고 그이께서 무장을 잡으신 그때로부터
그이께서 밝히신 조국광복의 홰불아래 아 조선의 심장은 높뛰였고 광활한 혁명의 앞길은 펼쳐졌거니
그이께서 마련하신 혁명의 뿌리에서 우리 인민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의 기치 우리의 조국이 태여났어라! …
일찌기
주체63(1974)년 9월 24일은 남시우동지의 한생에서 가장 뜻깊은 날이였다.제2차 재일본조선교육일군 조국방문단 성원으로 조국에 온 그가 이날
참다운 애국의 진리를 가르쳐주시는
후날 그는 그날의 감격에 대하여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저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조국을 방문하여
이태후
크나큰 감격과 행복에 겨워있는 이역의 전사를 다정히 바라보시던
이날
해외교포대학의 창립을 위하여 자신께서 바치신 로고와 심혈은 전혀 생각지 않으시고 그 모든 공로를 이역의 전사들에게 돌려주시는
그때로부터 10년후인 주체75(1986)년
후날 그 영광의 기념사진을 볼 때마다 남시우동지는
촬영이 끝난 후 불타는 충성의 결의를 올리는 그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려주시면서
태양의 눈부신 빛과 열이 흘러드는 애국의 화원에 인생의 씨앗을 묻은 그때로부터 남시우동지는 이처럼 하늘같은 사랑과 믿음속에 애국의 삶을 이어왔다. 대학창립초기부터 근 50년간 교무부장, 부학장, 학장으로 사업하면서 그가 키워낸 애국인재들은 이루 헤아릴수 없다. 태양의 품에 안기였기에 이역의 평범한 교육일군에 불과한 그가 여러차례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되고 여러 국제회의에서 공화국의 위임대표로 활약할수 있었다.
이역의 사나운 풍파를 굴함없이 헤쳐나가도록 걸음걸음 이끌어주는 이렇듯 뜨거운 사랑과 믿음의 손길이 있기에 총련일군들은 오늘도 태양의 품에 운명도 미래도 전적으로 다 맡기고 애국애족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고있는것이다.정녕 그 은혜로운 해빛은 애국의 씨앗을 움틔우고 꽃피워 열매맺게 해주는 영원한 활력소이다. 본사기자 허영민 |